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국 선포 전야인 1949년 가을, 상하이 지하당원들과 함께한 판한넨(앞줄 오른쪽 셋째)
1955년 4월 3일 밤, 베이징반점에서 체포된 판한넨(潘漢年·반한년)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판한넨과 함께 전국대표자대회(全人代)에 참석했던 상하이 대표단은 동요했다. 제 2서기가 단원들을 진정시켰다. 효과가 없자 시장 천이(陳毅·진의)가 직접 나섰다. “판한넨은 체포됐다. 판한넨 동지는 오랜 기간 우리의 혁명사업에 동참했지만, 12년 전 일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다. 염려할 수준은 아니다.”
수감 1년 후 정치국 회의서 언급
판한넨 자신의 잘못 인정했지만
재판관은 당 위원회에 무죄 의견
전인대 대표는 헌법에 신분이 보장된 자리였다. 전체 회의나 상임위원회의 표결을 거치지 않으면 체포가 불가능했다. 4월 7일 열린 전체회의는 판한넨의 체포를 비준했다. 체포된 지 4일이 지나서였다.
전인대의 의결사항은 극비였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상하이 제1서기가 회의를 소집했다. “도착 후 판한넨에 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출국했다고 말해라. 그 사람들도 귀가 있으니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른다. 다른 말은 절대 하지 마라. 판한넨의 경호원들이 문제다. 궁금증 유발할 엉뚱한 소리 할지 모른다. 발표 있을 때까지 격리 수용해라. 우리는 비밀이 많다 보니 억측도 무성한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입조심해야 한다.”
3개월 하고도 2주가 더 지난 7월 17일, 중앙TV가 전인대 부위원장 펑전(彭眞·팽진)의 보고 내용이라며 판한넨의 소식을 방영했다. “판한넨의 반혁명 행위에 관한 증거를 발견했다.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최고 인민 검찰원이 내간(內奸·내부에 잠복한 적의 첩자) 혐의로 청구한 체포 청구를 비준했다.”
반응이 엄청났다. 전쟁시절, 판한넨이 이끌던 상하이의 지하 공작자 출신들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판한넨이 상하이와 홍콩을 비운 동안, 우리 조직원과 당원들은 한 사람도 적에게 노출된 적이 없었다. 수십 년간 당과 혁명을 위해 사지(死地)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내간이라니, 지하 조직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함부로 놀려대는 말을 믿으란 말이냐.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냐.”
1950년 10월, 상하이 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에 선임된 천이(가운데)와 상임부시장 판한넨(오른쪽). 왼쪽은 부시장 성비화(盛丕華). [사진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판한넨을 체포한 공안부장 뤄루칭(羅瑞卿·나서경)은 공더린(功德林) 감옥으로 직행했다. 입감 절차도 직접 밟았다. 감옥 책임자가 구술을 남겼다. “공더린 감옥은 공안부 직속이었다. 국민당 전범과 거물들이 수용된 특별 감옥이었다. 공안부장이 직접 범인을 데리고 온 경우는 판한넨이 처음이었다. 부장은 판한넨을 예우하라고 지시했다. 관리처는 양탄자와 소파, 난방시설이 구비된 방을 배정했다. 감옥만 아니라면 중급 정도 호텔방 수준이었다. 판한넨은 걸친 옷 외에는 휴대품이 한 점도 없는 죄수였다. 곤란한 점이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 대꾸가 없었다. 몇 주가 지나자 공안부 부부장이 품위 있는 중년부인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둥후이(董慧·동혜), 판한넨의 부인이었다.”
판한넨은 5년간 공더린 감옥에서 조사를 받았다. 무슨 질문을 받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문관이 바뀌어도 대답은 한결 같았다. 수감 생활 1년 후, 마오쩌둥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판한넨을 언급했다. “죽을 죄를 지었어도 판한넨 같은 사람은 죽일 필요가 없다. 포로가 된 전 국민당 장군들이나 선통황제 푸이(溥儀·부의)도 죽이지 말아야 한다.” 이유도 설명했다. “죽을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이익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판한넨에 관한 설명은 구체적이었다. “판한넨은 상하이 부시장이었다. 국민당에 투항한 과거가 있다.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陳立夫·진립부)형제의 지시에 의해 움직인 CC파 일원이었다. 현재 감옥에 있다. 일벌 백계가 될 수 있다면 죽여 버리겠지만, 그렇게 하면, 죽여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그것도 고역이다.”
마오쩌둥의 발언이 소문을 탔다. 유명 산문가의 분노가 주목을 받았다. 이름은 생략한다. “청천벽력이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판한넨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당장 총살시켜도 뭐랄 사람이 없다.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 거라는 소식도 들린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 법이 없는 나라다. 반혁명 분자는 무조건 총살시켜야 한다. 우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은 나라의 국민이다. 확실한 것이 있다. 판한넨이 내간이라면, 친구인 나도 내간이고 반혁명분자다.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아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무슨 일이건,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밖에 없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친청(秦城)감옥으로 이감된 판한넨은 재판을 기다렸다. 검찰의 기소장도 보지 못한 재판관들은 주말을 제외하곤 몇 달간 감옥에 머무르며 관련 자료를 열람했다. 판한넨도 직접 만났다.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판한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재판관이 보기에 판한넨은 죄가 없었다. 최고 인민법원 당 위원회에 의견을 제시했다.
최고 인민법원 당 위원회는 재판관들의 의견을 무시할 방법이 없었다. 법원장과의 면담을 주선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