인도기상이해-32. 사두 순다르 싱
순다르 싱은 1889년 인도 빠띠얄라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시크교도였지만 사랑과 헌신의 여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시크교의 가르침과 더불어 힌두교의 박띠 전통(bhakti Tradition) 속에서 훈련을 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가슴으로 바가바드기타를 배웠다.
어린 시절에 받은 헌신의 훈련은 그의 삶의 모든 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어머니가 결코 기독교인이 된 적은 없지만 언제나 그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기독교적인 본성을 가진 어머니의 영혼이 천국에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에 소년 순다르 싱은 미션스쿨에서 기독교와 접촉했으나 이를 극렬히 거부했다.
그는 성경의 복사본을 불태웠으며 엄격한 시크교도인 아버지가 그의 이런 행동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기타와 우빠니샤드, 꾸란을 공부하고 요가를 연마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열다섯 살 어느 날 밤, 그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아침에 철로에 누워 자살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른 새벽 그는 아름다움에 빛나는 예수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 환상 속의 예수는 그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예수에게 복종했으며, 그리고 즉시 그의 마음에 놀라운 평화가 임했다.
그 평화는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구상에서 천국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1904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일이었으며, 그는 1905년 9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가 사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열여섯 살이 되자 그는 황토색 가운을 입은 시크교 사두가 아니라 크리스천 사두가 되었다.
초창기 유랑생활의 와중에서 그는 성 프란시스의 삶을 인도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젊은 미국인 스트록스(S. F. Strokes)를 만났다.
그들은 한동안 힘을 합쳤으며 순다르 싱은 그로부터 프란시스와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1909년에 그는 자신의 선교사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라호르에 있는 성요한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구적인 삶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그는 학문적인 신학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됐다.
1910년에 그는 라호르 교구의 설교자 자격증을 가지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후에 성공회에서뿐만 아니라 그를 초청하는 모든 교회에서 설교사역을 감당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주교에게 복종을 했다.
그에게 인도 전역과 티베트까지 이끌어간 유랑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신약성경은 그의 영적인 삶에 풍성한 자양분을 주었다.
그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신비적인 체험을 가졌다.
그는 티베트에서 죽은 시신으로 가득한 마른 우물에 자신이 던져졌을 때, 눈에 보이는 인간의 행위 없이 구원받은 일, 300년을 살았다는 히말라야 기독교 리시(현자)와 만남에 대해 말했다.
그는 1920년 영국, 미국, 호주를 방문했으며, 1922년에 유럽을 방문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당시 서구인들에게는 인도에서 온 케샵 쩐드라 센, 스와미 비베카난다에 대한 기억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베단타를 통해 인도가 서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선포를 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됐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그의 설교는 영향력이 있었으며, 비기독교인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대화하는 가운데 그 믿음이 깊어졌다.
그는 인상적인 외모와 감성이 풍부한 이야기, 단순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는 1929년 티베트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며 서른아홉의 나이에 자기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인도기독교사상>에서 (로빈 보이드 저,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