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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김나정
호박밭의 파수꾼
김나정
호박은 햇빛과 물, 흙으로 몸을 살찌운다.
며칠 째 비가 안 왔다. 깔쭉깔쭉한 호박잎 가장자리는 축 쳐졌다. 흙덩이는 푸슬푸슬 부셔졌다. 이규는 손바닥을 털고 1.5ℓ페트병 두 개를 들고 텃밭 옆에 마련된 인공 연못으로 향했다. 폭이 1미터쯤 되는 연못은 화강암으로 둘러쳐졌고, 가운데는 어른 키 높이의 용 조각이 서 있다. 이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플라스틱 통 두 개를 한꺼번에 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미지근했다. 텅 빈 물통의 아랫부분이 들려 올라가고 물방울이 올라왔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날개가 해진 잠자리, 먼지덩이, 담갈색 잎사귀들이 둥싯거렸다.
페트병 입구는 좁았다. 이규는 물이 서서히 채워지는 동안 연못에 세워진 용을 바라보았다. 용의 콧잔등에 햇빛이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물은 구불텅하게 몸통을 타고 흘렀다. 수압이 약한 탓에 용은 물을 뿜지 못하고 질질 흘렸다.
이규는 물이 채워진 페트병을 끌어올렸다. ‘남이규’란 푯말 뒤로 돌아가 잎사귀 사이에 페트병을 기울였다. 페트병이 꿀럭 꿀럭 물을 토해내자 흙은 검게 물을 빨아들였다. 빈 페트병을 세워두고 이규는 호박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시들부들한 이파리가 손바닥에 얹혔다. 푸릇하게 되살아나려면 좀더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규는 호박 주위를 맴돌며 잡초를 솎아냈다. 좌우로 흔들리던 잡초가 뿌리째 뽑혀 나왔다. 잔뿌리들은 흙덩이를 끌어안았다. 잡초 한 줌을 쥐고 이규는 무릎을 두드렸다. 시계를 보니 1시 20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났으니 사무실로 내려가 봐야 한다. 일어서던 이규는 호박 줄기에서 뭔가 꾸물대는 것을 발견했다. 구두 솔 같은 털이 난 연두색 애벌레가 줄기에 붙었다. 머리통에 붙은 촉수가 늘어났다 줄었다. 이규는 집게와 엄지로 벌레 몸통을 잡아 올렸다. 통통하고 부드러운 몸뚱이였다. 이규는 밭에서 나와 시멘트 바닥에 애벌레를 패대기쳤다. 꿈틀거리는 벌레를 구둣발로 문질렀다. 터진 몸에서 나온 진물에 흙이 묻었다. 이규는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호박잎을 헤적였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 석 대가 줄지어 날았다.
지난 봄, 빌딩 옥상에 텃밭이 들어섰다. 사장은 빗물받이 탱크 뒤, 옥상 한구석에 텃밭을 꾸미기로 건물관리소와 협의했다. 아스팔트 시트로 방수 공사를 마치고 배합토로 덮고 곁에는 작은 연못도 꾸몄다. 물레방아가 설 자리에 초록색 용 조각이 자리 잡았다. 파라솔이 꽂힌 테이블과 흰 플라스틱 의자도 놓였다.
사원들에게 텃밭을 나눠준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김은 농 삼아 대마를, 황은 뚱한 얼굴로 양귀비를 기르겠노라고 했다. 이규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했다.
목장갑을 낀 직원들이 모이자 사장은 확성기에 대고 연설을 시작했다. 살벌한 도시에서 관광업계 최전선에서 일하는 직원 여러분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주고자 회사차원에서 마련한 곳이니, 이곳을 옥토로 만들지 황무지로 만들지는 여러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확성기는 삐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운동복을 갖춰 입은 비서가 직원들을 한 명씩 호명했다. 황은 토마토를, 김은 오이를, 이규는 호박모종을 받았다. 둘째도 아들을 낳으라는 건가? 고추모종을 받아든 오 팀장은 껄껄 웃었다. 그의 아내는 임신 사 개월이었다. 사원들 모두에게 모종이 돌아갔다. 다들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매달 식물들이었다. 사장은 야채를 거두는 날 옥상에서 가든파티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박수소리가 그치자 사장은 양복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고 손수 상추씨를 뿌렸다. 황은 시멘트 바닥에서 채소들이 얼마나 자라겠냐고 말했다. 김은 귀를 긁적이며 어차피 근무시간이니 상관없다고 했다. 이규는 모종삽으로 깻묵덩이를 부셨다. 채소들은 옥상 한구석을 덮어갔다. 수확시기가 제각각이라 가든파티는 무산되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이규는 종이컵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모니터에 노란 쪽지가 붙어 있다. 이규는 물 묻은 손으로 모니터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사장실로 오세요, 즉시’ 가지런하고 큼직큼직한 글씨였다. 시계는 1시 45분을 가리켰다. 옆자리에서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태 어딨다 왔어?”
김이 머리를 들이밀자 숯불 냄새가 났다. 점심시간 직전에 김은 황과 이규에게 신장개업한 숯불 냉면 집에 가자고 했다. 전단지를 가져가면 소주 한 병이 공짜였다. 이규는 볼 일이 있다며 사무실에 혼자 남았더랬다.
옥상에 있었다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김의 목덜미는 칠면조처럼 빨갰다.
“사장 비선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왔는데.”
김은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벌레가 들끓어. 아무래도 약을 쳐야 하나 봐.”
이규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종이컵 안쪽을 보고 김은 바퀴의자를 뒤로 굴렸다. 손사래를 치며 당장 화장실에 갔다 버리라고 했다.
“대진 씨, 오이에도 벌레가 붙었을 걸요.”
이규는 내버려 두면 벌레가 삽시간에 채소들을 파먹을 거라고 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내가 지금 오이 신경 쓰게 생겼어?”
김은 이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전화 두 통이 걸려왔다고 했다.
“그 태국 모녀 팀 있잖아, 암만해도 예약 취소를 해줘야 할 것 같어. 막무가내야.”
이규는 김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김은 안경을 콧등 위로 올렸다.
“이만하더라, 대진 씨 오이, 근데 다들 굽은 게 지지대를 세워줘야겠어요.”
김은 귀 뒤를 긁어댔다.
“황효민 씨랑 얘기 좀 해 봐.”
“왜요?”
“…….”
이규의 책상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사장 비서였다.
복도로 나선 이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변기 옆에 앉았다. 종이컵을 거꾸로 들어 털어내자 벌레들이 변기로 떨어졌다. 끝끝내 한 마리는 남았다. 종이컵 뒤쪽을 손으로 쳐도 벌레는 떨어지지 않았다. 옆 칸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이규는 변기 커버에 대고 종이컵을 두드려댔다. 벌레는 종이컵 벽에 붙어 꾸물거렸다. 이규는 손가락으로 벌레를 종이컵 벽에서 뜯어냈다.
“그럼 그렇게 해!”
이규가 변기 레버를 눌렀다. 옆 칸에서 들리던 황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물이 회오리치며 벌레들을 빨아들였다. 구멍에 맑은 물이 차올랐다. 이규는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렸다.
문을 나서던 이규는 황과 마주쳤다.
“냉면 먹었다면서요.”
황은 대답 없이 소변기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정면을 응시한 채 황은 이규에게 물었다.
“보고선 잘 돼가요? 이 달 말까진 내야 되는데.”
이규는 벽에 붙은 타일만 보았다. 금이 간 타일을 보며 이규는 변기에 바짝 몸을 붙였다. 오줌 줄기가 변기 벽에 부딪쳤다. 이규는 궁둥이를 뒤로 뺐다. 다이빙대에 선 수영선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이 말했다.
“그래, 신촌에선 갈만한 델 찾았어요?”
이규는 정글도시 프로그램의 강서지역 담당자였다. 이규가 갈 만한 데는 모텔 밖에 없다고 하자 황의 입가가 실밥을 잡아당긴 듯 실룩거렸다.
“모텔? 여행코스에 러브호텔을 넣자고요? 이규씬 정글도시가 기생 관광코슨 줄 아나본데.”
이규는 지퍼를 올렸다. 황의 오줌줄기도 끊어졌다.
“정글도시 나, 혼자서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점심시간 내내 황은 김을 상대로, 이규를 흉봤다. 냉면에 딸려 나온 고기는 퍽퍽했다. 입사 동기라고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이규는 뭘 물어도 코대답만 한다. 김은 입안에 든 고기를 씹어 넘기고, 황에게 애인 얼굴은 언제 보여줄 거냐고 물었다. 황은 술자리에서 절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전력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예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애인은 비공갭니다. 애인이랑 잘 안 되냐고 김이 묻자 황은 이 달 말까지 정글도시 최종시안을 제출해야 하는데, 공동 책임자인 이규가 나 몰라라 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밥도 혼자 먹잖아. 김은 이규가 잠자코 있지만 무슨 고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주가 폭락 때문일까. 펀드에 올인 했나? 카드 빚을 졌을까. 돈을 빌려달라면 어쩌지? 내 코가 석자야. 김은 젓가락으로 냉면그릇을 휘저으며 입사 삼 년차인 회사원에겐 지금이 고비라고 말했다. 황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지만 삼년차래? 김은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이규가 이번 가을 인사이동 때 불이익을 당할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황은 애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난, 사장님이랑 된장찌개. 지울지, 낳을지 아직 반반^^*’
애인의 답 문자를 본 황은 핸드폰을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애인은 황이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이십 평 대 아파트가 마련되지 않는 한, 아일 낳기 겁난다고 말했다. 어미 소도 외양간 지붕 아래서 새끼를 낳는다. 충분한 준비 없이 아이를 낳는 건 자식에게 죄악이자 그들에겐 재앙이라고 자분자분 말했다. 주택 부금을 두 달 치 납입한 황은 애인의 납작한 아랫배를 떠올리며 지퍼를 올렸다.
“저기, 황효민 씨 제가 이따 종로 오가에 가려는데,”
“거긴 왜요?”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황이 고개를 들었다.
“약 좀 사게요.”
이규는 수도레버를 돌렸다.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이규는 황의 토마토에 곰팡이가 폈다고 말했다. 줄기에 잿빛 푸른곰팡이가 피고 열매는 돌멩이처럼 딱딱하다는 것이다. 약을 치지 않으면 텃밭의 채소가 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 달 말까진데, 이규씬 야근 안 해요?”
황은 비누를 집어 들었다. 그는 이번 여름 내내 휴가를 반납하고 종로거리를 헤매 다녔다. 에어컨 실외기가 뿜어내는 열기를 몸소 느꼈고 아이스커피 값은 출장비로 제외된다는 것도 알았다. 엊그제 사장은 황이 작성한 초안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쟝글 도신 서울의 오질 개발하는 거야, 골백 번도 더 얘기했잖나. 이 사람아. 박물관이나 전시실, 맛 집. 이거 뻔할 뻔자야. 우려먹을 생각 말고,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그 큰 머린, 이발소에서나 쓰려고?” “서울에 오지를 찾으라니, 참 네…….”
황은 물로 손에 쥔 비누를 닦아댔다. 기우제라도 지내야겠네란 이규의 말을 듣고 황은 거울을 봤다.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이규의 뒷모습이 보였다.
화장실을 나선 이규는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바닥에 깔린 카펫이 발자국 소리를 빨아들였다. 사장실 앞에 멈춰 선 이규는 유리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전화를 받은 비서의 모습이 어룽 비쳤다. 이규는 손에 묻은 물을 바지에 문지르고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앞코에 흙 얼룩이 묻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이규는 얼룩을 지웠다. 손잡이를 밀자 유리문짝에 돋을새김 된 용의 몸통이 갈라졌다.
비서는 엉거주춤 일어서다 다시 앉았다. 입술이 빨갰다. 점심을 먹고 립스틱을 고쳐 바른 모양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비서는 사장님은 통화 중이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규는 가족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사장실 안쪽에서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규는 손바닥을 비비며 탁자에 놓인 신문을 펼쳤다. 핸드폰 진동음이 들리자 이규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저편에 앉아있던 비서가 핸드폰을 받았다. 이규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서는 전화를 건 상대에게 조근 조근 말을 건넸다.
“화내지 마, 화낼 일이 아니잖아.”
비서가 이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규는 잠자코 영화배우의 결혼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사진 속의 액션배우는 트롯 가수 출신인 신부를 업고 브이 자를 그렸다. 친한 사이였다고 둘러댔는데 역시 그런 사이였다.
“자기야, 화내서 될 일이면 나도 화내. 정말 몰라?”
비서는 핸드폰에다 대고 속살거렸다. 황과 비서가 애인 사이인 걸 사무실 직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규는 비서와 황이 한데 누운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규는 가끔 황을 끌어내고 비서의 옆자리에 누워보기도 했다.
작년만 해도 비서는 촌티가 물씬 나는 시골 처녀였다. 언제나 흰 목양말을 신고 다녔다. 입사 석 달 만에 그녀는 카탈로그에서 빠져나온 도시여자로 탈바꿈했다. 핸드폰 통화를 하는 비서의 목에는 초록색 스카프가 휘감겨 있다. 검은 물방울이 찍힌 스카프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매고 다닌 것이었다. 이규는 스카프를 목 뒤로 넘기는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핸드폰 송신 부를 손바닥으로 막고 미소를 지었다.
“어, 왔어. 왔으면 들어와.”
사장실 문이 벌컥 열리자 이규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홍 양아, 여기 커피 두 잔. 어, 자넨 거기 앉어.”
사장실로 들어간 이규가 버펄로 가죽소파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헝가리 무곡이 들렸다. 사장은 책상으로 가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어, 박 대표야.”
사장은 책상 뒤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이규는 사장의 걷어붙인 팔뚝에 새겨진 용 문신을 힐끔거렸다. 그의 자서전 『드래곤, 열정으로 승부하라』를 숙독한 사원들은 용 문신에 얽힌 일화를 알고 있다. 소싯적에 사장은 창고 뒷방에서 용 문신을 새겼다. 바늘이 땀땀이 살갗을 뜨는 동안 사장은 나무젓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김은 살아남으려고 문신까지 해야만 했던 사장의 지난한 삶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는 독후감을 써서 냈다. 황은 관광산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 사장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앙코르와트 출장을 갔던 이규는 제출기한에 맞추려고 독후감을 팩스로 보냈다. 반드시 육필 원고를 내야만 했다. 김은 회식자리에서 이규의 독후감을 들먹이곤 했다.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니, 그야말로 옛날 옛적 고리짝 얘기다. 황은 회사가 화장장이냐 뼛가룰 묻게, 라고 말하며 폭탄주를 내밀었다.
“나도 죽을 맛이야. …의리, 어?… 하지만 입장차란 게 있잖나. 나야 입찰가에 맞춰서.”
사장이 앓는 소리를 하자 이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빌딩은 전면에 유리를 붙였다. 햇살이 검은 유리창 귀퉁이마다 일렬로 맺혔다. 이번 주에도 비가 안 오면 채소들은 꼼짝없이 말라죽는다. 분사거리가 50미터인 스프링쿨러를 설치하면 채소의 생존율은 한결 높아질 것이다.
“허어, 누가 나만 살재.”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깡충 올라간 치마 자락 아래로 하얀 무릎이 보였다. 비서가 이규의 맞은편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장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개눔 새끼가 네 목 조르면, 난 뭐, 날 잡아잡슈 모가질 내줄 줄 아냐? 내 모가지가 오리 모가지야!”
사장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탕 내리치자 ‘대표이사 호명룡’ 명패가 들썩거렸다.
“사장님, 커피 가져 왔습니다.”
사장은 이규와 비서를 번갈아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비서는 책상으로 가서 명패를 바로 잡았고, 사장은 이규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 앉아있던 사장이 눈을 뜨자 이규는 가랑이 사이에 끼웠던 손을 빼냈다.
“어, 자네도 식기 전에 들게.”
이규가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자, 커피 잔이 달싹거렸다.
“자네 집 농사짓나?”
“아닙니다, 사장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사장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자네 호박, 잘 익었대.”
사장은 이규의 호박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원들은 채소를 거덜냈는데 오직 이규만은 호박을 튼실하게 길러냈다.
“농사는 말이야, 성실한 사람이 짓지. 성실해야 농사꾼이고. 농사꾼은 성실하지 않나? ……자네 호박말이야.”
이규는 커피잔을 잔 받침에 내려놓았다.
“어어, 좋아. 좋지.”
사장은 쟁반을 안고 돌아서는 비서에게 물었다.
“이 친군 천상 농사꾼이야. 농사꾼은 다 믿음직스럽지 않나?”
비서는 스카프를 뒤로 넘겼다.
“사장님, 십분 뒤에 삼성동으로 출발하셔야 됩니다.”
비서가 사라지자 사장은 소매를 접어 내리며 호박잎을 한 주먹씩 따서 삶아 밥을 싸먹던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와 홍역에 시달릴 때 한 술씩 떠먹여 주셨던 호박죽 이야기를 했다. 호박은 버릴 데가 없어. 줄기도 무쳐 먹지 않나.
“어, 그래 바람 좀 쐬고 올 텐가?”
사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규는 정자세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거기서 젓갈축제가 한참인데, 알고 있나?”
사장은 요즘 해외여행 모객이 시원치 않으니 국내 여행 코스를 적극 개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니까 젓갈축제도 다녀오라고.”
사장은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사 직원답게 손님은 몇 명이나 왔는지,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수익성은 있는지, 교통편은 어떤지, 단풍관광과 연계시킬 산이 있는지도 조사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군청 홈페이지나 팸플릿에 나온 정보는 부풀려진 것들이니 무시하고, 군청 홍보 담당관도 만나지 말고,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사진과 함께 제출하라고 덧붙였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주차장에 차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장은 비서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일렀다. 탁자에 바짝 다가가 앉더니 이규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규는 등을 꼿꼿이 세웠다.
“뭣 보담 말이야. 꼴뚜기젓 좀 사다주게. 우리 노친네가 꼴뚜기젖이라면 환장하거든.”
이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무거우면 꼴뚜기젖은 택배로 보내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사장의 노모가 치매에 걸린 걸 사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장과 같은 동네에 사는 오 팀장이 소문의 근원지였다. 오 팀장은 아랫도리를 벗고 품에 베개를 안고 전력 질주하는 노파를 목격하기도 했다. 담요를 펄럭거리며 뒤를 쫓는 사장을 봤단다. 오 팀장도 줄넘기를 들고 뒤따랐다. 오 팀장의 열 살배기 아들도 뒤를 쫓았다. 불이야! 불이야! 노파는 소리치며 달렸다. 놀란 입주민들이 달려 나왔다. 노파는 경비원을 뿌리쳤다. 사장은 펄펄 뛰는 노파의 몸에 담요를 뒤집어씌우곤 끌고 갔다. 오 팀장의 아들은 아빠에게 속삭였다.
아빠, 저 할머니, 미쳤나봐.
얌마, 아빠 사장님 엄마야.
오 팀장은 만취한 사장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화장실을 찾다가 문간방 문을 열었다. 사장의 노모는 이불홑청을 벗기고 솜을 뜯어 먹고 있었다. 허리에 매어둔 등산 로프는 옷장 손잡이에 묶여 있었다. 아랫도리를 벗은 노파는 솜뭉텅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사장은 노모의 아랫도리를 이불로 덮었다. 오 팀장은 베테랑 영업사원답게 넉살좋게 웃었다.
세상에 곱게 미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서전을 읽었기에 사원들은 노모가 사장을 기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았다. 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며 아들 넷을 길렀다. 사장은 맏형을 시장에서 일어난 화재로 잃었다.
김은 회의실로 들어서는 이규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냐? …… 사장이 또 뭐래?”
콘도 예약권을 들여다보며 김은 휴갈 가는 거냐고 물었다.
“휴가가 아니라, 출장인데요.”
김은 회의실로 들어온 황에게 이규가 이박삼일동안 바닷가로 출장을 간다고 말했다. 사장이 특별히 콘도까지 예약해뒀단다.
“이박삼일? 난 딱 세 시간만 눈 좀 붙여봤음 좋겠어요.”
이규는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젓갈 심부름을 간다고 말했다. 사장의 노모가 꼴뚜기젖을 먹고 싶대서 자기도 바쁜 시간을 쪼개 할 수 없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데 왜 하필이면 남이규 씹니까?”
황은 물끄러미 이규를 바라보았다. 이규는 머뭇거리다 호박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호박이 휴갈 보내준단 겁니까?”
황은 들여다보고 있던 파일을 덮었다. 그러니까 사장이 텃밭을 살펴보고 있었다는 거지. 그걸 사원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았단 말이지.
“남이규 씬 알았어?”
김이 팔꿈치로 이규의 어깨를 건드렸다.
“호박씨 까는 거 아니야.”
황은 이규에게 물었다.
“그건 절대 아니고요. 심부름이야 아무한테나 시키는 거고. 호박이야 구실”
황이 이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럼, 사장이 날 쪼아대는 건 토마토 때문이란 겁니까.”
콘도 행 셔틀버스는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너구리 동상 앞에서 출발했다. 이규와 전지훈련을 떠나는 동파 중학교 축구팀이 함께 탔다. 버스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운전사에게 텔레비전을 틀어달라고 요구하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사방에서 잡담을 해댔다. 옆자리에서 핸드폰 문자판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규는 이어폰을 끼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들판이 느른하게 흘러갔다.
“비 온다!”
이규는 눈을 떴다. 창에 빗물이 흘렀다. 옆 차선의 차들은 빗물을 튕기며 달렸다. 축구단 아이들은 개구리들처럼 투덜거렸다.
“이년아, 우린 어떻게 되는 게 하나도 없냐.”
“맞아. 소풍만 가면 비냐.”
코치가 일어섰다. 깍두기 머리에 깡마른 사내였다. 그는 들고 있던 스포츠 신문 뭉치로 의자를 내리쳤다.
“누가 소풍이래? 어떤 새끼야.”
라디오 주파수를 돌린 것처럼 소음은 빗소리와 자리를 바꿨다. 코치는 금관 배 전국 중학생 축구대회에서의 부진한 성적과 선수들의 해이한 정신 상태에 대해 일갈했다. 6대 0으로 대파당한 놈들이 입만 살았다. 팀워크를 다지고 심신을 단련시키고자 특별히 마련한 합숙훈련이다, 여러분 모두가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코치는 주차장에서 숙소까지 오리걸음으로 걸어갈 것을 결정했다. 버스 안은 잠잠해졌다.
창에 빗발이 사선을 그었다. 옥상의 텃밭은 오래간만에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을 것이다. 흙먼지는 가라앉고 호박 뿌리는 물을 빨아들여 잎사귀는 빳빳하게 펴진다. 이규는 호박잎을 튕기는 빗방울을 떠올렸다. 그 잎사귀 아래서 호박은 무럭무럭 익어갈 것이다.
셔틀버스는 3시간 40분 만에 콘도 입구에 멈췄다. 운전사가 어깨를 흔들자 이규는 눈을 떴다.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선 이규는 오리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가는 중학생들을 보았다. 비에 젖은 머리통이 올망졸망했다. 뒤에 따라붙은 감독의 어깨에는 은박지 돗자리가 반짝거렸다.
방에다 짐을 풀고 이규는 지하 아케이드로 내려갔다. 콘도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규는 생수 한 병을 사서 편의점을 나섰다. 뚜껑을 따고 물을 들이키며 지하 통로를 걸었다. 이규는 오락실 앞에 있는 ‘두더지 잡기’ 앞에 멈춰 섰다. 이규는 생수 병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이규는 줄에 묶인 망치를 쥐고 동전을 넣었다. 동전을 먹은 기계는 두더지를 토해냈다. 앞가슴에 두 발을 모은, 눈이 까만 두더지들이 번갈아 튀어나왔다. 이규는 망치로 정수리가 벗겨진 두더지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두더지들은 왜 때려, 아야. 아야, 기계음을 내뱉었다. 점수는 점점 올라갔다. 오르락내리락 하던 두더지들이 구멍 속으로 한꺼번에 사라졌다. 이규는 숨을 헐떡거렸다. 누군가 이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에 허연 벙어리장갑이 얹혀 있었다. 이규는 망치를 들고 뒤돌아섰다.
등 뒤에 선 건 오징어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오징어는 품에 안고 있던 전단지를 다짜고짜 내밀었다.
전통의 맛! 고향의 풍미! 젓갈축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징어는 촉수로 ‘젓갈 체험!’과 ‘젓갈 아가씨 선발대회’를 가리켰다. 몸통에 ‘싱싱한 젓갈을 원가에 모십니다.’ 띠를 두른 오징어가 다가왔다. 두 오징어는 나란히 서서 촉수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이규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그들 곁을 빠져나갔다.
양편으로 불을 밝힌 상점들을 지나쳐가는데, 오징어 둘이 이규를 앞질러갔다. 몸통 아래 달린 헝겊 발들이 출렁거렸다. 그들은 기념품 가게 앞의 등산복 차림의 여자들에게 달라붙었다. 오징어들은 집요하다. 이규의 사장이 보았다면, 저런 게 바로 근성이라고 칭찬했을 것이다. 젖은 가랑잎처럼 고객에게 달라붙어야 한다. 그것이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덕목이다. 이규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을 때 오징어들이 다시 나타났다. 등산복을 입은 여자들과 함께였다. 이규는 엘리베이터 층수가 줄어드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오징어가 바짝 이규에게 다가섰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차 출발하는데, 같이 가시죠. 버스 타시면 축제장소까지 바로 모셔다드립니다.”
10분 뒤에 이규는 콘도 입구에 세워진 마이크로버스에 올라탔다. 옆구리에 젓갈 광고판을 붙인 버스였다. 버스 안에서는 고리삭은 냄새가 났다. 등산복을 입은 여자들이 알은체를 했다. 이규는 의자 위쪽을 붙잡아가며 맨 뒷자리로 향했다.
커튼을 젖히니 창밖으로 오징어들이 내다 보였다. 둘은 마주 서 있었는데, 몸통을 숙인 오징어가 맞은편 오징어의 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둘이 치받고 싸우는 것 같았다. 이규는 차창에 얼굴을 댔다. 서 있던 오징어가 촉수를 뻗어 수그린 오징어의 머리통을 잡아당겼다. 무릎께에서 발들이 흔들거렸다. 띠를 두른 오징어의 머리통이 뽑혀 나왔다. 머리가 부스스한 오십 줄 남자의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그는 뽑혀 나온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더니, 맞은편 오징어의 삼각뿔을 쥐었다. 머리통이 금세 벗겨졌다. 앞머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한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둘은 겨드랑이에 삼각뿔 머리통을 끼고 나란히 섰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았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보라색 머리 오징어가 등을 돌리자 나이든 오징어가 지퍼를 내려주었다. 젊은 오징어는 한쪽 팔을 끄집어내 허리춤까지 의상을 내리고 손을 쑤셔 넣더니 담배를 꺼냈다. 젊은 오징어는 담배에 불을 붙이자, 나이든 오징어는 입을 벌렸다. 불이 붙은 담배가 그의 입에 물려졌다. 콘도 입구에 나란히 서서 둘은 담배를 피웠다. 차양에서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젊은 오징어는 나이든 오징어의 입에서 담배를 뽑아내 재를 털어주었다. 차가 출발했다. 마이크로버스가 커브를 틀자, 오징어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박 삼일의 출장을 마치고, 이규는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사장실부터 들렸다. 비서의 입술은 여전히 빨갰다. 그녀는 사장님은 안 계시니, 꼴뚜기젓갈은 탁자에 놓고 가라고 했다. “어, 왔어?”
이규는 김의 책상에 오징어젓갈통을 올려놓았다. 출장 간 김에 사왔다는 말에 김은 기지개를 켰다. 이규는 비닐봉지에서 든 나머지 젓갈통을 꺼내 황의 자리로 갔다. 황은 보이지 않고 빈 의자만 덩그마니 놓여 있다. 황의 옆자리인 오 팀장의 책상에는 이면지들이 쌓여 있었다. 이규는 김에게 황이 외근 나갔냐고 물었다.
“그만 뒀어. 너 휴가 가고 바로 다음 날에.”
이규가 퇴직사유를 묻자 김은 귀를 긁적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과 김은 종로 5가에서 토마토 모종과 오이모종을 사왔다. 출근하자마자 옥상에 올라갔다. 김은 우산을 씌워주고 황이 오이와 토마토를 뽑아냈다. 토마토 줄기를 잡아당기던 황이 사장을 발견했다. 사장은 김과 황을 세워놓고 언성을 높였다. 얄팍한 눈속임 부릴 생각 말아라. 근무시간에 무슨 짓들이냐. 사장은 황이 쥐고 있던 토마토를 가리키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기르는 놈이 뭔 제대로 하겠냐고 물었다. 황은 사장을 보고, 하늘을 보더니 토마토를 패대기쳤다. 사장이 황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황은 이깟 토마토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도 되냐고 중얼거렸다. 사장이 황의 멱살을 잡고는 텃밭으로 밀쳤다. 황은 사장의 바지가랑이를 잡았다. 사장은 황의 가슴팍으로 넘어졌다. 보다 못한 김은 우산을 버리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진흙탕에 엉덩방아만 찧었다. 황이 삽을 쥐었다. 김이 소리치고 사장은 물러섰다. 미쳤어! 황은 텃밭에 삽을 휘둘렀다. 채소들이 휘청거렸다. 김은 사장을 옥상 밖으로 내보냈다. 폭이 좁은 계단을 급히 내려가다 사장은 발목을 삐었다. 비서가 두 사람을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래서요?”
“전화도 안 받아. 사장은 펄펄 뛰며 기물 파손 죄, 폭행죄로 고소할 거래.”
이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철문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패찰이 붙어 있다. 철문을 열자 폭이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이규는 사다리처럼 가파른 계단을 손을 짚고 기어 올라갔다. 마른 흙덩이가 손바닥에 짚였다. 페인트가 벗겨진 쪽문 앞에서 이규는 몸을 일으켰다. 문은 덜커덩거리며 밀려들어갔다.
비개인 하늘은 맑았다. 물에 젖은 시멘트 바닥은 잿빛이었다. 이규는 노란 빗물받이 급수조를 지나 텃밭으로 갔다. 쓰러진 테이블과 넘어진 의자를 지나쳐갔다. 발밑으로 작은 덩어리가 밟혔다. 썩은 토마토는 옥상 구석으로 굴러갔다.
이규는 텃밭 앞에 섰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듯, 채소들은 넘어지고 줄기들은 꺾였다. ‘남이규’ 팻말은 기울어졌다. 이규는 쭈그리고 앉아 호박잎사귀를 들췄다. 잎 그늘 아래 손을 밀어 넣었다. 매끈거리는 것이 잡혔다. 호박잎이 빗물을 튕겼고 손등이 젖었다. 이규는 줄기에서 호박을 비틀어 따냈다. 한 뼘 가량 되는 어린 호박이었다. 끄트머리에 말라붙은 꽃을 따내고 흙을 닦아내자 호박은 연둣빛으로 반짝거렸다. 호박밭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규는 곁에 선 김을 올려다보았다.
“이규 씨, 호박은 그냥 사서 먹어.”
김은 이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규는 앉은 채로 텃밭을 둘러보았다. 땅은 파헤쳐지고 채소들은 뽑혀 여기저기 널부러졌다. 무거운 바윗돌을 채소밭에 대고 굴려댄 것 같았다. 이규는 들고 있던 호박을 반으로 분질렀다. 비린내가 났다. 하얀 속살에 오종종 박힌 씨앗은 투명했다. 익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술이나 한 잔 하러 갈래요?” 이규는 손에 든 호박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두 달 뒤, 텃밭이 있던 자리에 폐허가 들어섰다.
김나정 /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06년 『문학동네』에 평론이 당선되었고, 첫소설집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