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다방은
안동의 젊은 숫처녀 숫총각들
은밀히 모이는 곳이었다.
안동시외버스정류장 - 우측입구 3층에 있었다.
당시의 학다방 - 희망곡 신청 감상 중
1970년대 그시절,,,
안동에는 10여개 정도의 음악다방이 있었다.
특히
안동터미널 옆의
학다방은
아침부터 12시통금시간직전까지 젊은이들로 꽉 찼다.
안동지역의
안동교육대학생,
상지전문대학생,
간호전문대학생,
외지에서 온 처녀 총각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루었다.
뽀얀 담배 연기로 가득찬 다방은 20∼30대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희망곡 신청은 주로 아래와 같은 7080가수들 노래다
어니언스, 둘다섯, 김정호, 양희은, 송창식, 김세환, 서유석,
은희, 이장희, 윤형주, 사월과오월,
이연실, 나훈아, 정훈희, 등
그들은 유리창 속의 ‘DJ’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감미로운 음악에 취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고막이 터질듯한 보컬그룹의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리드 싱어가된 듯 노래를 따라부르며 몸 장단을 맞춘다.
지난 60∼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각 도심과 변두리 지역에 넓게 자리했던 ‘음악다방’속의 한 풍경이다.
차 한잔 값이 200원 정도 하던 시절,음악다방은
마땅히 갈곳 없고 호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던
안동 고향의 사회 초년생들이나 대학생,젊은 직장인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요즘같이 매서운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라면 사랑하는 연인과 따뜻한 커피를마시며 평소 좋아하던 팝송을
맘껏 들을 수 있는 음악다방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음악다방의 얼굴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박스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지고 경외스러웠던지.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화려해 보이는 DJ를 꿈꾸기도 했다.
장발이 유행하던 시절,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넣고 다니며 거울 앞에서 뽐내며 머리를 빗는
DJ의 모습 또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고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들에겐 DJ가요즘 청소년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god’에 버금가는 ‘동네 우상’이었다.
통키타 가수 양희은
그들은 뮤직박스 주위에 앉아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종일 친구와 노닥거리며 음악을 들었다.
한번에 5∼6개의 팝송과가요를 신청하는 욕심쟁이 단골손님도 많았다.어쩌다 잘 생긴 DJ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기가 일쑤였다.
그 시절,‘약속다방’은 왜 그리도 많던지.
그 약속다방에선 또 얼마나 많은 약속들과 기다림,헤어짐이 있었을까.
그때가 그립지만 요즘 추억의 음악다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안동의 음악다방은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절 안동 고향에서도 음악다방의 열기는 대단했다.
대구나 서울로 유학간 친구들은 안동에 오면
최고의 대중 음악 다방 문화를 선도했다.
음악다방과 당구장 탁구장도 인기를 누렸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통기타 하나만 가지고 1인 밴드가 가능하고
메시지를 음미하기에 적당한 포크는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한 인기를 얻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도 이때 열렸다.
그러나,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한 포크는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그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수많은 금지곡을 양산해냈고,
당시 민중가요의 정점에 있던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대중적 통기타 포크는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의 이른 바 '포크송'으로 방향을 틀었고,
낭만과 자연을 노래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양희은, 정태춘 등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이 시기의 저항적 포크의 맥은 주로 '메아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전신)등 대학노래패처럼 언더에서
살아남아 피와 분노의 역사를 기록하는 매체가 되었다.
청명하고 맑은 목소리 - 은희
구전민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민중가요...
일반적으로 저항의 노래라 하면 '락'을 말하고, 비판적인 가사라면 '랩'을 떠올리지만,
7, 80년대 굴곡 많은 현대사에서 젊은이들의 심장을 들끓게 했던 것은 바로 이 포크음악이었던 것이다.
장발족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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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본거 같기도 하고? 아리까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