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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 너희와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을 죽인 자들이다!
“즐거운 학문”에서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1)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獨)는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이 주제는 너무 무거운 주제이고 난해한 철학적 화두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신(神)은 능력과 힘을 행사하는 어떤 신적인 존재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홍수나 지진 전염병 같은 인명의 대량 살상이 일어났을 때 그 이전에는 신(神)의 노여움과 심판으로 알아 신(神)에게 굴종하였으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 원인을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규명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힘으로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신(神)은 죽었다는 것이다.
니체(1844—1900)는 중세 천년을 넘게 인간의 삶에 의미와 목표를 부여했든 기독교적 신(神) 중심의 최고가치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 도전을 받고 붕괴됨으로서 허무주의가 지배하게 된 상태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출생한 니체는 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동생까지도 사망하여 고아로 어머니와 이모들 사이에 자라났다. 25세에 스위스 바젤대학 교수가 될 만큼 천재 중의 천재였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절정에 이른 19세기는 지리상의 발견 등으로 인한 신대륙의 부흥과 과학의 발달로 그 이전까지 절대 진리로 기득권을 자랑하던 특히 기독교적인 가치 체계가 도전받기 시작한 시기이다.
1760-1850년 어간에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 기계의 개량과 증기기관차의 발명으로 일어난 산업 혁명이 전 유럽국가로 확장되면서 수공업의 소량 생산에 그치든 것이 기계 설비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전환되면서 낭비적이라 할 만큼 풍요로운 물질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량생산으로 농노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가 무너지고 풍성한 물질적 부유를 자랑하는.... 전에는 없었던 상권이 발달하여 신흥 권력층이 태동하고 신(神)이 중심이었던 사회가 인간중심의 세계로 급작스럽게 바뀌어 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때맞추어 1848년에 마르크스(獨)는 물질에서 인간의 문화가 발전한다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고 1856년에 출생한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인 프로이드(오스트리아)는 인간의 활동 능력은 무의식과 본능에서 원천적인 힘이 나온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천년이 넘게 특히 유럽 사회를 이끌어 온 형이상학적인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 신(神)의 세계가 밀려나고 물질이 앞선다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도 의식이 먼저가 아니고 무의식과 본능이 먼저라는 획기적인 과학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 체계가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그 혼란을 부채질하여 기름을 부은 것은 찰스 다윈(영국)이다. 다윈은 1859년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자연선택 또는 생존 경쟁에서의 적자생존에 의한 종의 기원”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을 주장하였고 창조론에 맞서는 진화론은 신(神)적 세계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기존 질서가 파괴되는 혼돈과 이념적인 혼란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시기에 니체는 그 당시까지 유럽을 지배하였든 신(神) 중심의 권위와 그 가치 체제가 무너졌다는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니체가 활동한 19세기는 시대의 변혁기였고 그 시대의 정신을 니체는 온몸으로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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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니체 이야기를 끝맺어야 하지만 초인(over man)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니체의 초인 이야기가 성경의 내용과 상당한 함수관계가 있기에 다시 니체로 돌아가 간략하게나마 초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합니다. (물론 천재 니체의 사유세계를 그대로 옮기기에는 미흡함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19세기 유럽에서 신(神) 중심의 가치관이 폭파당하고 신이 죽었기 때문에 기댈 언덕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신이 죽은 후에 찾아온 허무주의에 빠진 세상을 향하여......… 니체는 초인이 되라고 외친 것입니다.
신이 죽었다 누가 죽였는가?. 우리가 그리고 내가 죽였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는 내가 살아야 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니체는 신이 죽은 다음에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마지막 인간이고 하나는 초인입니다.
마지막 인간은 누구인가? 인류가 다 죽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메뚜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마치 메뚜기떼 처럼…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좋은 직장, 좋은 가족, 적당한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여기가 좋다는…..단지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초인(something beyond oneself)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 순수한 권력의 의지로 자기 극복에 매진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창조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거기에 이르는 3단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낙타의 단계.........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하는 낙타와 같이 관습과 규범과 도덕적 무거운 명령에 순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짐을 지고 순응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you should.의 단계이다
사자의 단계.........자유를 원한다면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정의하고 가치를 재정립하고 명령할 줄 알아야 하고 주권적 개인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내가 나를 주관하는 i will.의 단계이다.
어린아이의 단계.....긍정과 망각의 힘을 가진 어린아이가 합리적인 이유와 계산 없이 새로운 시작인 창조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과거를 개작(改作)하여 창조의 쾌(快),,,기쁨으로...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을 말한다.....I am.으로 완성이다.
이런 사람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할 줄 알고 춤을 출 줄 아는 초인이다. 춤을 출 줄 아는 사람은 고정관념의 무거운 틀에 메어 있지 않은 사람이고 창조하는 사람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2) 신은 죽지 않았으며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지도 않으신다.
성경은 천지 만물은 창조되었다고 선언하지요.(창1:1)....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조를 주도한 신(神)이 살아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화론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철저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어떠한 불연속성도 용납하지 않지요. 그 이유는 연속성이 깨지면 이론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치명타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중간과정의 생물체가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가 사실이 되려면 수천 년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동물과 인간으로의 진화정도에서 차이가 나는 다양한 형태의 중간 생물체가 살아 있어야 하고 그것이 없다면 최소한도 중간과정의 화석 형태라도 제시되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제시하지 못하는 진화론의 허구성은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으며 신(神)이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성경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의구심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왜 이 세상에 고난과 전쟁과 악독함이 난무함에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천지 만물과 역사를 주관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세계를 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가지는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에서는 때로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일이 많으며 그와 반대로 인간중심의 도덕률에 의한 선한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한 것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묵상과 논의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따라서 고통과 고난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어느 위치에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려면 우리의 위치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예수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3) 신은 우리를 또 다른 초인으로 인도한다.
니체의 초인은 어린아이의 성품을 닮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숨겨 놓은 자기목적이 없고 합리적 이유 없이---기존의 틀에 매이지 않고---창조의 세계를 열어 갈 수 있다. 자기가 순수한 권력의 의지를 발동하여 기존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어린아이라고 설명합니다.
서양철학은 “나”가 주체이고 나 이외의 모든 것 즉 세상과 신과 너를 객체로 봅니다. “나는 의심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르네 데카르트"(프랑스)의 명제는… 나 이외의 모든 것은 그것이 실존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심하는 “나”라는 존재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인 “나”이외의 모든 것은 다 객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도 “나”가 중심이긴 한데 기존의 “나”를 뛰어넘는 창조를 위한 의지와 용기를 가진 새로운 "나"… 모든 것의 중심인 “나”… 초인(over man ...... something beyond oneself)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리적 힘의 초월을 뜻하는 super man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포기되고 포기된 자기가 창조주이신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 됨으로........ "나와 분리되어 객체인 너가 아닌"...... "나와 예수가 연합된 우리"로서의........신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러나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중심성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자기 이익을 자기 힘으로 스스로 내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포기의 원(願)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찾고 두드리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없어져야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비로소 창조주이신 예수의 생명으로 덧입어 연합할 수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눅11:9-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니체가 초인으로 가는 마자막 단계가 어린아이의 단계라고 한 것은 성경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한 어린아이는 어떤 어린아이입니까?---어린아이는 어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안전한 엄마의 자궁에서 외부세계로 떨어져 나올 때부터 불안을 안고 태어납니다. 이 원초적인 불안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불안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린아이는 평안을 누릴 수 있으며 순진무구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며 창조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의미가 우리에게 깊이 인식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로 산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어---이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된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니체의 용어를 빌리면 또 다른 초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이 아닌 또 다른 초인은 ---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 유형을 넘어서려는 인간 ---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새로이 깨닫는다는 의미이지 다른 존재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 편협한 인간의 관점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2022년 오늘…우리 앞에 신은 죽었습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으십니까?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으로 살 것인가…아니면 그가 말한 권력의 의지를 불태워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초인으로 살 것인가…그도 아니면 “예수 안에서” 새 피조물로서의 초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 그러고 보니 우리 앞에는 세 갈래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바라기는 새 피조물이 되어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평안으로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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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혹여 의견을 주실분은 woongdou@daum.net로 보내주셔서 은혜를 함께 나누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