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들이 부상당한 피난민들만 GMC트럭에 싣도 깜깜한 밤중에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데, 차가 마구 요동을 칠 때마다 환자들은 당가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머리통과 몸이 부디치니 환자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자 미군이 운전을 천천히 합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북 김천입니다.
김천의 도로에는 군인들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이미 다 피난을 간것 같이 도시가 깜깜합니다.
우리가 간 곳은 김천 도립병원인데 여기도 깜깜한것을 보니 다 피난을 간것 같습니다.
한참 후에 의사 한 분과 간호사 한 분이 와서 우리들을 병실로 옮깁니다.
간호사가 고깃국을 끓이고 하얀 쌀 밥을 해 와서 나에게 먹으라고 하는데, 나는 팔이 너무 아파서 쳐다보기도 싫어 짜증을 내자 간호사가 밥을 치워 버립니다.
나의 머리에는 여기저기에 혹이 나 있었습니다.
날이 새자 이번에는 한국 군인들이 우리들을 차에 싣고 기차역으로 갑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구역 입니다.
우리는 또 한국 군인들의 트럭에 실려 대구도립병원으로 가는데 길거리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대구로 모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구 도립병원으로 갔고 나는 어린이 이기에 어린이들만 있는 병실로 옮겨 졌습니다.
내가 들어간 병실은 아주 작은 방인데 나까지 4명의 어린이들이 나무로 만든 조그만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이 하나있고 밖에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은행 열매가 가득히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1950년 7월 25일은 일년중 가장 더운 날이고 한국에서 대구가 또한 가장 더운 도시입니다.
그때는 선풍기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병실은 마치 용광로 처럼 더워 숨이 헉헉 막힐 정도로 덥습니다.
그런데 대구 사람들은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병원 복도에서는 아주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가 하루종일 납니다.
그리고 송장 썩는 냄새가 지독하여 나는 우웩 우웩 하며 자꾸만 토했습니다.
그 무렵 의사가 부족하고 간호사도 부족하고 의약품도 부족하여 3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습니다.
나는 소변이 마렵고 대변이 마려워도 누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형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엽게 여긴 어린 아이들의 어머니가 나의 소변과 대변을 받아주고 밥도 먹여 줍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지 미안하면서도 나는 숫기가 없어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형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혹시 어머니가 살아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환상에 젖어 하루 종일 문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들어오는 착각속에 빠집니다.
(계속)
첫댓글 "나의 소변과 대변을 받아주고 밥도 먹여 줍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지 ..."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베드로 문님
@형광등등 천만예요.
좋은글 올려 주시느라 수고가 너무 많으십니다.
6.25때는 인정이 오늘날 처럼 메마르지 않았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