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마지막 주인 오늘은 해외원조 주일입니다. 저는 해외원조 주일이 되면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 해외원조 주일은 몇 년 전에는 사회복지 주일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 있었던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선언’이 전해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부자들 얘기를 잠깐 나눠보고 싶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저희 친한 신부들끼리 모이면 가끔씩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당 신축기금이 됐든, 교무금이 됐든, 성당에 돈 내는 일에 있어서, 참 이상하게도 돈 많은 사람이 뭉텅이 돈을 내는 것을 거의 보기 어렵다는 것이죠. 오히려 전혀 그럴 형편이 아닌 분들이 오랫동안 부어왔던 적금을 탔다거나, 자식들이 해외관광 가시라고 준 ‘소중한 돈’을 내주시는 건 봤어도, 살림 한 귀퉁이 허물어봤자 표시도 안 날 정도로 많이 가진 분들이 그냥 조건 없이 거금을 내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라는 얘기에 대다수 신부들은 공감합니다.
참 이상하고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돈이 많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남에게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가지면 가질수록 더 인색해지고, 오히려 가진 게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그 마지막 하나까지 빼앗아 자기 것 10개를 채우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가령 거대 자본, 재벌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장악해서 영세 자영업자들의 돈까지 빼앗아 가려는 모습이 그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재물이 쌓일수록 비례해서 그에 따른 德도 함께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왜 사람은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일까요? 원인은 단순합니다. 나이를 먹고 재산이 늘어나면 ‘지킬 것’이 점점 늘어나고, 생각도 많아지고, 그러니 마음 안에 이상한 것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행복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가 점점 대형화되고, 중산층화 되어 간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실제로 신자분포를 보면 지방 시골보다는 대도시 중심, 또 대도시에서도 경제 수준이 높은 강남과 같은 지역의 신자 비율은 20~25%를 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찰을 해야 합니다. 중산층 이상, 즉 웬만큼 먹고 살 만큼 여유가 있으면 ‘주변 사람’에 대해 관심도 갖고, 베풀기도 하고, 나누면서 배려를 해야 할 텐데, 그런데 어찌 된 게 오히려 더 ‘이기적’이 되는 경향이 짙습니다. 교회 내에도 힘들고 소외된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본당의 모든 프로그램도 말귀 잘 알아듣고, 아무래도 먹고 사는 문제로 절박하지 않은 여유가 있는 신자들이 주도하고, 모든 프로그램이 이런 이들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즉 일부러 그런 건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발들여 놓기가 어려운 분위기로 흐르고, 그러다 보니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 밖으로 밀려나고, 대신 부자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장악하는 영적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것도 물 흐름과 똑같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불교용어 중에 ‘회향’(廻向)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자기가 닦은 공덕을 다른 중생이나 세상으로 되돌려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또 옛날 개그맨 전유성은 우리 속담을 살짝 비틀어서 “배워서 남 주자”는 표어를 지어내기도 했습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내 배만을 채우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배운 만큼, 더 많이 번 만큼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우리 교회의 중산층화는 엄연한 현실이기에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또 나이가 많을수록 해야 할 의무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싶습니다. 소명과 희생은 없고, 특권만 누리려고 한다면 그건 진정한 부자도, 진정한 어른도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