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날땐 오래 전부터 꿈꾸던 곳을 목표로 정하고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준비해서 떠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느닷없이 그냥 짐꾸려 떠나는 경우도 있다. 국내 여행은 주로 후자에 속하는 여행을 하는 편이지만, 해외여행은 사실 그렇게 쉬이 떠나기는 쉽지않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후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여행보다 오랜동안 꿈꾸워왔던 여행일 지도 모르겠다. 단지 목표를 확실히 하지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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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좌를 마악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클래식 동호회에서 만난 수산나자매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백화점내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가물 가물 지중해 쿠르즈 여행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엉?? 쿠르즈 여행이라고?? 행선지가..... " "로마, 시칠리,튜니스,마요르카,바로셀로나, 마르세이유......"
"아!! 가고싶다~ 갈까?? 언제??" "응?? 24일 떠난다고??"
맘은 벌써 여행지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문득 아들녀석 치과 교정수술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아!! 안타깝다~ 그래도 쉬이 포기할 수 없어 집에가서 다시 전화하겠노라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선은 아들녀석에게 양해를 구해야했고 병원에도 연락해서 날짜를 옮길 수 있는 지 확인해 봐야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 레슨 시간은 되었고 수업을 하면서는 그 순간 여행은 까마득히 잊었다.
그렇게 어느듯 시간이 흘러 다시 연락을 취했을때는 여행모집을 마감친다는 시간이 불과 10분전 이었다. "그래 가는거야~ 까짓거...." 곧바로 예술의 전당으로 공연을 가야했기에 문방구까지 나가서 팩스로 여권사본을 보내기엔 시간이 여의치않았다. 낼 아침에 보내겠다고 하니...안된다고...오늘까지 항공사에 서류가 들어가야한다고.... "헐~~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는다는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렇게 그 어떤 여행보다 가기 힘든 쿠르즈 여행을 가장 순식간에 결정해서 완결짓기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은 초특급 스펙터클한 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아~~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여행이 그렇게 쉬이 호락호락하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뭔일이 그렇게도 많은 지 이 열흘간의 시간을 빼내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부터 치뤄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우선은 다음주에 배송될 김장거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다행히 한 주 앞당겨 배송해 주겠다고 한다. 아!! 그러나 또 이번 주엔 왜 그리도 공연이 꽉 들어차 있단 말인가~ 당장 김장거리 시장볼 시간 조차 여의치 않았다. 당장 치밀한 여행가기 작전 A4용지 앞뒤로 빼곡하게 세워 적은 뒤 하나 하나 실천해나갔다. 이렇게 김장거리 시장부터 준비, 완료까지 3박4일에 걸쳐 대 장정을 끝내고, 레슨, 봉사날짜 연기하고, 그 사이 소속된 산악회 정기 산행 다녀오고, 식구들 먹을 거리 챙겨다 놓고,가방싸기... 이제 마지막 순간 그 가방싸기가 또 문제였다. 가방하나에 파티의상에 배에서 평상복처럼 입을 옷에 투어시 입을 옷...우산, 몇켤레의 신발...파티때 들을 클러치백까지...
오옷~~~ 짐싸는데 이골이 나 있는 나지만 이번처럼 짐싸기가 힘들었을까.... ㅎㅎ 그래도 신바람이 난다. 새로운 세계...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의 잠시 떠날 생각을 하니...
모스크바 신청사....
<로마 공항에 도착하다. >
이렇게 이번 여행도 여지없이 밤샘을 꼬박하고 공항버스에 올랐다. 아니, 하룻밤 샌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일주일 내내 하루 2시간여 밖에는 잠을 못잔 채 여행길에 오른것이다. 그리곤 곯아 떨어졌다.
사람들이 내리는 소리에 깨서 비몽사몽간에 인천공항에 내렸다. 그러다 보니 뒤이어 내려온 기사 아저씨 손엔 내가 떨어뜨린 핸드폰이 들려있었다.헐~~ 에공 정신차려야지~
시간이 일러 약속장소에 가기전 핸드폰 로밍센터에도 들리고 서점에도 들려서 책을 두어권 산 뒤 모임장소로 갔다.
<호텔방 창문으로 내다 본 아침풍경....커다란 야자나무 뒷편으로 안개가 한가득 피어올랐다. 날이 훤히 밝아오기 전까진 그곳이 호수인 줄 알았다. 너무나 근사한 정경을 잠시 상상...>
이번 여행에서 함께 떠나는 총인원은 무려 120여명.... 아무리 세파트로 나누워서 3명의 가이드와 사장님까지 합세해 인솔한다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니 짐을 부치는 수속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야말로 우린 초를 다투며 달려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아니, 사람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수속에서는 단체여행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당 부칠 수 있는 짐의 무게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20kg으로 제한했기때문에 그 자리에서 짐을 풀어 다시 꾸려야했기 때문이었다.
암튼...나 역시 늘상 그렇게 딱 한가방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2kg오버해서 다시 꾸려야만 했다.
<로마 시내 투어 들어갔다. 버스안에서 몇컷 잡아보다>
카메라가방뿐이었는데... 다행히 곁에 있던 가이드님의 비닐가방에 얼른 옮겨닮고 게이트로 가는 그 짧은 순간에 얼른 가방 하나 사서 짐을 옮기는 헤프닝을 겪었다.
사실... 카메라 가방과 렌즈를 하나 보려고 했었는데....ㅉㅉ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에잇~ 자리가 가운데 인데다가 그중에서도 또 한가운데다. 창가자리가 좋은데....
아무래도 피곤에 절어 금새 곯아 떨어질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창밖풍경을 볼 수 없다는 섭섭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옆자리 자매님하고는 금새 친해졌다. 얼마나 귀엽고 말을 재밌게 하는 지... 아마 처음 본 사람들은 함께 여행 떠난 일행인줄 알것 같았다. 나와는 완전 반대로 몸에 좋다는건 다먹고 전신 마사지까지 받으며 여행 떠나기 전 몸 만들기를 완벽하게 하고 온...
이렇게 수다를 떨다보니, 금새 곯아 떨어질것 같았던 나의 몸은 이 젊은 언니의 흥분된 에너지를 받아서일까.... 피곤한줄 모르고 여행의 설렘에 빠져 비행을 할 수 있었다.
한바탕 자리를 떠 운동을 하고와서는 잠깐 잠이 들었을까~~ 밥을 먹기위해 켜진 불빛에 눈을 떴다. 이제 모스크바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다.
아주 오래 전에 딸과 터키여행을 떠날 때 이곳 모스크바를 경유했었는데, 모스코바 공항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있었다.
어둡고 칙칙하고 의자도 제대로 없었던 공항에서 우선 맨 위 사진 처럼 멋드러진 최첨단 신청사가 생긴것이었고... 조명이 너무나 밝아졌다는 것....너무나 촌스럽고 칙칙했던 인테리어들이 완전 서구화 되었다는 것....ㅎㅎ 와아~ 그런데 구청사에서 신청사까지 가는 거리가 완전 장난 아니었다. 트램을 타고도 한참을 달려가야만 할것같은 머나먼 거리... 오랜시간을 기다릴줄 알았는데, 워낙에 오랜 시간을 걸어와서일까....ㅎㅎ 금새 환승 비행기에 올랐다.
사람은 참으로 새로운 환경에 금새 익숙해진다. 워낙 오랜 시간 비행을 한 터라 환승행 비행기에서의 몇시간은 순식간에 지나버린것 같다. 드디어 로마 항공에 도착을 했다. 짐찾는 곳 옆 벽면 전체를 메우고 있는 콜롯세움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옛날 로마 여행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이번 여행의 설렘에 한껏 부푼다.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구경하기 위해서 버스에서 내리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도착하다>
이번 여행에서 딱 하루 호텔에서 자는데 그게 오늘 로마에서다.
오늘 처음 만난 룸메이트는 원래 배정되었던 분보다는 훨씬 젊은분이셨다. 혼자 오신 분은 아니고, 그룹에서 함께 오셨는데 둘씩 짝을 짓다보니 나랑 한방을 쓰게 된 인연....
나는 항상 이렇듯 새로운 인연이 반갑다. 나이가 어떻든 그건 상관이 없다. 나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그래서 정말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삶을 알아가고 이해하게 되는...더불어 나의 삶도 되새겨 볼 수 있는 이 만남이 나는 너무 설렌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분과 함께 하니 마치 큰언니를 만난거 마냥 맘이 편안해져 온다. 물론 다른 여행에서 처럼 완전히 혼자 떠나온 여행은 아니고 언니나 나나 다른 일행이 있으니 이 언니랑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지는 모르겠으나 잠을 함께 자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보통 인연은 아닌것이다.
암튼....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기인 시간을 피곤에 절어 이곳까지 왔지만.. 그래도 피곤함 보다는 편안한게 좋기만 하다.
슬슬 방랑끼가 작동되는 순간인가 보다.ㅎㅎ
아침 일찍 일어나 커튼을 재쳐보니 커다란 야자나무 뒷편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고 있음이 꿈결속을 헤메게 만든다.
"오옷~ 저 앞이 호수가 있나봐요~ 어쩜 저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고 있을까요~"
난 이 뜻밖의 풍경에 룸메이트 언니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한참을 카메라를 들이밀며 셔터를 누르는 사이 어느새 안개는 걷히고 눈앞에 드러난 것은 호수가 아닌 그냥 평지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마치 낚시터에 피어 오르는 새벽 안개 같았다니.... 어떻게 물도 없는데...저 자리만 그렇게 안개가 피어 오를 수 있지??
핸폰에 로밍된 시계가 잘못되어 1시간 빠른 다른 팀 식사 시간에 우린 아침 식사를 했다. 덕분에 첫날 투어 시작이 아주 여유로웠다.
<성 베드로 광장의 콜로네이드>
<성 베드로 광장의 콜로네이드- 어느 한 지점에 서서 보면 기둥 4개가 겹쳐보이는데 이는 이 광장을 설계한 건축가가 모든 기둥이 겹쳐서 하나로 보이게 설계를 했다고 한다. 기둥 위에는 모두 142명의 성인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와 자코모 델라 포르타
미켈란젤로는 이전에 계획되었던 여러 가지 설계안들을 모두 참고하여 돔을 재설계했다. 미켈란젤로의 돔은 피렌체의 것처럼 벽돌로 된 두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으며, 바깥쪽의 것은 16개의 석조 서까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피렌체의 것보다 두 배나 많았으나 상갈로의 설계안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브라만테와 상갈로의 설계안에서처럼 돔은 원통형 부분 위에 있는 기둥들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브라만테가 계획한 원형으로 둘러싼 기둥들이나 상갈로가 계획한 아케이드는 각각 높이가 15m인 16쌍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로 바뀌었으며 이 기둥들은 아치로 연결되었다. 시각적으로 이 기둥들은 각각의 서까래에 대한 버팀 벽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도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돔이 피렌체 대성당의 것과 같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달걀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판테온의 것과 같은 반구형 돔보다 바깥으로 향하는 힘을 덜 가할 수 있었다. 판테온은 비록 버팀 벽에 의해 지지가 되지 않았으나 둥근 벽 위에 뻗치는 무거운 구조 때문에 아래로 향한 힘에 직면하고 있었다.
돔의 달걀 모양 윤곽은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학문적 논의의 주제였다. 미켈란젤로가 돔 아래의 원통형 부분을 완성한 채로 1564년 세상을 떠났으며, 브라만테의 기둥들은 원래 설계된 것보다 훨씬 부피가 커서 각각의 폭이 18m에 이르렀다. 교황 비오 5세는 미켈란젤로가 죽자 그의 조수였던 자코모 다 비뇰라를 조르조 바사리와 함께 감리로 임명하여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정확히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계속하여 대성전의 건설 작업이 이어질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의도에 대한 비뇰라의 지식에도, 큰 진전은 없었다. 1585년 열성적인 교황 식스토 5세가 작업 책임자로 자코모 델라 포르타를 임명하였고, 도메니코 폰타나는 그의 조수가 되었다. 식스토 5세의 5년간의 임기 동안에는 상당한 속도로 건설 작업이 진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돔의 초기 도면들과 상세 도면을 포함한 얼마 안 되는 수의 도면을 남겼다. 또한, 1569년 스테판 뒤 페라크의 작품인 상세한 판화가 출판되었는데, 그는 여기에 미켈란젤로의 최종 설계안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임자였던 상갈로처럼 미켈란젤로 역시 목재로 된 건물의 큰 모형을 만들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이 모형을 여러 방법으로 고쳐 보고, 여기서 그가 만든 변경사항을 설계안에 적용하였다. 변경사항 대부분은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식스토 5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돔의 원통형 부분의 위에 있는 꽃 장식 위에 사자 머리를 추가한다거나, 정탑의 꼭대기에 상갈로가 이전에 제안한 것과 같은 장식 고리를 추가하는 것 등이었다. 델라 포르타나 미켈란젤로가 건물 모형에 만든 주된 변화는 안쪽의 돔 위로 높이 바깥쪽 돔을 올리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면에는 반구 형태가 아닌 그의 초기 발상이 나타난 달걀 형태의 돔이 그려져 있다. 판화에는 반구형의 돔이 그려져 있으나, 아마 이는 판화가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모형의 윤곽은 판화의 것에 비하면 달걀 형태에 가까우나, 완성된 돔에 비하면 덜 가깝다. 미켈란젤로가 임종할 무렵 돔을 더욱 뾰족한 형태로 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제임스 리스밀른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변동사항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교황 식스토 5세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그가 수용할 수 있는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았다고 언급했다. 헬렌 가드너는 미켈란젤로가 둥글게 늘어선 거대한 벽기둥들의 동적인 수직적 요소와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안정된 돔의 균형을 맞추려고 아랫부분의 반구형 돔을 수정했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가드너는 또한 “(미켈란젤로에 의해) 건축물의 조각은 중층을 두어 땅에서 위로 확장하고 원통형 벽과 그 위에 있는 돔으로 나아가, 전체 건물은 기반부에서 최고점까지 단일한 개체로 함께 통합된다.”라고 언급했다. 건물을 둘러싸는 벽 돌림띠를 통해 건물이 조각되고 통합되며, 조화된다고 하는 건물에 대한 의식으로 미냐카는 현재의 달걀형의 윤곽이 결정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의 초기(와 후기) 개념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조각가이면서 건축가인 미켈란젤로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전의 설계안들을 가지고 각 설계안의 윤곽을 집약하여 건물이 찰흙 덩어리인 것처럼 다루었다. 건물의 각도를 직선으로 하고 건물이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을 억제하려는 시각적인 압력 때문에 대성전의 돔은 “확실히” 위를 향해 상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설명이 정확한 것이라면, 돔의 윤곽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생각했던 것처럼 구조적인 해결책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시각적인 긴장과 압축에 대한 집적된 설계안 일부이다. 어떤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은 피렌체 대성당의 고딕 양식의 윤곽으로 되돌아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다른 면에서는 1500년대의 다른 어떤 건물들보다도 바로크 건축의 형상을 미리 예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완성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에 대성전의 중앙 돔을 완공하였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폰타나가 채광창을 완성한 것을 보고 식스토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명각을 돔 안쪽 틈에 새기도록 하였다. 다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대성전 안에 십자가를 세운 날을 기념하고자 온종일 축제를 벌이고, 모든 도시의 성당들에게 종을 울리라고 명령하였다. 십자가의 양팔 부분은 두 개의 납 용기로, 한쪽에는 성 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고 있다. 18세기 중반, 돔에 균열이 생기자 붕괴를 막고자 두 외관 사이에 네 개의 쇠사슬을 고리처럼 설치하였다. 여러 시대에 걸쳐 열 개의 쇠사슬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최초는 미켈란젤로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에 한 예방조치처럼 고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돔 내부 둘레에는 2m(6.5ft) 짜리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밑쪽의 채광창에는 다음과 같은 명각이 있다:
오늘 투어는 '치비타베키아항'에서 쿠르즈 배를 타기 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로마를 투어하는 거라서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과 트레비분수, 진실의 입, 콜롯세움 정도다. 로마 여행을 예전에 한 나로서는 오히려 알기에 로마에서의 이 짧은 투어가 여간 안타깝지 않다.
호텔에서 얼마 걸리지 않아 바티칸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도착을 했다. 광장엔 생각보다 관광객들이 그리 많아보이진 않았다.
<꼭대기의 인물상들은 예수를 비롯한 12사도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聖省)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聖)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全盛期)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헌당식(獻堂式)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G.L.베르니니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C.마데르나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왔다. 참으로 이상하지?? 옛날에 왔을때는 너무 화려해서 과연 이곳에서 기도가 될까....그런 분심마저 들었었는데, 어찌된게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처음왔을때 그 충격이 지금 내 뇌리에 현실보다도 훨씬 더 크게 자리잡고 있나보다.
이번엔 조금은 차분한 맘으로 이 거룩한 성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 무수한 예술작품들이 얼핏보기엔 유화같지만 모두 모자이크라고 하니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성전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과연 이 어마어마한 거룩한 성전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만 지어진걸까....생각하게 된다. 아마 어느것 하나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닿지않은 곳이 없으리라!
그렇겠지??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에도 주님의 손길이 닿지않은 곳이 없거늘....
피에타 [Pieta]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조각가·화가·건축가인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 가운데 하나.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지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1598.12.7~1680.11.28]
<교황 요한 23세의 유해> 대부분의 묘소가 지하에 있는것과는 달리 이분의 묘소는 성당내부에 있다. 사후 무덤을 다시 열 일이 있었는데,열어보니 시신이 전혀 썩지않고 보존되어 있어 기적이라 하여 밀납으로 시신의 표면을 처리 한 후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요한 23세는 13세기의 대립교황이었던 요한 23세와는 다른 분으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고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사회의 문제 등에 대해 메시지를 남겼고,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신 분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의 청동상이 바로 베드로 성인이다. 베드로 성인의 발을 만지거나 키스하며 기도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관광객들이 이분의 발을 만지는 바람에 한쪽 발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긴 줄이 형성되었지만 나도 축복 받을려고 ....ㅎㅎ>
헨델 오라토리오 부활 HWV 47 George Frederick Handel (1685 -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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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날들 원문보기 글쓴이: 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