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산책
신노우
아내는 오래 다니던 직장을 지난 가을에 그만 둔 이후 집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운전을 배우든지 취미생활을 하라고 권했지만 도무지 현관문을 밀치고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어느 결에 우수, 경칩이 봄까치 울음같이 지나갔다. 가까이 사는 친구랑 들녘으로 봄 향기라도 맡으러 가보라고 했지만 시큰둥하다. 초등학교 모임에 나오라고 전화통이 몸살을 앓아도 핑계가 많다. 그저 가사일 말고는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에 눈을 꽂을 뿐이다.
궁리 끝에 휴일 아침에 산책을 함께 가자고 지난밤부터 뜸을 들였다. 하지만 옷을 다 갈아입고 재촉을 해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예정시간을 한 시간 늦춰서야 겨우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새벽이슬이 둥글둥글 머위 잎 새 위에서 구르기 연습이 한창이다.
산책로를 접어드니 박태기나무가 보랏빛 꽃숭어리를 아낌없이 내밀었다. 가녀린 빈가지위에 눈꽃을 소담스럽게 피운 조팝나무가 밝은 손짓을 한다. 연보라색 수수꽃다리 향기는 정신이 아득하도록 전신을 휘감는다.
연못가 창포는 하루가 다르게 기운 센 사내같이 하늘을 쑥쑥 찌르며 힘이 넘친다. 눈길을 돌리자 붉은 철쭉이 신혼의 부부처럼 열정으로 활활 탄다. 발목을 부여잡고 두텁고 동그란 입술을 쏘옥 내밀고는 입맞춤 해달라고 보채며 방글거리는 수선화도 귀엽다. 물줄기 쏟아지는 분수가로 비둘기도 아침 산책을 나와 구구거린다. 잠시 딴 생각으로 걷는데 옆 산에서는 장끼가 까투리에게 아침 데이트를 신청하느라 우렁차다. 갈래갈래 잎사귀가 조화로운 상사화는 무럭무럭 솟아올라 임 마중 길을 나섰다.
며느리 밥풀꽃, 할미꽃이 의좋게 이웃을 하였다. 며느리 밥풀꽃에 대해 슬픈 전설이 있다. 며느리가 배가 하도 고파서 시어머니 몰래 밥을 먹다가 그만 들켜버렸다. 입가에는 밥풀을 묻은 채, 그날 이후 구박을 받다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 죽은 자리에서 핀 꽃이 바로 며느리 밥풀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할미꽃의 전설 또한 슬프다. 두 손녀딸과 살던 할머니가 첫째손녀딸의 냉대에 못 이겨 둘째손녀딸 집으로 가다가 그만 쓰러져 죽은 자리에 핀 꽃이 할미꽃이란다.
모롱이를 도는데 흰 제비꽃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무리지어 하늘바라기로 핀 청초한 매발톱꽃도 눈길을 달라고 조른다. 바위틈바구니에서도 층층이 흰 꽃을 소담스럽게 토해 낸 돌담풍의 강한 생명력에 먼 산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각시붓꽃은 하늘 바람도 꿈나라로 간 아득한 시간에 피었구나. 가녀린 작은 보랏빛 얼굴이 수줍어서 꽃잎을 다 터뜨리지 못하였네. 볼우물엔 하얀 연지분 바르고 주홍색으로 입술 곱게 칠하였다. 그리고는 촉촉한 찬이슬 축복 받으며 하늘바라기로 몰래 피어서 정이 간다.
한 세월을 짊어진 분재원에 들어섰다. 두텁고 터실 한 껍질로 중무장을 한 곧은 해송과 알몸으로 꼬며 뒤틀린 진백이 두 인생처럼 대조를 이룬다. 얼룩배기로 용트림하는 모과, 강한 자기주장으로 송곳 같은 뾰족뾰족한 잎을 내밀고 있는 소사, 느릅나무가 돋보인다. 저 큰 둥치가 사람의 욕심에 길들여져 작은 용기에서 자리를 틀고 참고 견디다보니 늙은이의 나이처럼 주름이 졌다. 하지만 그 고태가 자존심으로 넘쳐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도 화분 속에 든 분재와 같이 고비 고비마다 아내가 인내하는 삶을 살았기에 오늘이 있었을 것이다.
걷노라니 연둣빛으로 채색되어 가는 우람한 느티나무고목을 만났다. 한 여름날에 깊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시원하게 쉬었다가 갈 수 있듯, 배려와 베풂의 삶이 가슴바닥에 자리한다.
죽림원에 도착했다. 살면서 때로는 계절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푸르고 대줄기 같은 곧은 마음도 필요하리라. 나의 분주함을 흔들림 없이 묵묵히 한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새벽이슬을 뒤집어 쓴 두릅과 음나무 순이 아침 식욕을 돋운다. 한참을 걸어 돌아서 나오는데 무릎까지 자란 풋보리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야릇한 마음이 일어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아본다. 조금 쉬었다 가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산책을 끝낸 노부부가 벤치에서 한가롭다. “당신은 율무지?” 노신사가 커피자판기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살갑다.
지금껏 함께 살아오면서 둘만이 홀가분하게 시간을 가져 본적이 몇 번인가. 아내는 미리 계획되지 않은 동행을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저 책읽기를 즐겨하는 정적인 타입이다. 그에 반해 나는 매일 새벽운동에다 툭하면 기행에 나선다. 휴일 자투리시간이라도 나면 야생화가 있는 곳으로, 문화예술회관으로, 앞산계곡으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린다. 오늘 봄꽃 속의 나들이처럼 이제 부부가 함께 자연 속에서 눈길을 맞추고 싶다.
“당신 나오길 잘했지.”
“그렇네요.”
봄꽃에 취한 아내의 눈빛이 맑다. (2004. 8. 4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