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의 역사 인물
1.홍건적을 물리친 이방실장군(1298~1362)
이 방실 장군은 고려시대에 판도판서를 지낸 이원의 아들로서 고려 공민왕때의 유명한 구국장군으로 함안 이씨의 중시조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지금의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동에서 투우봉의 정기를 이어 받아 태어났으며 고려 말엽의 외침에 의한 존망의 위기를 누차에 걸쳐 구한 맹장이다.
그는 고려 오백년 역사를 지킨 4성군과 16공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소재하는 숭의전에 배향되어 국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방실 장군은 충목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시종할 때 뛰어난 지모와 무용으로써 왕을 안전하게 보필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그 지략을 인정하고 인품을 가상히 여겨 중랑장에 보하였고 호군에 옮겨 전 백결을 하사하였다.
1354년(공민왕3)에 대호군으로 올라 선성에서 다루가치 노연상이 모반하자 용주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홍건적의 괴수 모거경 위평장등은 4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압록강의 얼음판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하고 이 나라 관원인 부사 주 영세 및 주민 천여명을 죽이고 다시 정.린주를 함락하여 도지휘사 김 원봉을 살해하므로써 드디어 안주에 웅거하였다.
이때 이 방실 장군은 안주만호로 안 우, 이 음, 이 인우 등과 협력하여 적을 압록, 서경간에서 격파한 공으로 이 방실 장군은 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로, 안 우는 추충절의정란공신 중서평장정사로, 김 득배는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으로 제수되었다.
뒤에 홍건적이 전함 70여척으로 서해도에 재침하자 풍주에서 이를 물리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제신에게 향연을 내리시고 이 방실 장군에게 옥대와 옥영을 하사하였다. 이때 공주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어찌 지보를 사랑하지 않고 가볍게 남에게 주시나이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우리 종사가 폐허가 되지 않게 함은 다 방실의 공이다.
내가 비록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능히 보답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어찌 아까우리요" 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씀하신 사실로 보아 우리 민족을 구한 충렬공 이 방실 장군의 업적은 성웅임과 동시에 위대한 맹장임을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인 위평장,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 등이 용봉으로서 기원하고 적의 무리 2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와 이성에 침입하자 안우를 상원수로 김득배를 도병마사 이방실을 도지휘사로 삼아 난을 평정코저 그들과 함께 개주, 연주, 박주 등지에서 적을 요격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안주 절령에서 참패하게 되니 서울인 개성까지 적의 손에 함락되었으며 이때 공민왕은 복주(-지금의 경북안동-)에 피난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이 방실 장군은 서북면 도지휘사로 제수되어 총병관 정 세운, 안 우, 김 득배, 황 상, 한 방신, 이 여경, 안 우경, 최 영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교의 천수사 앞에서 진을 치고 서울을 포위하여 적을 섬멸하고 잔적을 압록강 너머로 격퇴, 개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구국의 공을 평소부터 시기하던 간신 김 용은 위계로 불세출의 대공을 세운 3원수인 안 우, 김 득배와 더불어 이 방실 장군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때 이 방실 장군의 아들 중문은 나이 겨우 10여세였으나 당시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모두가 침식을 편히 함은 다 원수님의 공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극진히 보호하였다 한다.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 가운데 이 방실 장군을 비롯한 김 득배, 안 우 등 고려 3원수가 국운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여 서울 이 함락되고 거의 대부분의 국토가 홍건적에게 빼앗겨 나라마저 잃을 시기에 외세의 도움없이 이를 수복구국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양왕때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장군 이나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을 평정한 이 순신장군의 공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2.생육신 조려(趙旅,1420~1489)
1420년(세종 2)에서 1489(성종 20)년까지의 사람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주옹이고, 호는 어계은자이다. 함안사람으로 태어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출중하여 두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람마다 훌륭하게 될 그릇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글공부에 남달리 힘쓰고 그 공부의 요령이 대의를 통투하는데 힘쓰고 헛되게 뜻모르고 암송하는 버릇을 따르지 않았으며, 미사여구를 따서 짓는 모방적인 습성을 배격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가 당시 학계의 유종으로 이름높은 형조판서 김 종직의 시험관 밑에 응시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그 불의에 항거하였다. 조 려는 어느날 문생과 작별하고 함안에 돌아온 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말았는데 그의 시문에도 김 시습의 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1455(단종 3)에 왕위선양이 있은 후로는 스스로 어계처사라 하고 산수간에 상양하면서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백이산과 약간 떨어져 있는 정암산 부근에다 몸담을 데를 만들어 놓고 독서와 낚시로 여생을 보내었다. 이조 정조 5년(1781)에 이르러 정조는 그의 정충과 고절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이란 시호를 내려 그의 충혼과 의백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세조는 단종을 강봉하여 노산군으로 한 후 그를 강원도 영월에 안치해 놓고 청령포에서 배타는 것까지 엄금하였는데 이것은 영월과의 교통을 두절시키기 위함이었다. 1699년(숙종 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하고 백이산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이 사당을 서산학원이라 사호하였다.
3.서원의 창시자 주세붕(周世鵬,1495~1554)
1495년(연산군 1)에서 1554년(명종 9)의 사람으로 자는 경유, 호는 신재, 남고, 무릉도인이고, 본관은 상주이다.
용양위 부사과로서 이조참판에 증직된 문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에 소학에 능통했고 10세에 사서를 모두 읽었고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총명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해 겨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었고, 1524년에 정자가 되었다가 사가를 받아 호당( 일명 독서당)에 들어 공부하고 예문관 검열에 피선 되었으며 홍문관 정자에 옮겨져 수성잠을 지어 올렸고 이내 저작으로 옮겨졌다.
1527년에 박사로서 부수찬에 올랐다. 겨울에 큰 우뢰 소리가 있음에 옛 일을 상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시전의 시월편을 써 올렸는데 그 때에 김 안로가 모사하며 배척하여 강원도도사에 좌천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