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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朴彭年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1417년인 태종 17에 출생하여 1456년(세조 2), 단종(端宗)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순절(殉絶)한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순천이 본관인 박팽년의 자(字)는 인수(仁搜), 호(號)는 취금헌(醉琴軒)으로 회덕 출신이며, 부친은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朴仲林)이다.
박팽년은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성품은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절대로 실천하여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의관(衣冠)을 벗지 않아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전하고 있다.
명(明)나라의 천순(天順)황제가 오랑케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팽년'은 침실에서 자지 않고 항상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잤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 천자(天子)가 오랑케 나라에 잡혀 있으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 편하게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어찌보면 고지식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이러한 충절심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단종(端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집현전 학사 集賢殿 學士
박팽년(朴彭年)의 성품은 어질고 착했으며 말이 적었으나, 한번 세운 뜻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평하기를, 성삼문(成三問)의 문장은 현란하고, 하위지(河緯地)는 소장(疏章 .. 상소하는 문서)에 능하였으며, 유성원(柳誠源)은 타고난 천재가 있었고, 이개(李豈)는 청렴하고 총명하였으나, 박팽년(朴彭年)이야말로 그 집대성(集大成)이라고 하였다.
집현전은 세종(世宗) 2년에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기관으로, 그 연원은 중국에서 연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 삼국시대에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집현전(集賢殿)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仁宗) 때이다. 인종은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운영하였지만,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조선시대 접어들어서도 정종(定宗) 때 집현전이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되었고, 이것도 곧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 이래 표방하여 온 유교주의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 제도의 확립은 장기간을 요하는 과제이었고, 대명사대관계(對明事大關係) 또한 건국 이래 어려운 과제이었기에 이 두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하여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文風)의 진작을 필요로 하였다.
집현전은 그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世宗)도 그와 같은 원칙에 의해서 육성하였기에 그 특성은 학문적인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 시절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가 되면 다른 관직으로 전직(轉職)됨이 없이,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直提學) 또는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六曺)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장기(長期)연구직인 학사(學士)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수장하도록 하는 한편, 휴가(休暇)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하게 하였으며, 그밖에 여러 가지 특권을 주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해서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집현전은 비록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였던 기관이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집현전이 '사육신 사건'으로 혁파(革破)되었지만, 그 출신들이 세조 ~ 성종대에 현직(顯職)과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집현전 재직 중에 독서와 고제(古制)연구 등으로 쌓은 경륜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상 세종 ~ 성종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한 자들이 거의 집현전 출신이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등과 같은 당시의 제도확립에 공헌한 학자들도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 또한,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여 조선왕조사회의 유교화(儒敎化)에 크게 공헌한 것도 집현전이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특히 세조~성종대의 정치제도, 문화 등 상부(上部) 구조를 이끌어간 사람들이 거의 집현전 출신이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집대성 集大成
박팽년은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 발탁되어 세종(世宗)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박팽년의 나이 17세인 1432년(세종 14)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그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當 ...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부여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받은 박팽년은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학문을 닦아, 문과 중시(文科 重試)에 급제하여 단종 원년에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박팽년은 집현전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 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 최항, 이석형, 정인지,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등 쟁쟁하게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最高)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성삼문(成三問)은 호방하나 시(詩)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河緯地)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였으나 시(詩)를 알지 못하고, 유성원(柳誠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見聞)이 넓지 못하고, 이개(李愷)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詩)에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모든 사람들이 박팽년을 추앙하여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다. 시(詩)를 비롯하여 경학, 문장, 필법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하였던 박팽년이었지만, 참화(慘禍)를 입어서 그의 저술이 전하지는 않는다.
고명신하 顧命臣下
고명(顧命)이란 임금이 임종(臨終) 때에 세자 및 신임하는 대신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남기는 말이다. 구두로 직접 전하기도 하여 이를 유명(遺命) 또는 유훈(遺訓)이라고 하며, 이를 문서로 전할 때는 유조(遺詔), 유교(遺敎)라 한다.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를 고명대신(顧命大臣) 또는 고명지신(顧命之臣)이라 하여 중히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형식화한 장황한 유조(遺詔)를 남기지 않고, 세종, 세조, 인종, 영조, 정조 등이 후계자 문제 또는 후사를 부탁하는 고명을 간단히 남겼다. 특히,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단종(端宗)의 보호를 당부받은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은 고명지신(顧命之臣)을 자임(自任)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은 문종(文宗)으로부터 어린 단종(端宗)을 부탁받았던 '고명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문종(文宗)은 병환이 나자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무릎에 어린 단종(端宗)을 앉히고 손으로그 몸을 어루만지면서 ' 내가 이 아이를 경(卿)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문종(文宗)이 어탑(御榻 .. 왕의 의자)에서 내려와 편히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권하니,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문종(文宗)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방문 위의 인방나무를 뜯어다가 들것을 만들어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立直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그날 밤에 많은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술이 깨어보니, 좋은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온 몸에는 담비털 갖옷이 덮혀 있었다. 문종(文宗)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다. 그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기로 서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박팽년과 성삼문은 목숨으로 단종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신숙주(申淑周)는 세조(世祖)의 편이 되었다.
단종복위운동
문종(文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端宗)은 박팽년을 매우 아꼈다. ' 팽년(彭年)'은 학문을 정밀히 연구하여 강의할 때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이 많으니 당상관이 될 수 있다 ' 고 칭찬하면서, 박팽년을 일약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으로 발탁하였다.
계유정난 癸酉政亂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病弱)한 문종(文宗)이 3년도 못채우고 승하(昇遐)하고,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 단종(端宗).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金宗瑞)와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종과 소허왕후의 둘째 아들)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병약(病弱)하였던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南智)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鄭賁)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金宗瑞)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 '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端宗)의 명이라 속여 중신(重臣)들을 소집한 후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軍)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寺)하였다.
1455년(단종 2)에 드디어 수양대군이 단종을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박팽년(朴彭年)은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였다. 이때 성삼문(成三問)이 말리며, '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갔지만 아직 상왕(上王 .. 단종)이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아야 장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도모하다가 일지 못한다면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죽음은 나라에 무익(無益)할 뿐이다 '고 하니, 박팽년이 울분을 참고 성삼문의 말을 따랐다.
단종복위운동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 갔다. 그는 조정에 보고를 할 때 '신(臣)'이라 지칭하지 않고 단지 ' 아무 관직의 아무개'라고만 적었다. 세조(世祖)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박팽년은 이듬해 형조참판(刑曺參判)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 그는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 성승(成勝) 및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李豈), 유성원(柳誠源), 김질(金질),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 6월 1일, 세조(世祖)가 상왕(上王)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擧事日)로 정한 후, 와의 오위역(護衛役)인 별운검(別雲劍)으로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武臣)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모의하였다.
모의 결의는 하였으나, 마침 그날 세조(世祖)가 연회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雲劍)을 그만두도록 하였고, 세자(世子) 또한 병 때문에 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응부(兪應孚)가 거사를 강행하려 하자, 박팽년과 성삼문이 '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雲劍)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成敗)를 알 수없게 될 것이니, 다른 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라며 유응부를 말렸다.
그러나 유응부(兪應孚)는 ' 일이란 신속해야 하는데 만약 지체한다면 누설될까 두렵소. 지금 세자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측근들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오늘 만약 이들을 모두 죽이고 상왕(上王)을 호위하여 호령한다면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될 것이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과 성삼문이 ' 만전의 계책이 아닙니다 '고 강하게 반대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이에 거사(擧事)는 세조가 친히 거동하는 관가(官稼 ..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하여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실패 그리고 죽음
하지만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에 참여하였던 김질(金질)이 그의 장인(丈人)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世祖)에게 밀고(密告)함으로써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이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死六臣)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고, 세조(世祖)는 이 사건 직후 유신(儒臣)들의 중심 기관인 집현전(集賢殿)을 폐지하고, 경연(經筵)을 중지하였으며 새로운 유신(儒臣)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김질'은 이 공로로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가 되고, 이어 죄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여졌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1468년 우의정 그리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김질'은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 .. 어린 왕을 보필하기 위한 원로로 구성된 재상권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하) 세력을 형성하였다.
거사가 훗날로 미루어진 것은 불행이었다.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자신의 장인(丈人)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달려가 ' 오늘 세자가 나오지 않았고, 특흔 운검(雲劍)을 그만두도록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먼저 고발하여 우리만이라도 요행히 살아나는 편이 낫겠습니다 '고 하였다. 이들의 고발을 들은 세조(世祖)는 '김질'과 '정창손'을 용서하고 박팽년 등 모의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當代의 亂臣, 後世의 忠臣
박팽년은 성삼문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鞫問)을 받았는데, 이미 성삼문(成三門)이 잡혀가 모의(謀議)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당당하게 시인한 상황에서 세조(世祖)가 박팽년의 능력을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歸附)해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諭示)하였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저 '나으리'라고 부를 뿐이었다.
이 '나으리'라는 말에 약이 오른 세조(世祖)가 '네가 일전에 이미 신하(臣下)라고 말한 바 있으니, 지금 신하가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라고 하자, 박팽년은 ' 저는 상왕(上王)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1년 동안에 장계와(狀啓)와 문서에 스스로 신하(臣下)라고 일컬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 내용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신하(臣下)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박팽년은 세조(世祖)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는 반역자(叛逆者)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한 박팽년은 죽기 전에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 '는 유언(遺言)을 남겼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당시 금부랑(禁府郞) 김명중(金命重)이 ' 어찌하여 이러한 화(禍)를 스스로 자초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박팽년은 '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대답함으로써 어린 단종(端宗)을 지켜달라는 문종(文宗)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 자신의 마음의 일단을 드러내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向)한 일편담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어느날 사육신(死六臣)들이 옥중에서 고문(拷問)을 당하고 있을 때, 세조(世祖)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면서 옛날 태종(太宗)이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에게 불러준 '하여가(何如歌)'를 읊어 시험하자, 성삼문(成三問)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李塏)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는데, 그 내용은 위와 아래와 같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金)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玉)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님마다 좇으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 박팽년의 생각이었고, 겨룩 굴복하지 않는 사육신의 충절(忠節)을 본 세조(世祖)는 이들을 가리켜 ' 당대(當代)의 난신(亂臣)이요, 후세(後世)의 충신(忠臣)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팽년의 죽음
박팽년은 심한 고문(拷問)으로 그달 7일에 옥중(獄中)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마든 모의자(謀議者)들도 모두 능지처사(陵遲處寺)를 당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陵遲處寺)되었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 순(珣), 분(奮) 등이 모두 처형되어 그야말로 삼대(三代)가 참화(慘禍)를 입었으며, 어머니와 처(妻) 그리고 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서 공신(功臣)들의 노비(奴婢)로 끌려갔다.
박팽년(朴彭年)의 묘(墓)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死六臣)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묘(墓)에는 그저 ' 박씨지묘(朴氏之墓) '라는 글만 표석(표석)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許滴)은 '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 기슭(노량진)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 ' 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일 박팽년은 장릉(莊陵 ..단종 왕릉)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고,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員) 그리고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祭享)되었으며, 1691년인 숙종 17년에 복권되었다가, 영조(英祖) 37년인 1758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아 이조판서(吏曺判書)가 추증되었고, ' 충정(忠正) '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정조(正祖) 16년인 1791년에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유일하게 후손을 남기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시절의 실학자 '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는 자신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다음의 일화를 기록하면서, '평소 긴 수염을 늘어뜨리며 높은 관(冠)을 쓰고 대장부로 자처하다가도 어려움에 다다라서는 이 여종(女從)만도 못한 자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 내가 여기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덕(德)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며 그녀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팽년이 심한 고문(拷問)으로 옥사(獄死)할 때 그의 아들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친정인 대구(大邱)로 내려간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박팽년의 여종(女從) 또한 그 무렵 임신 중이었는데, 이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을 낳는다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이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딸을 낳은 여종이 아기를 맞바꾸고는 이름을 '박비(朴婢)'라 짓고 길렀다. 박비(朴婢)가 장성한 뒤에 경상감사(慶尙監事)로 부임한 이모부(姨母父) 이극균(李克均)을 만나게 되었다. 박비(朴婢)롤 본 '이극균'은 눈물을 흘리며 '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自首)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자수를 권하였다. 이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비(婢)'에서 '일산(壹珊)'으로 고치게 하였다.
유허비 遺墟碑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난 날 박팽년이 살던 집터에 세운 유허비(遺墟碑)이다. 1668년(헌종 9) 유림(儒林)들이 그의 유허(遺墟)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박팽년의 유허(遺墟)에 주춧돌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161-1에 자리하고 있다. 유허비란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비(碑)이다.
비문(碑文)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1672년 비각(碑閣)을 지어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6대손 박상동(朴尙東)이 중건하였다. 이곳은 박팽년이 살았던 집터이다. 박팽년은 1417년 회덕면 흥농촌 왕대벌(지금의 대전광역시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육신사 六臣祠
육신사(六臣祠)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인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처음에는 박팽년만이 그의 후손에 의하여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玄孫) 계창(啓昌)이 박팽년의 기일(忌日)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位)의 향사도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육신사(六臣祠)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해 오다가 1691년, 낙빈서원(洛濱書院)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사(洛濱祠)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