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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7 - 게르만 프랑크족이 아닌 토착인의 왕조인 카페 왕조 1
로마가 허약해지니 게르만민족들이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와 유린하니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
를 휩쓸었고 프랑크족은 프랑스땅에 자리를 잡았으며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
했는데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를 휩쓴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상륙
해서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우마이야군 1만 2천은 3만 3천의 서고트왕국 군대를 격파합니다.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한 이슬람 우마마이야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땅으로 침입해
북상하니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왕국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에 파리
서남쪽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2만명을 지휘해 아슬람 우마이야왕조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의 2만 5천군을 격파하니 그 아들이 건국한게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입니다.
카롤링거 왕조를 무느뜨린 카페 왕조는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을때 부터 1792년
까지 이어지다가... 다시 1814년 왕정복고 이후 부터 1848년 까지 이어진 프랑크계 귀족 로베르
가문의 프랑스 왕조인데, 카페 본가는 1328년에 단절되었으나 분가인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
가 본가를 계승했으며 카페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프랑스 국왕은 루이 필리프 1세 입니다.
카페 왕조는 중세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왕조로 프랑스 왕국 외에도 포르투갈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레 왕국, 라틴 제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신성로마제국과 영국에서 군림
하였으니.... 게르만 프랑크족이 세운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를 이어 프랑스의 세번째
왕조를 개창했는데 모계 후손을 포함하면 거의 대부분의 유럽 왕조들은 카페 왕조의 후계 입니다.
카페 왕조는 영국으로 치면 튜더 왕조와 유사한데... 카페 왕조 2대왕인 로베르 2세의 둘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를 시조로 한 카페 부르고뉴 가문과 10대왕 필리프 3세의 서자 에베룩스의 루이
10세를 시조로 하는 나바르 왕국의 카페 에브뢰- 나바르 가문 역시 모두 카페 왕가의 일원 입니다.
카페(Capet)라는 성씨는 카페 왕조의 첫번째 프랑스 왕인“위그 카페”의 아버지 위그 르 그랑
으로 부터 유래했지만, '카페 왕조' 라는 명칭은 왕가에서 사용했던 공식 명칭은 아니고
역사가들이 만든 것인데.... 위그 카페의 시조 가문인 로베르 왕조(Robertiens) 역시 역사가
들이 866년에 죽은 네우스트리아 후작인 로베르 르 포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가문명 입니다.
역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 베르너에 따르면 카페 왕조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이니 로베르 왕조
의 두명의 왕 외드 1세와 로베르투스 1세를 포함해서 888년부터 1848년까지 위그 카페의 가문은
프랑스왕 36명을 배출했으며, 또한 나폴리와 시칠리아왕 13명, 스페인왕 11명, 헝가리왕 네명,
폴란드왕 세명, 룩셈부르크 대공 두명, 라틴제국 황제 세명과 포르투갈왕 32명 및 브라질 두명 입니다.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드 뤽상부르 와 스페인왕 펠리페 6세가 카페 왕가에 속하는데 위그
카페 이전, 두명의 로베르 왕조 가문원이 카롤링거 왕조 사이에서 프랑크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외드 1세와 로베르 1세이니.... 부친 로베르 르 포르는 작센 또는 게르만 기원이라고 합니다.
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는 로베르 르 포르의 조상은 다고베르투스 1세의 상서 로베르
처럼 메로빙거 왕조 후기에 네우스트리아에서 왕실 관련업 종사를 맡던 큰
가문을 만들었을 것이라 보는데, 그리고 764년에 사망한 에스바예와 보름스 백작
로베르 1세 처럼 아우스트라시아의 카롤링거 가문과 친인척 관계를 가졌다고 봅니다.
987년 프랑크 공작 위그 카페는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의 열혈한 지지로 죽은 루이 5세의
삼촌이자 카롤링거 가문의 하 로렌의 샤를을 제치고 프랑스의 왕이 되었는데... 그의
치세는 대귀족에게는 약한 권력이 특징이니, 위그는 프랑스 왕국 남부에는 개입하지
못했으며 직속 영지와 그가 직접 통치하려한 몇몇 봉신들에게만 권위가 미쳤다고 합니다.
카페왕가 직계는 987년 위그 카페 부터 1328년 15대 샤를 4세까지 이어졌고 필리프 3세의 후손인
방계는 발루아 왕가 (1293–1498), 발루아- 오를레앙 왕가 (1392–1515),오를레앙- 앙굴렘 왕가
(1407–1589)로 이어지며 루이 9세의 후손으로 부르봉 왕가 (1268–1503), 스페인 보르본 왕가
(1700–현재) 루이 8세의 후손은 카페앙주 왕가(시칠리아, 나폴리와 헝가리, 폴란드 왕실) 등 입니다.
위그 카페(987–996) 는 위그 대공의 아들로 956년 부친이 사망하자 네우스트리아 후작이자
프랑스 대공을 계승했고, 지방분권적인 대귀족들의 수장으로 서프랑키아왕 로테르와
경쟁 관계를 이루었는데... 986년 로테르왕 또 987년 그의 아들 루이 5세 왕이 사망하자
동프랑키아 오토 왕조의 지원과 서프랑키아 대제후 지지 속에서 새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는 순간 대귀족들의 수장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었고 왕국은 파편화
된 권력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미약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마지막 카롤링거 가문의 후예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가 하면,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아들 로베르에게 축성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위그 카페는 941년 위그 대공과 동프랑키아왕 하인리히 1세의 딸 에드비주 사이 태어났는데, 가문은
9세기말 바이킹을 격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네우스트리아 후작 로베르 강성공 때에 성장하여
로베르 가문이라 불렸으니 페팽(피핀) 가문이 카롤링거 왕조의 전신이 된것 처럼, 로베르 가문은
카페 왕조의 전신을 이루었으며 지방분권화 되어가는 서프랑키아에서 이미 2명의 왕을 배출했습니다.
위그 카페의 백조부(伯祖父) 외드(재위 888년 ~ 898년) 와 조부 로베르 1세(재위 922년 ~ 923년)
가 그들이었고 부친 위그 대공은 루이 4세와 로테르 치세 내내 서프랑키아 북부 지역에서
강력한 제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그의 외조부는 동프랑키아의 왕 하인리히
1세이고 외숙부는 동프랑키아 왕으로서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 오토 1세 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 서프랑키아(프랑스) 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와 로베르 가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었고.... 외삼촌인 동프랑키아(독일)의 오토 1세는 이 두
세력을 저울질하면서 서프랑키아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위그 카페 별칭 ‘카페’ 란 원래 수도사의 모자나 두건을 뜻하는 프랑스어 ‘chape(cappa)’
에서 유래한 것으로 종교 세력을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투르의 생마르탱 수도원 등
여러 곳의 수도원들을 후원하였고, 이에 따라 세속인으로서 일종의 명예 수도원장
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니...... ‘모자(두건)를 쓴’이라는 표현은 수도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위그 카페’라는 표현은 직역하면‘수도사의 모자(두건)를 쓴 위그’라는 뜻이 되는데 그가 실제로
수도사의 복장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수도사들을 비롯한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중세 내내 유명해질 카페 왕조의
수식어구 ‘가장 기독교적인 왕(rex christianissimus)’ 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이루게 됩니다.
956년 로테르(954년 ~ 986년) 치세 초기에 로테르의 후견인 위그 대공이 사망하자 위그 카페
는 15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지만 왕의 후견인 직위는 오토 1세의 개입으로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차지하게 되었고, 오토 1세는 로테르와 위그 카페에 영향력을 행사
하면서 카롤링거 왕조와 로베르 가문 사이에 상호 견제를 조장하기도 하고 조정하기도 합니다.
973년 오토 1세가 사망하자 카롤링거왕조 프랑크왕 로테르는 가문의 옛 땅인 로타링기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는데, 978년 8월 위그 카페는 로테르
를 도와 동프랑키아 측 로타링기아(아헨)를 침공했고 10월에는 거꾸로 오토 2세
가 로테르왕의 동생인 샤를과 함께 서프랑키아측 로타링기아(수아송, 랑) 를 침공합니다.
동프랑키아왕 오토 2세의 급습에 프랑크왕 로테르는 자신이 머물던 랑 궁전을 떠나 위그 카페가 장악
하고 있던 파리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위그 카페는 로테르와 함께 파리를 수호하는데
성공하고 신성 로마제국 황제를 패퇴시킨 왕으로서 서프랑키아 전역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983년 3살인 오토 3세가 왕위를 계승하니 동프랑키아 내부에 후견인 직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 발생
하였고, 로테르왕은 동프랑키아에 속하게 된 로타링기아를 획득하기 위해 오토 가문에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위그 카페는 오토가문과 가까워지니 오토가문을 지지하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
(Adalberon) 은 카롤링거 왕조에 충성하던 랭스 대주교들의 전통을 깨고는 위그 카페를 지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라고 믿는 신의 집은 셋으로 나뉘어 있나니, 이 세상에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있도다. 이들 셋은 하나로 뭉쳐 있나니 서로 떨어져
있지 못하리라. ”랭스의 대주교였던 아달베롱(Adalberon)이 로베르 왕에게 올린 시
(Poemes au roi Robert) 로 위에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은 성직자, 기사, 농민 입니다.
979년 로테르는 왕자 루이 5세 축성식을 거행했고 982년에는 남서부 지역에 대한 왕권을
확대하기 위해 어린 루이 5세와 앙주 가문의 아델라이드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2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정략결혼은 실패로 돌아갔고.... 986년 로테르가 죽고 루이 5세가 즉위
했으나 987년 아달베롱에 대한 재판을 개최하기 전날 의문의 낙마사고로 사망하니 페펭
3세가 개창한 게르만 프랑크족 카롤링거 왕조는 서프랑키아(프랑스)에서 종말을 고합니다.
서프랑키아(프랑스)의 제후들은 이미 두차례 왕을 배출했던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를
왕으로 선출했는데, 사실 위그 카페 또한 조모 쪽으로 카롤링거 왕조에 닿아
있기는 했으니... 조모인 베아트리스는 베르망두아 백작 가문 출신으로 그 시조는
샤를마뉴의 요절한 아들이자 경건제 루이 1세의 형인 이탈리아 왕 페팽 이었습니다.
987년 7월 위그 카페는 서프랑키아의 대귀족들의 동의로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로테르의 동생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이 있었지만 그는 왕위계승자 후보에서 배제됐으니 서프랑키아 귀족들
의 불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977년 형수인 무고한 왕비를 간통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프랑키아(독일) 오토 2세와 협력하여 형 로테르의 왕위 찬탈을 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위그 카페는 즉위하자마자 아들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왕위계승을 확고히 하고자 했는데.... 동프랑키아 오토 가문의 측근이었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한 가문에 의한 왕위 독점을 막고 대귀족들이 번갈아서 즉위하는 방식을 선호
했기 때문에 카페 가문만의 대대로 왕위 계승을 보장해 주는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을 거부합니다.
이에 위그 카페는 이슬람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카탈루냐 백작 보렐 2세가 군사원조
요청을 해온 사실을 들어 자신이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 자신을 대체할 왕위 계승자
가 필요하다고 아달베롱을 설득했으니.... 결국 987년 성탄절에 아들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로베르 2세는 위그 카페를 도와 각 지역의 전장을 누빕니다.
위그 카페의 적수는 카롤링거 왕조의 서프랑크 왕 루이 4세와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딸
게르베르가 사이의 아들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이니 그는 서프랑키아(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동부지역을 장악해 나가는데, 위그 카페는 989년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사망하자 로테르의 서자 아르눌을 임명해 카롤링거 왕조에 대한 민심을 달래보려
했으나 그는 샤를과 협력했고... 샤를에 의해 쫓겨난 랑 주교 아달베롱은 위그 카페를 지지합니다.
991년 랑 주교 아달베롱은 위그 카페와의 화해를 주선한다는 거짓 약조로 샤를과 아르눌을
안심시킨 다음 이들이 자고 있는 동안 납치하여 위그 카페에게 보냈으니.... 결국 샤를
은 오를레앙의 감옥에서 사망했고 아르눌은 랭스 대주교에서 파직당했는데, 이로써
위그 카페의 왕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던 카롤링거 가문 일파는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랭스대주교와 랑주교 이름이 아달베롱으로 나오는데 이는 유럽의 곰 숭배에서 비롯된 것
으로... 곰은 그들을 수호해 주는 조상이었으니 영웅 자신이 꿈에서 곰으로 변해 늑대로
나타나는 적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는데, 전쟁의 신 ‘토르(Thor)’ 의 이름도 노르웨이
에서 흔히 곰을 부르던 별명인..... ‘토르비에른 (Thorbjörn)’ 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마인츠에서 베를린의 상징인 곰 그림을 본적이 있는데.... 일본의 나카자와 신이치는
인류 문명이 석기에서 청동기로 전환하는 시기에 국가가 출현했는데, 이는 전세계 온대
지역에서 인간과 호환적 존재로 신성시되던 곰 토템의 붕괴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온대지역인 유럽도 곰은 12세기 까지 백수의 왕으로 신성시 되었는데... 켈트족 프랑스와
게르만족, 슬라브 및 스칸디나비아 종족에게서 "곰 숭배문화" 가 발견되니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수호 동물이 곰이고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르카디아는 곰의
나라 이며 이름에 곰의 흔적인 Art 가 남은 영국의 아서 Arthur 왕은 곰이 겨울잠
에서 깨어나는 2월에 마법을 검을 뽑으며 죽는 날은 곰이 겨울잠에 들어가는 11월 입니다.
바이킹 덴마크 왕실의 시조가 곰이고 고대 영웅시의 주인공 베어울프는 곰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으로 이름은 “벌들을 약탈하는 자 ”인데...
곰 숭배 문화는 3~12세기에 이교도를 척결하려는 기독교의 전파 와 함께
사라지니,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대제는 수천마리의 곰을 살륙했다고 합니다.
성 마르티누스는 신성한 곰을 길들여 가축으로 격하시켰으며 곰 축제일을 성인 축제일로 바꾸어 버렸는
데.... 로마와 이집트에서는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 농신제(새튜날리아)로
기념하고 있었으니 동지(冬至) 부터 해가 길어지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세력을 얻어 만물이
소생해 나갈수 있음을 기념했는데, 로마의 주교 율리오 1세는 AD 350년에 이교도의 축제를 금지
시키는데 실패하자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신을 기념하는 성탄절(크리스마스)로 바꾼 것과 유사합니다.
또 6~11세기에 곰은 우중충한 털빛과 성욕에 대한 환상이 겹쳐진 "악마 이미지" 가
덧씌워 졌으며 그 자리에는 사자 를 앉히는데.... 성경에는 곰과 사자의 좋은면
과 나쁜면이 비슷하게 나오지만 곰에 대해 유독 나쁜이미지를 부각시킨 결과
13세기 유럽 왕실의 문장에서 사자는 15% 이지만 곰은 0.5% 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베를린은 슬라브족의 거주지역이었으나 12세기에 변경백 알브레히트 곰(Bear) 백작이 식민
하여 독일화했으니 베를린이라는 도시명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현재 베를린
의 뜻은 “새끼곰” 을 의미하고 베를린의 시장(市章) 도 새끼곰을 문양화 한 것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야생 곰을 보려고 시베리아 대륙을 자전거로 달린 사람이 있으니 “유라시아 신화 기행”
을 쓴 공원국씨이니 우리나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을 생각하며 그런 신화의 원천을 찾아 몽골을
일주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히말리야를 넘어 카프카스 까지 장장 2만 5천 KM 를 여행했다던가요?
또 유럽 고대 영웅시의 주인공 베어울프도 곰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니 단군과 비슷 합니다.
하지만 샤를과 아르눌에 대한 거짓 약조와 납치는 지방 제후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니.... 교회에서는 989년의 샤루 공의회를 기점으로 사회적인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 ‘신의 평화운동’ 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적극 동참하고 있던 남부 귀족들
과 성직자들은 아달베롱과 위그 카페의 권위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거부감은 샤를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왕의 모습에 위그 카페의 계략과 술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랭스 대주교로 제르베르가 선출되자 대주교 선출 과정을
두고 프랑스 성직자들과 로마총대주교(교황) 요하네스 15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로마에 대해 프랑스적인 독립성을 내세웠고, 요하네스 15세는
자신의 보편권을 내세우면서 이와 관련한 공의회 개최를 제안했는데... 하지만
결국 제르베르는 랭스 대주교직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후 999년에는 최초의
프랑스인 출신이 교황 실베스테르 2세 (재위 999년 ~ 1003년) 로 선출 됩니다.
지방분권화 된 프랑스 왕국에서 위그 카페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왕령지의 규모는 매우 보잘 것
없었으니, 귀족들의 백작령과 공작령은 통합된 거대 영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에 왕령지는
베르망두아 백작령 내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었으니 왕으로서 위그 카페의 권력이 제한적이었는데...
프랑스 귀족들은 큰 영지를 가진 대제후가 왕이 되는걸 꺼려 작은 영지를 가진 카페를 선출한 것입니다.
위그 대공 시절의 로베르 가문은 카롤링거 왕가를 견제할 정도로 강했으나.... 왕국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는데, 위그 대공의 권력은 직접적인 영토 장악이 아닌 귀족들의 수장으로
다른 제후들을 이끄는 지도적 영향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니... 로베르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자
위그 대공의 우려대로 로베르 가문은 제후의 수장으로 자처할 수 없게 되니 그 세력이 축소됩니다.
거대한 백작령과 공작령들도 북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보다 작은 단위의 영지들로 분할되어 대제후
들의 종신들에게 배분되었으니‘질서 있는 무정부주의’라고 할수 있는 봉건주의(feudalism) 정치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토지와 인민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종신들이 군사력의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주군(왕)들은 종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종신들과 쌍무적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명목상으로는 다른 대제후들 보다 높은 자리인
국왕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대제후들의 통치에
개입할 수 없었고,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통치 영역은 자신의 왕령지에만
국한되었으니 1603년에 세워진 일본 에도 도쿠가와 막부 보다도 통제력이 약했습니다.
대제후들의 입장에서 위그 카페의 왕위는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찬탈할 필요가 없었으며 대신
이들에게 왕이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하는 미약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했으니, 이제 다른 대제후들이 제2의 로베르 가문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위그
카페는 이들의 무력 투쟁에 대해서 중재나 개입도 하지 못했으며 996년 천연두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미 축성식을 통해 공동 왕위를 보장받은 아들 로베르 2세는 실질적으로 다른 대제후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 미력한 왕들에게
일말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자들은 오직 왕권 신성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성직자들 뿐 이었습니다.
로베르 2세 (996–1031 Robert) 는 위그 카페의 아들로 987년에 이미 축성식을 치렀으며
996년 위그 카페가 사망하자 통치를 시작했는데... 어릴적 부터 성직자들에게
라틴어를 배워서 성직자로서의 관점과 태도들을 유지했으니 경건왕(le Pieux/ Pius)
으로 불리는데...... 이 때문에 왕권과 성직자들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의 왕권은 성직자들에 의해 신성한 왕권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 로베르 2세는
왕령지 팽창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중 가장 큰 성과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획득한 것이었지만
셋째 부인 콩스탕스의 부추김을 받은 두 아들 앙리 1세와 리차드가 아버지 로베르 2세에게
봉기를 일으켰고 로베르 2세는 이들과 전투에서 패배한후 얼마 지나지 않아 1031년 사망합니다.
로베르 2세는 카페 왕조 두번째 왕으로 라틴어를 교육받았으니 문맹에 가까웠던 위그 카페는
아들 로베르 2세에게는 글공부를 시킨 것인데.... 당대 귀족들 사이에서는 드물게도
초보적인 라틴어를 읽고 쓸줄 아는‘유식한’왕이 되었으니, 984년 12세가 되던 해에 로베르
2세를 학문의 중심지인 랭스로 보내 대주교 아달베롱으로 부터 라틴어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올랐지만 서프랑키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혈연에 의한 세습이
아닌 선거에 의한 선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위그 카페는 이슬람에 대한 원정과 왕위
공백을 핑계로 내세우면서 성탄절에 아들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을 억지로 거행해 부자간의
왕위 세습을 확고히 하려 했고 로베르 2세는 왕국 곳곳을 누비며 부왕의 정책을 보필했습니다.
988년 위그 카페는 16세에 불과한 로베르 2세의 결혼을 서둘렀으니 왕의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이탈리아왕 베렝가리오 2세의 딸 로잘라와
억지 결혼을 시키는데, 하지만 로잘라는 이미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 2세와 결혼하여 987년
에 사별한 여인으로 로베르 2세 보다 17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왕은 직할령 확보에 필사적
이었으니 로잘라가 지참금으로 가져올 영지 욕심에 눈이 멀어 거행한 정략결혼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왕의 직할 영지를 늘리기 위해 권유한 정략결혼인지라 로베르 2세에게는 17살
이나 연상인 늙은 로잘라와의 결혼 생활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어쨌든
로베르 2세는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왕국 내 종교 세력이 부과하는 상징 권력을 보다
철저하게 확보하고자 했으며, 위그 카페와 로베르 2세는 준성직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세속인과 일반 성직자들을 중재하는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려고 애썼습니다.
또 국왕 자신들의 정책을 교회의 가르침이나 요구에 최대한 부합시키면서도 성직자들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는데.... 특히 로베르 2세는 라틴어를 습득하여 음악과 철학책에 몰두하고 누구든
용서하는 성직자적인 태도를 지녔으니 때문에 그에게는 ‘경건왕’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91년에 위그 카페가 벌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과 랭스 대주교 아르눌의 납치 사건
은 비겁하고 야비한 행위로 지탄을 받았고 위그 카페와 로베르 2세의 위신은 크게 떨어
졌는데... 그럼에도 마지막 카롤링거 가문으로 서프랑키아(프랑스) 왕위를 위협하던
샤를을 이렇게라도 제거하여 자신들의 왕권을 보다 확고히 하는데는 성공한 것 입니다.
로베르 2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도저히 늙은 왕비 로잘라와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었으니, 게다가 무엇보다도 로잘라는 나이가 많아 로베르 2세와의
사이에서 어떤 자식도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로베르 2세는 996년 위그 카페
의 사망 이후 로잘라와 이혼하고는 블루아 백작 외드의 미망인인 베르트와 결혼합니다.
이번에도 직할령 영지 욕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베르트는 부르고뉴 왕국의
왕 콘라드 3세와 루이 4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었으며, 마틸다의
어머니는 동프랑키아 왕 하인리히 1세의 큰딸 제르베르주(게르베르가) 였는데...
그녀는 바로 로베르 2세의 할머니 에드비주(하드비히)와 친자매 사이 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교회법에 따르면 로베르 2세와 베르트의 결혼은 근친혼으로 분류되었고 곧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이들에게 이혼을 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선언하니... 결국
로베르 2세는 베르트에게서도 바라던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1001년 베르트와 이혼
하고 1003년에 어떻게해도 근친이 될수 없는 아를 백작 기욤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합니다.
세 번째 왕비인 콩스탕스는 1003년 결혼 당시 17세로 당대 기록에 의하면 “허영이 많고 탐욕
스러우며 거만하고 앙심을 품는”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
에는 그녀가 북부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풍속을 지닌 남부 프로방스 지역 출신이라는 편견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콩스탕스는 로베르 2세에게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선사합니다.
콩스탕스는 아들들을 내세우며 정치적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했고 이는 종종 궁정에서
수많은 충돌과 사건들을 일으키고는 했는데, 다른 한편 로베르 2세는 취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니 이 당시 경제 기반은 전적으로 농토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기반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장악력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로베르 2세는 조금씩 직할 왕령지를 늘려나가는 데 성공했는데 이중 가장
큰 성공은 바로 부르고뉴 공작령 획득에 있었으니... 1025년에는 장남이었던
위그가 사망하였고 이에 왕세자로 차남인 앙리 1세가 지명되었는데 1027년
왕비 콘스탕스의 주장에 따라 앙리 1세 또한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거행 합니다.
이렇게 앙리 1세의 왕위계승이 확실해지자 콩스탕스는 영국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에 대항해 리차드를 부추긴 것 처럼, 아들들을 부추겨 로베르 2세에게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니
결국 1030년 로베르 2세는 두 아들인 앙리 1세와 로베르, 외드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로베르
2세의 군대는 아들들과 콩스탕스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였고 그후 1031년에 로베르 2세는 사망합니다.
앙리 1세(1031–1060) 는 모후 콩스탕스의 영향력 아래 1027년 공동왕에 즉위했으니 모후의 사주로
동생들과 함께 부왕 로베르 2세에게 봉기를 일으켰고 1031년 로베르 2세가 사망하자 왕위
를 차지했는데... 그의 시대는 프랑스왕국 전체가 지방분권화에 따른 권력 파편화가 극심했던
시기로 앙리 1세는 끊임없는 권력투쟁 속에 직할령 확대를 위해 지방귀족들과 전투를 벌여나갑니다.
29년에 걸친 그의 통치 기간은 부왕 로베르 2세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 왕령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는데, 국왕 직할령을 늘리는 방법은 상속녀와 결혼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뺏거나 돈으로 사는 3가지 방법이 있었으며 또한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드
2세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 왕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동생 로베르에게는 부왕이 획득했던 부르고뉴 공작령을 왕자령으로 하사하여 이제 20살이
넘은 로베르의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였는데, 막냇동생인 외드와 그를 지지하는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에게는 전투에서 패한지라 동생 외드에게 억지로 오를레앙을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1035년 그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다녀오던 중 사망
하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어 일곱 살밖에 안된 아들 기욤 2세가 공작위를 계승했으니 노르망디
의 다른 귀족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기욤 2세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앙리 1세는 기욤 2세를 도와 다른 귀족들의 도발을 제압하였고 1047년에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하지만 이를 계기로 노르망디아 기욤
2세의 권력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앙리 1세는 이번
에는 오히려 기욤 2세를 견제하려는 다른 노르망디 귀족들을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년 공작이 된 노르망디아 공작 기욤 2세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 이었으니
1054년과 1057년 앙리 1세의 군대는 기욤 2세의 군대와 전투를 두차례 치렀으나 결국 대패하고
말았으며, 다른 한편 앙리 1세는 콘라드 2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하인리히 3세
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056년에 사소한 영토 문제를 두고 충돌해 우호적인 관계를 상실합니다.
그의 치세는 지방분권적인 봉건주의적 질서가 정점에 달한 시기니 주군과 종신 사이에 충성과
토지를 매개로 한 쌍무적 계약관계라고 정의될수 있는 봉건주의에서 권력은 토지와 인민
에 대한 실질적인 장악력을 지닌 영주들로 나뉘었고, 끊임없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저해
했으니 앙리 1세는 계속된 전투속에 새로운 영지를 획득했지만 또 다른 영지들을 상실합니다.
영토 획득과 상실, 왕권 강화와 약화로 점철되어 쳇바퀴 돌듯 흘러간 앙리 1세의 치세는
1060년 8월 4일 그가 사망하면서 끝나게 되는데, 앙리 1세는 1051년 키에프 대공
라로슬라프의 딸 안과 재혼했고 안은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으니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중 장남이 필리프 1세였는데 앙리 1세 사망 당시 그는 여덟살에 불과했습니다.
필리프 1세(1060–1108 Philip) 는 1060년 앙리 1세가 사망하자 8살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
했으니, 모후의 섭정을 거쳐 1067년에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한 그는 앙주 및 플랑드르
백작들과 연대하면서 당시 1만 5천으로 영국으로 쳐들어가서 잉글랜드왕이 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의 세력 팽창을 막는데 주력하는 동시에 왕령지 확장도 이룹니다.
필리프 1세는 1092년에는 본처 베르트를 버리고 앙주 백작 부인 베르트라드와 재혼을
하여 교회로 부터 파문을 당했고 1096년 십자군 참가도 금지 당했지만..... 신성
로마제국에 맞서기 위해서 프랑스 왕권의 힘이 필요했던 교황 파스칼리스 2세
는 결국 그의 파문을 취소하고는 그와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으니 이게 정치라?
필리프 1세의 이름은 동유럽의 키에프에서 온 모후 안이 붙여준 것이었는데...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를 통해 그리스 세계에서 유명해진 이 필리프 라는 이름은 이후 동유럽 지역
에 널리 퍼졌고 라틴 기독교 세계에는 바로 필리프 1세가 처음으로 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필리프 1세는 1059년 부왕 앙리 1세가 생존해 있을 당시 공동 왕으로 축성식을
받았으며 이듬해 1060년 앙리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1세는 왕위를 계승했는
데... 겨우 8살에 불과하여 모후 안과 고모부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가 섭정
을 실시했으며 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한 것은 15세가 되던 1067년 부터 였습니다.
그는 로베르 2세나 앙리 1세와 똑같이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적 정치 질서에 직면해 있었지만
부왕과 달리 필리프 1세는 왕령지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가는데 있어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1069년에서 1077년까지 파리 인근의 베르망두아 일부와 백생
지역을 차지했고 1101년에는 막대한 자금으로 부르주 자작령과 기타 여러 영지들을 사들입니다.
확장된 왕령지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관을 고용하는가 하면 아직 세속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여러 교회의 재정에 개입하여 왕실 재정으로 돌리기도 했는데,하지만 후자와 관련해
필리프 1세는 이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교회 개혁 세력의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수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였으니 필리프 1세 섭정기 1066년 노르망디 공작령
의 내분을 모두 평정한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면서 잉글랜드를 공격해 왕위에
올랐으니 잉글랜드에서 ‘정복왕 윌리엄 1세’ 가 된 기욤 2세는 북부 프랑스 지역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필리프 1세는 앙주 백작 풀크 4세,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연대해서 견제 세력
을 형성했는데,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는 필리프 1세와 고종사촌 간이었으며 필리프
1세는 이 로베르 1세의 의붓딸이자 프리슬란트 백작 플로렌스 1세의 딸 베르트와 결혼했습니다.
1076년 필리프 1세는 기욤 2세에게 노르망디 서남쪽 브르타뉴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늘 서쪽을 위협하는 잉글랜드- 노르망디 세력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와 영국에 걸친 기욤 2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1078년 기욤 2세 아들 로베르 2세(1051년 ~ 1134년)가 기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1세는
그를 도와주었고, 1087년 기욤 2세가 사망한 후에 노르망디 공작령을 물려받은 로베르 2세에게는
동생 윌리엄 2세에게 돌아간 잉글랜드 왕위를 빼앗을 것을 부추기기도 했는데... 저 로베르 2세는 1차
십자군전쟁에 참전해서 안티오키아의 십자군 제후들에게 자기가 진짜 영국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092년 필리프 1세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니.... 연인 베르트라드와 결혼하기 위해 필리프
1세는 왕비 베르트와 강제 이혼을 했고, 베르트라드 또한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
풀크 4세 곁을 떠났으니 결국 같은 해 5월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재혼을 감행합니다.
이에 1094년 오툉 공의회에 모인 32명의 주교들은 이들의 결혼이 부당함을 선언하고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에게 파문을 선고했지만 주교들의 파문령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파문이라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견디면서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꿋꿋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 개혁 및 십자군 모집과 관련해 프랑스를 방문한
길에 필리프 1세에게 더욱 강력한 파문 선고를 내렸으며.... 결국 1096년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에 프랑스의 수많은 제후들이 참가했으나
파문을 선고받은 필리프 1세는 성스러운(?) 십자군에 참가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필리프 1세는 자신이 참전해야할 전투에 전처 베르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루이 6세를
파견했고 1098년에는 루이 6세에게 축성식을 거행하도록 했는데... 교황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파스칼리스 2세가 신임 교황이 된 이후였으니,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권에 대항
하기 위해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니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
신성로마제국 황제권에 공동 대응하던 파스칼리스 2세 교황은 1104년에 필리프 1세의 파문을 철회
했으며 1107년에는 프랑스를 방문해 필리프 1세 및 루이 6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니... 13세기
내내 지속될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한 프랑스- 교황권 사이의 동맹이 그 시작을 알리게 된 것으로,
1108년 7월 29일 필리프 1세는 48년 재위끝에 사망하고 왕위는 자연스럽게 루이 6세가 계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