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로부터 척수까지 꼬챙이가 지나가는 듯한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앰블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름이는 엉겁결에 실비아의 호출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집으로 향해 달렸다.
"헉-헉" 대며 방안으로 들어와 거울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바닥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다.
이 때 거울 속에서 검은 물체가 보이질 않는가!!!
그녀는 너무 놀라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옷걸이에 걸쳐 있는 그녀의 외투였다.
그녀는 "휴-우"하고 한숨을 쉰 후, 찬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후
머리 속을 정리해 보았다.
[신쥬쿠니쵸우메코우엔]
일어 같은데 도대체 무슨 뜻일까?
실비아의 영혼이 호출기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980국의 613_.
다음 숫자는 무엇이었을까?
실비아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아름이는 실비아의 사고 이후 시간과 공간의 개념조차 잃은 듯 둥둥 떠다녔다.
함께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삶을 늘 같이 공유해 왔던 대상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알게된 지 4년이 되었다. 다른 회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둘간이 우정은 남달랐다. 의대생과 간호대생으로서의 미묘한 갈등도
그들의 우정을 넘볼 수가 없었다.
땅 밑에서 허우적거리듯 지낸 지 이틀이 지났다.
실비아는 다행이 목숨을 건졌으나 흉측한 모습으로 병원에 있었고,
아름이는 그 충격으로 인해 이틀동안 강의에 참석을 못하였다.
너무 기괴한 사건이라 매스컴에선 연일 실비아의 흉물스런 모습을
TV화면에 내보냈다.
"여학생 기숙사에서 한 여대생이 손, 발, 혀가 잘린 채 발견됨."
"손과 발과 혀는 없어짐."
"피해자의 의사 소통 불능으로 원인 파악 불가능" 이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내일은 조직학 땡시험이 있는 날이다.
혈액 내 세포들과 신경 조직들의 구조물들을 현미경으로 보며 명칭을
알아 맞혀야 한다.
아름이는 시험 공부를 하느라 새벽녘이 되서야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여느때처럼 E-메인을 확인하였고 한얼이로부터
음악파일이 첨부된 메일이 와있었다. 괜찮은 음악이니 학교가는
길에 들어보라는 내용이었다.
음악을 다운받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하니 8시 30분.
9시부터 땡시험.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집의 수유역에서 학교의 혜화역까지 약 30분이 소요된다.
아름이는 급하게 집을 뛰쳐나갔다.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실비아에 대한 상념으로 계속
복잡하기만 하였다.
MP맨을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한얼이가 보내준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잠시라도 단절되고자 하였다.
음악 소리를 들으며 멍하던 머리는 겨우 세상과 격리될 수 있었다.
수유역의 플랫홈에서 약간을 기다리니 전동차가 도착했다.
무거운 몸을 싣고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이어폰 음악 사이로 "여기는
혜화역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막 닫히려는 문을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그런데 앞을 바라보니 벽면에는 수유역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노선은 분명 순환선이 아닌데......"
아름이는 경악한 채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 했다.
"분명 수유역에서 타서 혜화역에서 내렸는데 다시 수유역이라니?
어떻게 이러한 공간을 초월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4차원 세계라도 들어 왔단 말인가?"
누군가 망치로 때린 듯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이 때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육중한 전동차 소리가 들렸다.
순간 아름이는 플랫홈을 뒤로 한 채 철로로 뛰어내렸다.
아름이의 몸 위로 전동차는 지나갔고 아름이의 몸은 두동강이 난 채
철로 위를 뒹굴고 있었다.
파열된 내장들은 핏덩이와 뒤범벅이 된 채 철로위로 튀어져 나와 있었고
산산조각이 난 두개골 사이로 뇌조직들이 납작해 진 채로 삐져 나와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플팻홈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들며 웅성웅성 거렸다.
"젊은 여자가 자살을 하다니...... 끔찍하군."
혼 돈
한얼이가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갔을 때, 이미 아름이의 어머니가
와 계셨다.
어머니는 오열을 토하며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셨다.
구석 한쪽 편에는 아름이의 유품으로 보이는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름이의 친구 실비아가 사고를 당하여 입원하고 있는
같은 병원에서 아름이의 끔찍한 시체를 봐야하는 한얼이는 슬픔과 더불어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해부학 실습 때부터 아름이와 같은 조가 되어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된 한얼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신 어머니는 한얼이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아름이의 유품은 자네가 갖고 가게. 그리고 아름이 없더라도 자주 놀러
오게."
"알겠습니다. 어머니."라며 한얼이는 울먹거렸다.
이 때 아름이의 가방 속에서 "삐-삐-삐......"하고 소리가 났다.
한얼이는 가방을 열어 보았다.
아름이의 호출기가 울리고 있었다.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고 980624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한얼이는 밖으로 나와서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K-K-K-올-가-미"
그것은 분명 아름이의 목소리였다.
"이-이럴 수가!"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며 무릎에 힘이 쫙 빠져나감을 느꼈다.
머리는 쭈삣쭈삣 섰고 두개골 속에서 소뇌와 대뇌가 파동을 치듯이
둥둥거렸다. 마치 뇌속으로 거미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름이는 분명 살아 있어. 저것은 아름이의 시체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 아름이는 집에 있을 거야."라고 외치며, 한얼이는 아름이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 때 백미러에 아름이의 모습이 보였다.
한얼이는 얼른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환영이었다.
백미러를 보지 않고 정신없이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아름이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헉-헉"거리며 숨가쁘게 아름이의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허탈했다.
단지 책상 위에 자줏빛 호출기만 눈에 띨 뿐이었다.
그것에는 아름이와 실비아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마 실비아의
호출기인 것 같았다.
'실비아의 호출기가 왜 여기 있을까?' 라며 의아해했다.
거기에는 980613이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고,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얼이는 흠칫 놀랐다. 그는 아름이의 책상 서랍을 미친 듯이 뒤졌다.
그리고 아름이의 수첩을 찾아냈다. 그곳에는 실비아의 호출기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실비아의 비밀번호를 몰라 메시지는 들을 수 없었다.
'아름이의 호출기에 찍힌 980624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라고
생각하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980613과 980624.
980국의 613_. 980국의 624_.
두개의 비슷한 전화번호.
둘 다 끝자리가 빠져 있다.
혹시 전화번호가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980, 613, 624.......980, 613, 624......
한얼이는 반복해서 그 숫자들을 읽어 보았다. 한얼이의 눈길이
우연히 아름이의 책상위의 캘린더로 향했을 때였다.
갑자기 한얼이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휙하니 지나가는 것이 있었
다. 가만, 오늘이...
오늘이 98년 6월 13일.
그렇다면 980613이란 오늘 날짜를 가르키는 것일까?
오늘 아름이가 죽었다.
그렇다면 6월 24일에 누군가 죽는단 말인가?
실비아의 사건과 아름이의 죽음이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실비아의 호출기에 들어 있는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미 죽어버린 아름이는 어떻게 자신의 호출기에 메시지를 보냈을까?
한얼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심장의 좌심실과 우심실이 심벽을 중심으로 회전하듯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아름이는 실비아의 사고 후에 실비아의 호출기에서 무엇인가 메시지를
듣고, 그것에 찍힌 6월 13일에 자살을 했다.
나는 아름이의 죽음 후에 아름이의 호출기에서 [KKK올가미]라는 내용을
듣고 980624라는 숫자를 보았다.
그렇다면 6월 24일에 내가 자살이라도 한단 말인가?
한얼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심장 한 구석을 찌르는 공포의 바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10일 밖에 남지 않는다.
한얼이는 자기의 호출기를 냅다 던지며 발로 밟아 부서 버렸다.
마치 미쳐 가는 짐승처럼......
- 예 고 살 인-
6월 14일 아침.
한얼이는 눈을 떴다.
몸은 밤새 누워 있었지만, 머리 속은 계속 깨있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등뒤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 같았다.
오늘 첫 강의는 생화학이다.
"xeroderma pigmentosum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희귀한 피부병입니다.
이것은 pyrimidine dimer 부근에서 DNA를 가수분해하는
endonuclease의 결함으로 야기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DNA repair
process의 중요성을......"
교수님의 강의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도중에 살그머니 나와 버렸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휴게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왜 아름이는 하고많은 단어 중에 'KKK올가미'라는 단어를 남겼을까?
평소 수재라고 자부하던 한얼이지만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실비아의 호출기 내용을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비밀 번호를 알 수
없었다.
아무 숫자나 4개를 눌러 보았다.
"비밀 번호가 틀렸습니다. 비밀 번호 네자리를 눌러 주십시오."라는
기계음만 반복될 뿐이었다.
다이얼 번호 0,.......,9 까지 중 비밀 번호 4자리를 알아맞힐 확률은
중복 순열 10∏4=10⁴=10000 즉 만 분의 일이다.
한얼이는 포기했다.
그냥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6월 24일.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죽음의 날을 맞이
하였다.
수업이 끝난 후 자기도 모르게 응급실에서 인턴으로 있는 선배를 찾아
갔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일까?
교통 사고를 당한 듯한 환자가 이동 침대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 왔다.
견갑근이 찢어져 쇄골이 노출된 채로 어깨가 뒤틀려져 있었다.
안면부는 골절로 인해 출혈이 심했다.
환자는 의식을 잃은 채 늘어져 있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빨리 인튜베이션(intubation, 저자 주;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응급 환자에게
산소 공급을 위해 관을 삽입하는 처치법) 준비해!"
레지던트로 보이는 다른 의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면부의 심한 손상으로 인해 코나 입으로 관을 삽입할 수 없었다.
"이걸로 안되겠어! 트라키오스토미(tracheostomy, 저자 주;기도 확보를 위한 기관
절개술) 할 준비해! 빨리 서둘러!"
그 의사는 메스로 환자의 목 부위를 조그마하게 절개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압박 드레싱(pressure dressing, 저자 주;지혈을 위해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준비하고 헤모스태트(hemostat, 저자 주;심한 출혈 시 지혈을 위한 도구)도
가져 와!"
여러 명의 의사들은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후, 선배는 한얼이에게로 다가왔다.
한얼이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창자가 뒤엉키는 것 같았고 손가락 끝은 떨리고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니? "
겁먹은 듯한 한얼이를 보며 물었다.
"예, 갑자기 속이 메스껍네요." 창백한 얼굴로 한얼이는 대답했다.
"요즘 아름이 때문에 힘들 꺼야."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배는
말했다.
"선배님, 그래서 하는 얘긴데 바륨(Valium, 저자 주;불안을 감소시켜 주고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약)좀 놔주실 수 있겠어요?"
한얼이는 애원조로 부탁을 했다.
한참을 뜸을 들인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그래, 오늘 만이다. 너도 알다시피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안 좋아."
날카로운 주사침은 한얼이의 근육을 뚫었다.
조금 지나서 한얼이는 나른함을 느끼며 졸리기 시작했다.
"아-안-돼! 눈을 감으면 안돼........."
한얼이의 눈꺼풀은 서서히 닫혀가고 있었다.
- 시 체-
새벽녘의 고수부지는 지난밤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 짙게 낀 안개
사이사이로 술에 취해 그대로 잠이 들어 몸을 웅크린 몇몇의 무리들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간간이 세워져 있는 차 속에는 젊은 남녀가 손을 꼭 쥐고 소곤대는 듯
아니면 잠이 든 듯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고, 드넓은 잔디밭에는 간밤에
남긴 쓰레기들이 드문드문 어지럽혀져 있었다.
간이 화장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초록색의 쓰레기 트렁크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고 온갖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른 아침 고요함 속에서 그 쓰레기를 수거해 가기 위한 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미화원들의 행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막 초록색 트렁크 속의 검은색 쓰레기 봉투를
몇 개쯤 들어냈을 때였다.
우습게도 그 통 안에서 그를 쳐다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도둑고양이라고......
아니면 잘못 본거겠지라고 생각했다.
봉투를 두개 더 들어 낸 순간 그는 그 봉투를 안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사람 살려! 으아악......"
그가 본 것은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려진 눈을 번쩍 치켜 뜨고 있는 사람의
머리였다.
6월 27일 새벽의 일이었다.
- - -
오랜만의 강력 사건 발생에 모처럼 길었던 편안함이 훅하고 날아가
버렸다.
현장의 사체는 지긋지긋한 살인마와의 한판 승부를 예고했다.
쓰레기 더미 속에 푹 익혀진 채 흩어져 있는 현장 상황은 지독한 썩는
냄새에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부패되면서 형성되는 황화수소와 암모니아 가스 때문일 것이다.
벌거벗겨진 사체에게서 눈에 뛸만한 것은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몸이 좀 퉁퉁한 여자라는 사실 외에는......
눈동자와 혀는 튀어 나와져 있었고 얼굴 가죽이 없어진 상태에서
구더기들이 얼굴을 파먹으며 들끓고 있었다.
- - -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를 설명하는 백박사의 기품 있고 지적인 모습은 언제나 감탄스러웠다.
기대했던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사망 원인은 아마도 두부 외상에 의한 출혈인 것 같아요.
코와 입으로 부패액이 상당히 유출되었거든요.
이것은 보통의 경우 머리를 얻어맞아 출혈을 일으킨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죠.
그런데......, 머리를 어떤 흉기나 몽둥이 같은 것으로 얻어맞았다면
그 흔적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는 밀쳐 넘어지며 벽에
부딪쳤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군요."
백박사는 아주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죽었다는 결론입니까?"
양형사가 다짐을 받듯 백박사에게 재차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추가적인 변동 상황은 조금 더 검토를 해 봐야 할 것 같군요.
조직 검사도 필요 할 것 같고........"
"참 그리고,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후 무언가로 얼굴 껍질을 벗긴 것
같아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껍질을 벗기기란 불가능하겠죠."
백박사의 말에 수긍을 하는 듯 양형사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박사님! 피해자가 비만형이던데 그 부분에서 신원을 밝히는데
범위가 축소 될 만한 좋은 의견은 혹시 없으십니까?"
"음, 그건 양형사가 잘못 알고 있군요."
차가운 인상의 백박사가 오랜만에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언뜻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그건 전문 용어로 Gigantism(거인양 외관)이라고 하는데,
부패수포로 인해서 몸이 부푼 것에 불과해요."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안경을 벗어 흰 가운 끝으로 닦았다.
마치 알고 있는 소중한 것을 불쑥 얘기해 주기가 아깝다는 듯이......
그러나 양형사는 재촉하지 않고 학생처럼 볼펜을 꺼내 들고 교수님의
강의를 노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파리란 게 제일 흔한 곤충아니요.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그 뭐랄까, 그런 썩은 시체 같은 것이지요.
더구나 요즘처럼 습한 기후에서는 더한 법이지요.
그 놈들이 거기에다 알을 낳지요.
알을 낳고 그 알이 구더기 또 번데기를 거쳐 또다시 성충이 되는데
바로 그 성장 과정이 포인트죠.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그래 양형사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지금이 생물 수업 시간이란 말인가?
양형사는 갑작스런 백박사의 질문에 황당스러웠다.
"글쎄요, 저야 범인이나 잡을 줄 알지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어허, 범인을 잡으려면 그런 걸 알아 야죠.
그 성장 과정이야말로 살해된 시점을 알 수 있는 키죠."
양형사는 백박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요즘처럼 덥고 습한 계절에는 파리가 시체에 알을 낳고 구더기까지 되는데
대략 3일 정도 걸리지요. 시체의 얼굴에 구더기들이 있었던 것 기억하시죠?
그렇게 볼 때 6월 24일쯤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백박사는 말했다.
양형사는 감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라도 정보를 더 얻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안구와 혀는 왜 튀어져 나와 있는 겁니까?"
"아, 그건 부패 가스의 압력에 의한 것이죠.
그리고 이건 피살자의 연령 감정을 위한 턱 뼈 X-ray와 치과의사의
소견서입니다."
툭하고 던지는 피살자의 Panorama X-ray 촬영 결과 소견서가 양형사의
흥미를 자극했다.
1. Wisdom teeth (사랑니)가 맹출 되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20세 전후로
사료됨.
2. Upper right first molar에 Endodontic tx.후 Crown 장착 - Crown의
상태로 보아 10여년 전에 치료받은 것으로 보임.
3. Lower right second molar에 Inlay - 약 6-8년 전에 치료받은 것으로
보임.
4. Lower left first molar에 Implant 이식 - 1년 이내에 이식된 것으로
보임.
Implant(임플라트)라는 낯선 단어가 흥미를 끌었다.
임플란트, 즉 치아이식 수술이라는 설명은 전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양형사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피살자에게 치아이식 수술을 해 준 치과만 찾을 수 있다면 그녀의 신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수사를 시작한 이후 최초의 기분 좋은 성과였다. '임플란트!'
양형사가 부탁하자 백박사는 기꺼이 사체에서 임플란트를 제거해 주었고
이 분야의 권위자인 S대학 치의학 연구소의 권영근 박사를 찾아가
문의해 볼 것을 권유했다.
수사에 가속도가 붙자 양형사는 그의 장점인 추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작은 더뎠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무서운 추진력이 있었고, 그것이
다소 능력이 떨어지는 그를 강력계에 붙어 있게 해주는 유일한 무기였다.
권영근 박사는 여태껏 보아 왔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인간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털털한 모습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주는 점이 아주 좋았다.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웠고 그 덕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젊은 여자가 이런 고가의 임플란트를 이식한 걸 보니 부모가 아주 돈이
많은 것 같아요. 아니면 요즘 젊은애들 많이 그런 다는데 돈 많은 남자를
하나 꿰찼든지......."
권박사는 말을 하며 늘 씽긋이 웃는 재미있는 면이 있었고, 그것이 함께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유인 것 같았다. 양형사는 대화를 기분좋게
풀어 갈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박사님, 그런데 그 임플란트라는 것이 그 정도로 비싼 것입니까?"
"그럼요, 아직 대중화된 게 아니라서 보통 서민으로서는 하기 힘들지요.
아무튼 임플란트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양형사가 가지고온 것은
Integral System이라고 하는데......."
양형사는 또 다시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자 머리가 아파 왔다.
"인테그... 그게 뭐죠? 박사님?"
"그건 몰라도 돼요. 그 보다는 그 시스템을 개발한 회사가 Calcitec
Incorporation이라는 미국 회사인데 우리 나라에는 수입 회사가 한
군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회사를 찾아 가보면 대충 감을 잡을 수가 있을 거요."
"그 회사가 어디죠?"
머릿속에 다음 할 일을 떠올리며 양형사가 숨가쁘게 물었다.
- 공 유-
서린 상사는 을지로의 음습한 건물 한 쪽에 자리하고 있는 그저 그런
건물의 외양에 비해서는 훨씬 생동감 있고 분주한 곳이었다.
서린 상사로부터 Integral System을 구입하는 치과들의 리스트를
얻어냈다. 전국적으로 100여개를 상회했다.
너무 광범위하였다. 서울은 67곳. 서울을 먼저 조사하는 게 순서였다.
서울에서도 부유층이 사는 지역부터 우선 훑어 나가는 것이 빠를 듯했다.
리스트의 치과마다 피살자의 Panorama X-ray를 들고 다니며,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던 환자들의 Panorama X-ray들과 일일이 비교하여
일치하는 환자를 찾아내야 한다.
시간이 많이 소요될 지라도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많은 X-ray를 일일이 비교해 나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루 두 군데씩만 조사한다고 해도 한 달이 넘게 걸릴 일이었다.
낙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시작해야 했다.
치과를 하나하나 방문하여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모두 시큰둥했지만
마지못해 차트와 X-ray를 넘겨주었다.
환자를 치료할 때 나는 드릴 소리와 뾰족한 마취 주사는 양형사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지겹기만 한 X-ray 필름 대조 작업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필름을 대조하고 있을 때, 양형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몹시 흥분 상태였다.
"양형사님 이시죠?
며칠 전 신문에 난 살인 사건 때문에 고민하다가 전화를 드렸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는 몇몇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이름이 임한얼이라고 했다.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한얼이를 만나러 가는 양형사는 필름 대조
작업을 쉴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은 것이 우선 기뻤다.
더구나 스스로 찾아오는 제보자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만나기로 한 커피 숍에 도착했다.
유난히 창백하고 섬세한 얼굴을 지닌 대학생이었다.
한얼이의 표정만으로도 몹시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커다란 상실감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켜 버렸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의 낙심한 표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얼이가 낱낱이 얘기한 두 가지의 사건은 분명 일맥 상통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신원 불명의 이 변사체와도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공감이 일었다.
양형사와 한얼이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그런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을 스멀스멀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실비아라는 학생의 호출기는 혹시 확인을 했나?"
양형사는 어느새 한얼이에게 형사 특유의 거친 톤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으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얼이가 지녔던 두려움과 공포심을 같이 공유하게 된 사람이 있어서,
함께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예, 아름이 책상 위에 실비아의 호출기가 있더라구요.
거기도 어떤 숫자가 찍혀 있길래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980613, 980624 그리고 한강에서 발견된 여자의 시체.
6월 27일이 발견일이었지만 사망한 것은 6월 24일이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얼이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아름이가 자살한 날이 바로 6월 13일 이었지요.
6월 24일에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24일 이후, 신문 사회면을 모조리 살펴봤었어요.
그런데 눈에 뜨일 만한 살인사건 같은 것이 없었어요. 이것을 제외하고는요..."
"그래서 자네는 980624라고 찍힌 호출 번호가 바로 이 여자의 살해
일자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아름이의 영혼이 KKK올가미라는 뜻도 모를 단어를 남기고,
살인 사건을 예고라도 했단 말인가?"
양형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쏘아 붙였다.
- 연 관-
"예, 그런 것 같아요. 만약 그 단어의 뜻을 풀었다면 그 살인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몰라요.
혹시 그 여자에게서 숫자 따위가 발견되지 않았나요?
호출기라든지......"
한얼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거 없었어. 그게 있었으면 신원이라도 알 수 있었겠지.
아무 것도 손에 지닌 게 없었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지.
그러니까 자네 추측은 무리가 있는 것 같군.
나도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무리야 그건.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어.
단지 젊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끼워 맞춘다는 건 논리에
맞질 않아."
양형사는 으쓱해하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죽었다는 자네 애인이나 손, 발, 혀가 잘렸다는 실비아. 또 이번
여자, 처음 느낌은 크게 공감을 했었는데, 남겨진 숫자나 메시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곧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돼.
자, 그럼 이만......"
양형사가 일어서려 할 때 다시 한번 한얼이는 부탁을 했다.
"양형사님! 신중하게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양형사님이 조금만 신경을 써 주신다면 어쩌면 앞으로도 있을 희생자를
막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가지 형사님이 실비아 호출기의 비밀 번호를 알아만
주신다면 어쩜 저는 형사님을 도울 수 있을 지도 몰라요."
급한 김에 마구 외쳐대는 한얼이의 절규에 가까운 토로에 양형사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거지?"
형사의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한얼이도 마구 쏟아지는 말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끝까지 밀어 보기로 했다.
"세 사건이 누군가 아니면 어떤 초자연적 현상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확신하거든요.
세 사건을 같이 모아 놓고 조합한다면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겠어요?"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던 양형사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학생의 말대로 모두가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
아니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비아의 호출기 비밀번호 정도 풀어내는 것이야 통신 회사에
전화 한 통화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까짓 양형사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 도움을 한얼이에게 일단 주고
나머지는 한얼이한테 미뤄 두어도 될 일이었다.
연관이 있다면 이번 사건은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고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양형사는 편안한 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그것이 어떤 커다란
의미로 그들에게 닥쳐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좋아! 그 비밀번호는 내가 알아다 줄테니까 자네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내게 다시 찾아와."
"고맙습니다. 양형사님!"
돌아서서 나가는 양형사의 등뒤에 꾸벅 인사를 했다.
어쩌면, 아름이가 자살한 아니 죽은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아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 밖에 없었다.
다음날 한얼이는 강의가 끝난 후 양형사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력은 생각보다 훨씬 위대했다.
"자, 여기 있네. 3826이더군."
양형사가 쉽게 건네주는 그 비밀번호가 마치 마법을 푸는 주술처럼
경이롭게 여겨졌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후 한얼이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 두 여 자-
그러나 한가지 운이 따라 줘야 했다.
아름이가 실비아의 메시지를 듣고 장기보존 기능을 작동시켰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메세지는 녹음된 후로부터 24시간 후인 6월 12일에
자동 삭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떨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실비아의 마법을 풀었다.
한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번호만 누르면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메시지이지만 실비아의 그것은
마법이라고......
"신-쥬-쿠-니-쵸-우-메-코-우-엔"
비장한 어투로 한 음절 한 음절 장중한 분위기가 물씬 푸기는 단어였다.
목소리는 아름이가 아니었지만 아름이의 메시지와 묘하게도 똑같은
느낌을 주었다.
실비아의 목소리일까?
아름이와 마찬가지로 사고 후에 남겨진 메시지였을까?
그래서 지금 똑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확인해보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다.
아름이가 남긴 단어와 실비아가 남긴 단어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여자는 동일한 원인에 의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원인 제공자 혹은 그 현상을 밝히는 것은 나중 순서였다.
우선은 동일한 패턴에 의해 발생한 사고였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했다.
여기까지가 우선 급했다. 그 다음은 양형사와의 협조로 더 많은 것을
캐낼 수 있는 것이었다.
- - -
깊은 상실감과 자기 부정에 정신 이상 증세마저 보이는 실비아의 병실에는
얇게 깔려 있는 안개처럼 뿌연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게 느껴서 일 것이다.
무심코 한얼이는 가늘게 눈을 뜨고 이쪽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실비아에게
몇 마디를 던졌다.
"좀 괜찮으세요? 기분은요?"
"............."
실비아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름이로 인해 두세 번 만난 적은 있었지만 이상스러울만치 실비아는
한얼이를 멀리 했었다.
잠시 서로가 묵묵히 있을 때 한얼이가 전화 다이얼을 눌렀다.
다짜고짜였다
.
수화기를 실비아의 귀 옆에 갖다 댔다.
"신-쥬........"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포착했다.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당신 목소리죠?" 한얼이는 다급하게 물었다.
"........"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메시지를 왜 남긴 거죠?"
아차 했다. 지금은 양방향 교신이 불가능했다.
예.아니오만 가능한 상황을 자꾸 잊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었다.
무슨 뜻일까? 왜 저렇게 못 견뎌 하는 것일까?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질문을 하려던 한얼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가 갑자기 심한 발작 증세를 보였다.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여지지 않는 몸.
혀를 거치지 않고 목에서만 울려 나오는 괴성음.
입가로 흘러내리는 끈적한 타액.
무서웠다.
실비아의 증상은 아름이의 죽음과 겹쳐져서 무한대의 공포감과 무기력감을
증폭시켰다.
- 부 검-
면밀한 검사를 위해서 백박사는 사체의 복부를 준비된 메스로
절개하였다. 가슴과 배의 피부 껍질을 양옆으로 제끼고 폐, 심장, 위, 간의 순서로 장기를 끄집어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 듯했다.
위의 내용물을 검사하기 위하여 위를 절개했다.
그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캡슐 크기의 아주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백박사는 그것을 눈 가까이로 가져와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부질없는 X-ray 필름 대조 작업에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양형사에게 백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로운 것을 발견했으니 빨리 와보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양형사는 정신없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향했다.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길 바라면서......
"위를 열어 보았더니 이게 있더군요."
백박사는 그 플라스틱 조각을 신중하게 핀셋으로 집어서 양형사에게
내놓았다.
"자세히 한번 들여다봐요. 숫자 같은 게 새겨져 있어요."
"예? 숫자!!!"
과연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 넣은 조그마한 숫자가 분명히 있었다.
980711
단순한 숫자였지만 무궁무진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그 숫자가 어떤 뜻이 있는 건가요?"
백박사가 양형사를 안경 너머로 흥미롭게 바라보며 예사롭지 않다는 듯
질문을 했다.
"박사님, 지금으로선 뭐라고 말씀 드릴 수 없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중요한 것을 찾아 주신데 대해서 감사를 드려요.
다음에 제가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박사는 영문을 모른 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칠했다.
뒤돌아 나오는 양형사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한얼인가 하는 학생이 얘기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보이지도 혹은 존재하지 조차 않을지도 모르는 어떤 개체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한얼이의 말 그대로라면 7월 11일까지 불과 일주일여 밖에는 남아 있질
않았다.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죽은 여자의 신원도 밝혀내지 못한 상황에서 일주일 내로 어떻게
이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그 무엇과 승부를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동기도 모르고 세 가지 사건이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루 빨리 그 무엇에게로 다가갈
수가 있을까?
첫 발걸음의 방향을 정하기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우선 한얼이한테 전화를 했다.
"한얼군, 자네 생각이 맞는 것 같군. 980711이라는 숫자가 발견되었어."
"예! 역시...... 호출기가 발견되었나요?"
"아니야, 사체의 위 속에서 조그만 플라스틱이 발견되었고, 그 곳에 숫자가
새겨있었지. 아무튼, 내일 좀 만나세."
"그러죠, 저의 학교 도서관 앞에서 아침 9시쯤,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지. 그 때 보세."
양형사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