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서산보경
지금 모습 보면 전생과 내생을 안다…정진하라 (끝)
평생 허름한 누더기 한 벌로 근검절약하며 수행정진하고, 불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서산보경(西山寶瓊, 1915~1989)스님. 한국불교의 율맥(律脈)을 다시 일으킨 자운(慈雲)스님의 맏상좌이며, 한국전쟁 당시 감로사를 창건해 항도(港都) 부산을 한국 제일의 불도(佛都)로 만든 선지식이다. 보경스님의 수행일화를 포교원장 혜총스님의 회고로 재정리했다.
“지금 모습 보면 전생과 내생을 안다…정진하라”
항도 부산을 한국 제일 佛都로 장엄
어려운 이웃에 상 내지 않고 자비행
○… 합천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상좌 혜총스님이 부산 감로사에 왔다가 도반과 같이 시내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은사스님과 약속한 시간을 넘겨 절에 돌아오고 말았다. 감로사의 모든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꼬박 밤을 새워야만 했다. 다음날 새벽 예불시간이 되어서야 보경스님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경책했다. “이 모든 것이 인과응보이다. (밤을 새워야 했던) 이유를 알아라. 알았으면 마음에 새기고, 이제는 그만 들어와라.” 이 같은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보경스님은 평소〉� 인과응보의 중요성을 수시로 강조했다.
<사진>보경스님이 감로사 마당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누더기 장삼이 눈길을 끈다.
○… 혜총스님의 기억에는 ‘운력하는 은사스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보경스님은 공양이나 참선.염불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운력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감로사 연못도 보경스님이 손수 만든 것이다. 포교원장 혜총스님은 “은사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운력을 하셨다”면서 “잠시도 쉬는 일이 없으셨다”고 회고했다. 보경스님의 이 같은 자세는 운력도 수행의 방편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니 후학들과 신도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보경스님은 시주물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부처님이나 사찰에 올려진 시주물은 어느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으며, 부처님과 사찰,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시주를 회향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했다. 감로사 도량 불사를 할 무렵 “세 사람이 살면 세 사람 살 정도의 정재가 들어오고, 다섯 사람이 살면 다섯 사람이 살 만큼의 정재가 들어온다”며 자비를 실천했다. 스님은 어려운 이웃을 남모르게 돕는 자비행을 했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주민들이나,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당신의 주머니를 흔쾌히 비웠다.
○… 자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보경스님은 유점사와 해인사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늘 화두를 챙기며 정진한 스님은 노년에는 염불수행을 함께 했다. 하루에 여섯 번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육시예불(六時禮佛)을 모시는 것을 빼트리지 않았던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선지식의 견해에서는 화두 참구도 염불 염송도 없는 ‘같은 공부’였기 때문이다.
○… 1956년 자운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부산 감로사에 향곡스님이 찾아왔다. 도반을 반갑게 맞이한 자운스님은 상좌인 보경스님에게 공양을 차려오도록 했다. “이보게, 향곡스님이 오셨으니 공양을 잘 차려서 오게.” 그런데 보경스님이 차려온 공양 상에는 보리밥 한 그릇, 간장 한 종지, 냉수 한 그릇만이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속은 물론 절집의 살림도 어려웠지만, 반가운 도반을 맞이하기엔 ‘초라한 밥상’이었다.
공양 상을 내려놓으며 보경스님이 향곡스님에게 질문했다. “이 소식을 아십니까” 방안에는 침묵만이 가득 찼다. 미소를 지으며 공양을 깨끗하게 비운 향곡스님이 크게 웃은 후 말문을 열었다. “아주 잘 먹었다.” 곁에서 자운스님도 미소를 내 보였다.
○… 평소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았던 보경스님. 제자들과 신도들이 건강을 위해 병원을 찾을 것을 권유했지만 스님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런 스님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산대 병원을 찾았다. 입적하기 3개월 전의 일이다. 병원에서 퇴원해 감로사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스님은 상좌인 혜총스님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병원에서) 고생이 많았다. 내가 세상과 인연을 다하고 떠날 때는 애를 먹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간병하느라 고생한 제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1989년 12월 18일 ‘마지막 점심공양’을 한 스님은 당신 처소에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평소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보경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대중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 행장 ■
1915년 3월5일(음력)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출가후 금강산 유점사, 지리산 상무주, 합천 해인사 등에서 수행 정진에 몰두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시 진구 전포동에 감로사를 창건했다. 피난 온 스님들의 뒷바라지는 물론, 전쟁의 상흔을 입은 국민과 불자들을 위해 염불원(念佛院)을 개설했다. 1989년 12월 18일 부산 감로사에서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75세, 법납 48세. 상좌로 법희(法喜)스님과 혜총(慧聰)스님을 두었다.
<사진>1987년 3월 법회를 봉행한 후 도량을 돌고 있는 보경스님(맨 앞).
보경스님의 영결식은 1989년 12월20일 오전 10시 부산 감로사에서 성공.정련.흥교.일각.선래 스님 등 사부대중 700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됐다. 행장소개, 영결사, 조사, 추도사 등으로 진행된 영결식이 회향된 후 스님의 법구는 범어사로 이운돼 다비식을 모셨다. 평소 스님의 뜻에 따라 사리는 수습하지 않았다. 보경스님의 상좌인 혜총스님(조계종 포교원장)은 “언제나 늘 현실에 충실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이 평생 수행의 지침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 어록 ■
“(부처님 제자라면) 인과응보가 철저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지금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다음생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하니 부지런히 수행하고 정진하라. 언제나 현실에 충실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시주물은 부처님께 공양이 오른 정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주물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주물을 잘못 사용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잘 사용하면 극락에 태어난다.”
“정재는 부처님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데 써야 한다. 불사(佛事)와 중생구제를 위한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
“육체가 있는 그대로 사리인데, 어디서 따로 사리를 구할게 있는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사리이다. 그런데 굳이 사리를 취하는 것은 착(着)이다.”
■ ‘천진면목’에 소개된 선지식 명단 ■
지난 2008년 1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선지식의 천진면목’은 근현대 고승들의 수행일화를 통해 한국불교 중흥의 초석을 점검했다. 그동안 등장한 선지식은 모두 104명이다. 수행일화를 다루지 못한 선지식에 대해서는 다음 인연을 기약해 본다. 다음은 ‘선지식의 천진면목’에 등장한 스님들이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 만암종헌(曼庵宗憲, 1875 ~ 1957),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석우보화(石友普化, 1875~1958), 성암석구(性庵錫九, 1889~1950), 석두보택(石頭寶澤, 1882~1954),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 남전한규(南泉翰奎, 1868~1936), 석전정호(石顚鼎鎬, 1870~1948), 봉하장조(峰霞長照, 1887~1978), 성해남거(聖海南居, 1854~1927), 혜월혜명(慧月慧明, 1862~1937), 성월일전(惺月一全, 1866~1943),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서응동호(瑞應東濠, 1876~1950), 청호학밀(晴湖學密, 1875 ~ 1934),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 진응혜찬(震應慧燦, 1873∼1941),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고암상언(古庵祥彦, 1899~1988), 운허용하(耘虛龍夏, 1892~1980), 보월성인(寶月性印, 1884~1924), 금오태전(金烏太田, 1896~1968), 수월음관(水月音觀, 1885~1928), 효봉학눌(曉峰學訥, 1888~1966),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청담순호(靑潭淳浩, 1902~1971), 진하축원(震河竺源, 1861~1925), 효동환경(曉東幻鏡, 1887 ~ 1983), 완호낙현(玩虎洛現, 1869~1933), 석상신수(石霜信首, 1872~1947), 용악혜견(龍岳慧堅, 1830~1908), 만해용운(卍海龍雲, 1879~1944),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 동고문성(東皐汶星, 1897~1997), 벽안법인(碧眼法印, 1901~1987), 지암종욱(智庵鍾郁, 1884~1968), 고경법전(古鏡法典, 1883~1946), 운봉성수(雲峰性粹, 1889~1946), 고봉태수(高峰泰秀, 1900~1968), 몽초인홍(夢草仁弘, 1870~1947), 원허(圓虛, 1889~1966), 도봉본연(道峯本然, 1873~1949),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동암성수(東庵性洙, 1904~1969), 제산정원(霽山淨圓, 1862 ∼ 1930), 운기성원(雲起性元, 1898~1982), 취봉창섭(翠峰昌燮, 1898~1983), 철우태주(鐵牛太柱, 1895~1979), 혜암현문(惠菴玄門, 1886∼1985), 벽초경선(碧超鏡禪, 1899~1986), 청우경운(聽雨景雲, 1912~1971), 대은소하(大隱素荷, 1894~1989), 설봉학몽(雪峰鶴夢, 1890~1969), 인곡창수(麟谷昌洙, 1895~1961), 고봉경욱(古峰景昱, 1890~1961), 혜봉용하(慧峰龍河, 1874~1956), 수월영민(水月永旻, 1817~1893), 소소소천(簫韶韶天, 1897~1978), 해안봉수(海眼鳳秀, 1901 ~ 1974), 회명일승(晦明日昇, 1866~1951), 금봉병연(錦峰秉演, 1869~1916), 월초거연(月初巨淵, 1858~1934), 초부적음(草夫寂音, 1900~1961), 홍경장육(弘經藏六, 1899~1971), 향봉향눌(香峰香訥, 1901~1983), 추담 순(秋潭 純, 1898~1978), 동헌완규(東軒完圭, 1896~1983), 벽산금타(碧山金陀, 1898~1948), 우화도원(雨華道元, 1903~1976), 진호석연(震湖錫淵, 1880~1965), 종원영재(宗圓英宰, 1900~1927), 대의만업(大義萬業, 1901~1978), 석종학유(石鐘學乳, 1894~1933), 덕원고경(德元古鏡, 1882~1943), 일옹혜각(一翁慧覺, 1905~1998), 인암봉록(忍庵鳳祿, 1908 ~ 1986), 이목서운(二木瑞雲, 1903~1995), 영암임성(映巖任性, 1907~1987), 춘성춘성(春性春城, 1891~1977), 금당재순(錦堂在順, 1899∼1973), 성암관일(惺庵觀一, 1914~1980), 태허성숙(太虛星淑, 1898~1969),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5), 화봉유엽(華峰柳葉, 1902~1975), 대응만우(大應萬佑, 1897~1968), 대련덕문(大蓮德文, 1887~1949),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1978), 지월병안(指月炳安, 1911~1973), 구산수련(九山秀蓮, 1909~1983), 해봉법룡(海峰法龍, 1891 ~ 1969), 탄허택성(呑虛宅成, 1913~1983), 학월경산(鶴月京山, 1917~1979), 보문현로(普門玄路, 1906~1960), 명허동근(明虛東根, 1897~1970), 혜진(慧眞, 1908~1984), 무불성관(無佛性觀, 1907~1984), 자운성우(慈雲盛祐, 1911~1992), 성림월산(聖林月山, 1913~1997), 운조홍법(雲照弘法, 1930~1978), 서산보경(西山寶瓊, 1915~1989)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