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뜻만 보이노니
- 묵상과 헤아림의 중요성 -
2025.7.13. 주일오전예배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면서 우리 예배당이 수원에 있을 때, 비닐하우스 성전과 특별히 아카시아 성전에서 드렸던 8월 성회 생각이 많이 났고요, 또 이곳에 이사 와서 빈들판 야외 성전에서 8월 성회를 드렸던 그 감격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조산교회를 섬기고 10년 만에 다시 본 교회로 돌아와서 8월 성회 때마다 형님 목사님이 제게 맡겨주신 조그마한 일이 있었어요. 그건 8월 성회나 사역자 집회 때 선물로 드릴 가방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적절한 가방을 동대문 시장이나 청계천에 가서 준비해 보라고 숙제를 주셨을 때,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처음에는 좀 막막했어요. 그러나 주님 모시고 레크레이션하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오라는 형님의 말씀에 용기를 갖고 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주님을 기대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뜻을 가지고 계셨고 제가 작은 묵상과 헤아림을 훈련받았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형님은 백화점(실은 고물상)을 찾을 때, 또 중고 자전거 사업을 하실 때, 동행을 많이 배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저는 가방을 준비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가격 흥정하는 것도 그렇고 디자인도 그렇고 아무튼 주님의 마음을 좇아 주님께 합하고 우리 식구님들이나 오신 손님들에게 참 예쁜 가방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오늘 주님 모시고 함께 나눌 말씀은 ‘내가 뜻만 보이노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0절에 보면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자세하게 풀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긴 설명보다는 뜻만 보이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실 때 보통 뜻만 보이십니다. 그럼 나머지 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주신 뜻을 붙잡고 주님 앞에 기도 속에 나아가서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 속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의 헤아림을 가지고 온전하게 이뤄가는 것이죠. 성서에서 한 다섯 군데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의 늙은 종’ 창세기 24장이지요. 아브라함은 약속으로 얻은 100세에 낳은 이삭에 대해서 주님의 마음을 더듬었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아들답게 스스로 가정을 꾸려가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삭이 가나안에 있는 여자를 아내로 취하기보다는 자기 고향, 자기 친족 중에서 아내를 취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감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늙은 종에게 하루는 심부름을 보냅니다.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이삭을 위한 아내를 데리고 오라.’ 엄청난 숙제지요. 그러나 그 늙은 종은 아브라함이 뜻이 있기 때문에 명령하신다는 것을 믿고, 아브라함의 인격을 믿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길을 나섭니다. ‘이삭을 데려가지 마라! 그곳에서 어느 여인이 따라오지 아니하거든 너하고 내가 맹세한 것이 의미가 없으니 억지로 하지 마라!’ 하고 보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 메소보다미아 지방이죠.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가운데 있는 중동의 황금 비옥 지대입니다. 길을 나선지 어느 정도 됐을 때, 나홀의 성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나홀은 아브라함의 바로 밑 친동생입니다. 아브라함도 족장으로 큰 식솔을 거느렸지만 나홀도 성을 지을 만큼 권세 있는 모습으로 그 고향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샘물가에 이르렀을 때 늙은 종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종을 불쌍히 여기시고 순적하게 일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만일 물을 뜨러 오는 저 여인들 중에서 제게 물을 주고 이 열 마리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여인이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가면서 묵상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마치기 전에 한 소녀가 다가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부탁을 합니다. ‘지금 방금 뜬 항아리에 든 물을 내게 좀 마시게 하라.’ 그랬더니 그 소녀가 기쁜 마음으로 물을 따라 드립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약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긷는 일이 그 더위에 쉬운 일도 아니잖아요. 아는 사람도 아니고 초면인데 그 이방 사람에게 선의를 베푼다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홀의 아들, 브두엘이 낳은 딸, 아브라함의 동생의 손녀인 리브가를 만난 것입니다. ‘네 아비 집으로 가자!’ 거기서 준비했던 선물을 열어놓고 여기 찾아온 이유를 말합니다. 음식을 차려 놓으니까 먹기 전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그러니까 그 리브가를 내 어린 주인 이삭의 아내로 허락해 달라면서 그 일을 매듭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날 밤을 지내고 나서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아니 며칠 머무르고 가시지 왜 그렇게 재촉하십니까?’ ‘아닙니다. 일을 마쳤으니까 속히 주인에게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딸도 데리고 가기를 원합니다.’ 브두엘은 자기 딸 리브가에게 물어봅니다. 리브가는 따라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아브라함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이 창세기 24장에 나옵니다. 그 당시는 성경이 없는 시대입니다. 성경은 모세 시대부터 있었으니까 성경은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조그마한 묵상과 헤아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인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신 것에 얼마나 감사와 찬송을 그 늙은 종이 드렸을까요.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마음을 좇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뜻을 가지고 동행하기를 원해서 본으로 기록한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두 번째,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 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에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주변의 대적들이 모두 다윗에게 굴복해서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으로 더듬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또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어요. 자기는 성에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데 ‘여호와의 법궤는 아직도 장막에 있구나’ 주님의 법궤를 편히 모실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고자 마음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선지자 나단에게 자기의 마음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단은 ‘왕이여 그 뜻을 성취하소서’ 라고 대답했지만 그날 밤에 주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하기를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몸에서 나오는 아들, 곧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한다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나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내가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나의 집을 건축하라고 명했느냐?” 다윗이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너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셨던 것입니다. 나의 집을 건축한다는 그 마음의 중심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죠. “내가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고 영원히 세우리라!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서 내 이름을 위한 집을 짓게 하리라!” 약속해 주십니다. 다윗은 그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나단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나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다윗은 주님께 또 기도하며 여쭤봅니다. ‘제가 성전 건축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제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무엇입니까?’ 역대상 22장에 보니까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건축하게 될 성전을 위한 재료와 장인들을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주님께 여쭤보면서 백향목도 돌도 그리고 금붙이들과 쇠붙이도 그것을 가공할 여러 기구들과 장인들도 세심하게 준비한 다윗이었습니다. 준비가 철저하면 일하기는 쉽다고 하지요. 말이 솔로몬의 성전이지 사실 다윗이 다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다윗의 공로가 90% 이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듬을 때 주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다윗의 길이었습니다.
세 번째,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입니다. 수넴 여인은 한 남편을 모시고 있는 평범한 여인이지만 자기 집 주변으로 지나다니시는 엘리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지한 것이죠. 그래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집에 자주 초청해서 음식도 대접하고 물론 남편의 허락을 받아서 그 일을 했겠죠. 또 더 섬길 것이 없을까 헤아려 봤을 때 지나시는 길에 쉴만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 귀하신 분에게 우리 집 담장 위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서 오가는 길에 쉬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본채에 연결한 집이라면 불편할 텐데 담장에다 지으면 지나가는 길에 쉽게 들어갈 수가 있어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남편은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은 그 담장 위에 작은 방을 만들었습니다. 방 안에다가 침상을 놓고 책상과 의자와 촛대 이 네 가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며칠 후에 엘리사 선지자가 그 집 그 담장 위에 있는 방에 들어가서 보고는 감동하셨어요. 수넴 여인의 생각이 주밀하도다. 참 세심한 배려가 그 마음에 들 정도로 여러 가지 복잡하고 화려하게 된 방이 아니라 순례자가 잠깐 쉴 수 있는 꼭 필요한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 주님 마음에 합하게 준비된 그 모습, 형제에게도 합한 그 섬김, 이 점이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원함을 주시고 그 원함을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킹제임스 버전에는 이 소원을 두고 행한다는 말씀을 ‘to will and to do’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 신약에 이르러서 빌립 집사님을 생각해 봤습니다. 사도행전 8장 뒷부분의 말씀이죠.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많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연락해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와서 그들에게 안수하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마리아에 큰 부흥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 때에 주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그 길은 광야 사막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부흥에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 그 일은 형제들에게 맡기고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일입니까? 라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실 때에는 뜻이 있겠지, 주님을 신뢰하고 다만 순종했을 뿐입니다. 뜻만 보이시는 주님이시지만 단순하게 순종하는 빌립 집사님도 아름답습니다. 일어나서 가보니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있었어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권세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호위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말하면 경호원들이죠.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명하십니다. 광야로 가는 길에 때에 맞게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고 또 주님께 귀를 기울일 때 병거로 나아가라고 말씀하니까 순종해서 병거 가까이로 나아갑니다. 그 내시가 쳐다보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내시가 쳐다봤고 ‘이 병거 위로 올라오시오! 지금 내가 이사야 말씀을 읽고 있는데 이 선지자가 말하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구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 곧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어 보면서도 도무지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그 말씀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저기 물이 있으니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내려가서 함께 세례를 베풀 때 주님은 축복하셨고 성령께서는 빌립을 홀연히 다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성공했을 때 그 성취감에 머물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것에 머물렀다가는 큰일납니다. 사마리아 부흥에서 일어났던 빌립, 에디오피아에 권세 많은 사람을 전도했다고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룬 다음에 속히 움직였던 빌립 집사님 참 본이 됩니다.
다섯 번째,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라고 했던 고린도후서 8장 말씀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 사도바울 선생님이 어려움과 환난을 겪어서 곤란한 지경에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제안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속해 있는 아가야 지방에는 일 년 전에 부탁을 했는데 아직도 모금이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들의 성도는 그 소식을 듣고 곧장 이 은혜와 형제를 섬기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사도바울 선생님에게 전해왔습니다. 사도바울 선생님이 그 소식을 듣고 고맙기도 했지만 걱정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지금 마게도냐 교회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시련들이 적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극히 가난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뜻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했을 뿐입니다.’ 하면서 거액의 연보를 분에 넘치게 거두어서 사도바울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주님께 전심인 성도들은 형제에 대해서도 전심인 것 같아요. 할렐루야! 주님께 전심이 아닌 이 고린도 교회는 형제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뜻만 보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설명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실 교회에서 재정적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참 조심스럽습니다. 고린도 교회 같이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시험이 들까봐 조심스러웠죠. ‘절대 억지로 하지 마시오! 주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분량 껏 섬기시오!’ 그렇지만 마게도냐 교회들의 본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서 15장의 말씀을 보니까 아가야와 마게도냐 성도들이 기쁨으로 연보했다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바울 선생님이 편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뜻만 보이실 때가 많아요. 교회를 통해서도 이번 7월과 8월에는 한밤의 묵상 시간을 가져봅시다. 뜻만 보였죠. 식구님들 각자가 어떻게 한밤의 묵상을 보낼 것인지는 주님 앞에 헤아리시고 묵상 가운데서 은혜받는 모습이 참 주님께 감사하고 식구님들께 감사했습니다. 우리 몸 된 교회는 뜻만 보여도 나머지 일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생활하고 섬겨가는 식구님들이 계시니 사도바울 선생님이 마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소중히 여긴 것처럼 주님이 우리 몸 된 교회를 빌립보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뜻만 보여도 주님 앞에 상담하며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몸 된 교회 식구님들과 제가 되기를 원해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