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계 성혼 묘표(牛溪成渾墓表)
[생졸년] 1535(중종 30)~1598(선조 31) / 향년 63세
옛날 우리 선조대왕께서 문치(文治)에 힘쓸 당시, 율곡(栗谷) 이문성공(李文成公)이 경제를 맡고 있으면서 당대의 제일인자를 등용하도록 청하였는데, 이에 중외(中外)에서 모두들 우계(牛溪) 성(成) 선생을 천거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혼(渾)이고, 자는 호원(浩原)으로, 청송(聽松)선생 수침(守琛)의 아들이며, 사숙공(思肅公) 세순(世純)의 손자이다. 청송은 정암(靜庵)에게 배워 도학을 얻어들었고, 퇴도(退陶) 이황(李湟)을 존모(尊慕)하였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벗하여 구번(丘樊)에서 도를 지키니 명망과 실제가 더욱 빛났다.
처음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계유년에 고제(古制)를 복구하여 지평(持平)에 발탁하여 제수하였으나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였고, 을해년에는 부름을 받아 억지로 나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그 뒤 벼슬에 제수하는 명이 잇달았으나 그때마다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글을 올려 선(善)을 따르고 학문을 관장하는 도리를 진달(進達)하니 왕이 가상하게 받아들이면서 여러 차례 장령에 제수하여 편히 올 수 있도록 수레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신사년에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며 대도(大道)의 요체를 물었는데, 선생이 강령(綱領)을 들어 상세하고 정확히 진달하였으며, 물러 나와서 상소를 올려 먼저 진달한 뜻을 되풀이하여 극론(極論)하였다.
문성(文成)이 그것을 읽고 '세상에 이러한 의론(議論)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대신(大臣)은 그가 말한 것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난색(難色)을 보였다. 얼마 후 물러나겠다고 청하고 교외로 나왔는데 어찰(御札)을 내려 불러들여 접견한 뒤에 귀향을 허락하였다.
그 후에도 집의(執義)와 여러 시(寺)의 정(正)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년에는 특별히 병조 참지에 제수하면서 교서를 내려병조 판서는 그대의 친구이니, 바로 지금이 마음을 모아 함께 일을 도모할 때가 아니겠는가?'하였다.
선생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취직하였다.문성(文成)은 당시 병조의 수장(首長)이 되어 왕이 그에게 의지하였으니 참으로 좀처럼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소인배들이 시기하여 틈을 타서 탄핵하였으므로 선생이 상소를 올려 충사(忠邪)를 분별할 것을 진달하였다. 소인배들이 더욱 성을 내어 아울러 탄핵하자 선생은 그날로 파산(坡山)으로 돌아왔다.
왕이 보다 심하게 당파를 짓는 소인배들을 파출(罷黜)하고 문성을 특별히 총재에 제수하고 선생을 재촉하여 불러들여 아경(亞卿)에 올려 제수하였다.얼마 되지 않아 문성공이 별세하니 선생은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을유년에는 귀역 같은 무리들이 뜻을 펴 선생에게도 고당(錮黨)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기축년에 역옥이 일어나자 왕은 선생을 생각하고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하여 끈질기게 불렀다.
서울로 올라오기는 하였으나 병으로 일을 돌보지 못할 처지였으므로 소를 올려 치도(治道)의 요체를 논하고는 행장을 꾸려 돌아오고 말았다.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선생은 피란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평소에 작정한 것으로 돌아가신 나의 부친과 일찍이 고사를 인용하면서 문답한 바가 있었다.
세자의 부름을 받고서야 성천(成川)으로 나가 대조로 갔는데 도중에 참찬에 제수되었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겨 시무(時務)를 조목조목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정직하여 사람들이 선생을 두려워하였다.
선조가 환도(還都)할 때에 병으로 어가를 수행하지 못하고 뒤늦게 입조하여 대죄하였는데 언짢아하는 내용의 교지가 있었다. 이것은, 이전부터 참소가 쌓인 데에다가 계속하여 선위(禪位)를 청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싹튼 의심이 이때에 이르러 터진 것이다.
좌참찬 겸찰군국사로서 기탄없이 진언하자 선조가 더욱 마땅치 않아 하다가 자문(諮問)하는 일로 트집을 잡아 허물하므로, 선생은 바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정유년에 왜구가 다시 침범하자 주위에서 많이들 피란을 권하였으나 선생의 뜻은 임진년과 다르지 않아 피란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본디 마음을 정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별세한 지 4년 뒤에는 참소가 더욱 심하여 관작을 추탈(追奪)하려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나, 20년 뒤에는 공의(公議)가 제대로 정하여져 좌의정을 증직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청송서원(聽松書院)에 배향되었다.
아! 선생의 학문은 적전(嫡傳)의 연원을 가졌고 문장 또한 그러하였으므로,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함께 힘쓰면 나라가 잘 다스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는 융성하면 쇠퇴하는 법이고 명수(命數)는 하늘에 달린 것이어서, 실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이것은 기묘년 현인들의 경우와 비슷하여, 행동거지는 반드시 의(義)에 마땅하게 하였고, 어려움에 처해서도 소신을 바꾸지 않았으며,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바르게 하였다는 사실은 신명(神明)을 두고 다짐할 만하였으나 범인들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성(文成)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지조와 행실이 돈독한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한다.'하였고 또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에 으뜸이다.'고 하였으며 또'경륜을 맡길만하다.'고 하였다.
오직 문성공만이 선생을 제대로 알 수 있었으니 비록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생과 절연(絶緣)하고자 한 자가 있었으나 선생의 도덕만큼은 어찌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선생은 가정(嘉靖) 을미년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무술년 6월 6일에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다.
8월 모일에 향양리(向陽里) 선산의 뒤편에 장사지냈는데, 단갈(短碣)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은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이고, 부인은 고령(高靈) 신씨이다.
아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딸은 별좌 남궁명(南宮蓂), 대사간 윤황(尹煌)에게 각기 출가하였고, 측실 아들은 문잠이다. 문준(文濬)의 아들은 역, 익, 직이고, 딸은 신민일(申敏一), 안후지(安厚之), 윤정득(尹正得)에게 출가하였다.
남궁명의 아들은 걸▨(杰▨)이고 딸은 신▨(申▨), 김여옥(金汝鈺), 윤형은(尹衡殷)에게 출가하였다. 윤황의 아들은 훈거(勛擧), 순거(舜擧), 상거(商擧), 문거(文擧), 선거(宣擧)이고 딸은 이정여(李正輿), 권준문(權儁文)에게 출가하였다. ▨(▨)의 아들은 재(梓)이고, 딸은 신지(申墀)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나 김집은 일찍이 공의 문하에 종유하였으며 또 아버지와 스승에게 선생의 출처(出處)와 언행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이와 같이 간략히 쓴다. 기축 8월 일 세움.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 세자부 통정대부 공조참의 김집(金集)이 지음.시문간공 행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우계 성선생 묘표 음기 외손 윤순거(尹舜擧)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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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 渾墓碣昔我 宣廟銳意文治時則栗谷李文成公身任經濟請得當世第一人用之於是中外咸以牛溪成先生應 命先生諱渾字浩原聽松先生守琛之子思肅公世純之孫聽松學于靜庵先生淂之家庭又尊慕退陶而友栗谷守道丘樊望實濔彰初擧遺逸累官不起癸酉復古制擢拜持平謙不敢當乙亥承 召僶勉始起未幾而還自後除 命隨續輒辭以疾上章陳從善典學之道 上嘉納之屢拜掌令 命安車就道辛巳引對便殿 訪大道之要先生提綱挈領敷秦精白退而上封事申前意而極論之文成讀之曰世間不可無此議論也大臣請行其言 上猶難之尋乞退出郊 御札召還晋接始 許歸拜執義諸寺正皆不就癸未特除兵曹參知 敎曰兵判爾友也同心德正在今日先生累辭弗獲乃就職文成時長本兵爲 上所倚毗誠不世際遇而群小惎之抵隙論刻先生上䟽陳辨忠邪群小益怒遂并刻之即日還坡山 上命黜邪黨之尤者特拜文成冢宰促 召先生陞拜亞卿亡何文成公卒先生知道之不行乃決歸乙酉鬼蜮得肆書名錮黨并及先生己丑逆起 上思先生復拜吏曹參判勤 召不置乃入京病不視事䟽陳治道而歸壬辰冦至先生不赴難盖其平日所定曾與吾先子有引古荅問之語及承 世子召遂赴成川轉達 大朝道拜參賛移大司憲條陳時務辭甚切直人爲先生懼 上還都病未隨駕後入待罪 上旨有不平從前積譛繼有請禪者展轉生疑至此而發也旣拜左參賛兼察軍國事進言無顧忌 上意益不悅執顧咨事爲咎先生即乞骸歸丁酉冦再逞人多勸赴而先生之意則與壬辰無異不變其素定也先生沒四歲而&A5494;搆愈甚至追奪官爵後二十歲而公議大定 命贈左議政謚文簡並享聽松書院噫先生學惟嫡傳文旣在玆同德彙征國其庶幾而道有消長命實在天乖足行矣而卒不行殆類於己卯之賢行止必以其義夷險不易所守出處之正可質神明非衆人所能識也文成嘗稱曰操履敦磪吾所不及曰好善優於天下曰可任經綸唯文成能知先生人雖欲自絶於先生道德何傷乎先生生於嘉靖乙未卒於萬歷戊戌六月初六日壽六十四八月十▨日葬向陽里先兆後短表不書官遺命也先妣坡平尹氏夫人高靈申氏男文泳蚤死次文濬縣監女適別坐南宮蓂次適大司諫尹煌側室男文潜文濬男櫟杙稷女壻申敏一安厚之尹正得蓂男杰楀女壻申恊金汝鈺尹衡殷煌男勛擧舜擧商擧文擧宣擧女壻李正輿權儁文潜男梓女適申墀曾玄未盡載集早遊門下且因父師習聞出處言行略叙如右云己丑八月日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 世子傳 通政大夫工曹參議金集撰謚文簡公行資憲大夫議政府左參賛牛溪成先生墓表陰記 外孫尹舜擧敬書.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산8-2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