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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법사님 무문관 제창
제15칙 동산삼돈 第十五則 洞山三頓
雲門因洞山參次, 門問曰, “近離甚處?” 山云, “査渡.” 門曰, “夏在甚處?” 山云, “湖南報慈.” 門曰, “幾時離彼?” 山云, “八月二十五.” 門曰, “放汝三頓棒.” 山至明日, 却上問訊, “昨日蒙和尙放三頓棒, 不知過在甚麽處?” 門曰, “飯袋子! 江西湖南, 便恁麽去.” 山於此大悟.
無門曰, 雲門當時, 便與本分草料, 使洞山別有生機一路, 家門不致寂寥. 一夜在是非海裏著倒, 直待天明再來, 又與他注破. 洞山直下悟去, 未是性燥. 且問諸人, 洞山三頓棒, 合喫不合喫. 若道合喫, 草木叢林, 皆合喫棒. 若道不合喫, 雲門又成誑語. 向者裏明得, 方與洞山出一口氣.
頌曰, 獅子敎兒迷子訣, 擬前跳躑早飜身, 無端再敍當頭著, 前箭猶輕後箭深.
I. 본칙 운문 화상에게 동산이 참례하였을 때, 운문이 물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동산이 대답하였다. “사도査渡에서 왔습니다.” “하안거는 어디에서 지내셨고?” “호남湖南 보자사報慈寺에서 지냈습니다.” “그럼 언제 그 곳을 떠났지?”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 “너에게 3돈 방을 주어야 하겠지만 용서해 주겠네.” 이튿날 동산이 다시 운문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제 3돈 방을 면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 화상이 말했다. “이 밥통 같은 놈아, 강서로 호남으로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기만 했다는 것이냐!” 동산이 그때서야 확실히 알아들었다.
무문 화상 평하기를, 운문이 그때 딱 맞는 본분의 양식으로 동산에게 살아갈 길을 열어주어, 그의 가문이 쓸쓸하지 않게 하였다. 밤새 이것일까 저것일까 시비의 바다에서 헤매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달려온 그에게 그는 또 친절하게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동산이 그때 곧바로 깨달았으나 아직 영리한 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다. 동산이 그때 3돈 방을 맞아야 했겠는가? 맞지 말아야 했겠는가? 만약 맞아야 했다면 산천초목이 모두 맞아야 할 것이요, 맞지 않아도 됐다면 운문이 거듭거듭 헛소리나 한 것이 될 것이다. 이를 분명히 아는 자라야 동산을 위해 기염氣焰을 토해 줄 수 있으리라.
게송으로 가로되, 사자는 미혹한 새끼들을 벼랑으로 떨어뜨려 가르치는 비결이 있으니, 앞으로 밀어 떨어뜨리려는 순간 이미 몸을 뒤집었네! 생각지도 않게 차례차례 정통으로 맞혔으니, 앞 화살은 얕았지만 뒤 화살은 깊구나!
II. 배경 운문문언雲門文偃1 선사는 설봉의존雪峰義存2의 제자로 선종禪宗 오가五家의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이다. 선종 오가의 창시자들 가운데 ‘위앙종潙仰宗’의 위산영우潙山靈祐나 ‘조동종曹洞宗’ 동산양개洞山良价, 그리고 ‘법안종法眼宗’ 법안문익法眼文益은 온건한 편에 속하지만, ‘임제종臨濟宗’ 임제의현臨濟義玄이나 ‘운문종’ 운문문언雲門文偃은 과격한 편에 속한다. 그중 운문 쪽이 훨씬 더 과격하였는데, 방(棒)이나 할(喝)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거친 악담으로 유명하였다. 운문은 선사들 가운데에는 첫째로 꼽는 달변가였으며 지독한 독설가로 이름이 높았다.3
『오등회원五燈會元』『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4 등에 보면 운문은 처음 지징志澄 율사律師에게 사분율四分律5 등을 배우다 선문禪門에 들어, 황벽희운黃檗希運의 법사法嗣인 목주도종睦州道蹤6에게 참예參詣하여 깨달았고, 이어 설봉雪峰에게 간다. 다음은 그때 이야기이다.
운문스님이 처음 목주睦州스님을 참방하자 목주스님은 기연을 움직임이 번개 치듯 하여 참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평소 사람을 맞이함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문득 멱살을 움켜쥐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고 하였으며, 그가 머뭇거리면서 말하지 못하면 바로 밀어 제쳐 쫓아내면서 “진秦나라의 탁력찬車*度轢鑽7 같은 무용지물이로구나!”하였다.
운문스님이 만나러 갔다가 세 번째 가서 겨우 문을 두드리니, 목주스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문언文偃입니다”라고 말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목주스님이 멱살을 움켜쥐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하였다. 운문스님이 머뭇거리자 바로 밀어제쳐 쫓아내었다. 운문스님의 한쪽 발이 아직 문지방 안에 있는데, 목주스님이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운문스님의 다리가 치여 부러졌다. 운문스님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완전히 깨쳤다. 후일 말로써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하나같이 목주스님을 빼닮았다.8
운문문언雲門文偃스님이 목주도명睦州道明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깨친 다음 진조 시랑陳操侍郞의 집에 가서 3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 목주스님을 뵈오니 스님이 말하였다. “남방에 가면 설봉스님이란 분이 있는데 그대는 그곳에 가서 종지를 받지 그러느냐?” 이에 운문스님은 설봉산을 찾아갔다. 마침 농막에서 북쪽으로 가는 한 스님을 만나 그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오늘 설봉산에 오르려고 합니까?” 그 스님이 그렇다고 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스님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因緣]이 있습니다. 이 말을 주지 노스님에게 물어보되 다른 사람이 부탁한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스님이 좋다고 승낙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스님이 산문 안에 가서 큰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이 모이는 것을 보거든 팔을 잡아 붙들어 세워놓고 ‘이 늙은이야! 목에 쓴 칼(형틀)을 왜 벗어버리지 못하느냐?’라고 하십시오.” 그 스님이 가서 운문스님이 시킨 그대로 하였다. 스님께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당장 법좌에서 내려와 그 스님의 가슴을 움켜잡고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하고 소리치셨다. 그 스님이 대답이 없자 스님께서는 그를 탁 놔주며 말씀하시기를, “이제 한 말은 너의 말이 아니지?” 하자 그 스님이 “제 말입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자야! 오랏줄과 몽둥이를 가져 오너라!” 하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그 말은 제 말이 아니고 농막에서 절浙 땅 스님을 한 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저에게 여기 와서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이에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농막에 가서 5백 명의 선지식을 모셔 오너라!” 다음날 운문스님이 산에 오르자 스님께서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무슨 인연으로 그러한 경지를 얻었는가?” 운문스님은 고개를 숙였고, 이 일로 기연이 맞았다.9
운문은 설봉 문하에서 3년을 지냈는데, 어느 날 설봉이 운문에게, “그대의 경지는 어떠한가?”라고 묻자, “저의 경지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성인들과 더불어 실낱만큼도 틀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후 행각에 나서 48세 되던 해(911년) 육조대사탑六祖大師塔을 참배하고, 영수원靈樹院 영수여민靈樹如敏10 선사를 찾아가 그의 제일좌第一座가 된다.
영수靈樹의 여민如敏 : ?~920)스님이 20년 동안 수좌를 뽑지 않고 항상 “내 수좌가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또한 “내 수좌가 수행〔牧牛行〕을 하고 있다”하였으며, 또다시 “내 수좌가 행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갑자기 하루는 종을 치게 하고 삼문三門 앞에서 수좌를 맞이한다고 하니, 대중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운문스님이 과연 이르자 바로 그를 수좌료首座療로 맞이해 짐을 풀게 하였다. 사람들이 영수를 일컬어 지성선사知聖禪師라 하니 스님은 과거와 미래의 일들을 모두 미리 알았던 것이다.11
여민은 입적하면서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은 이곳에 있는 수좌로다(人天眼目堂中上座)”라는 글을 남겨 영수원의 주지가 되었고, 923년 운문산으로 옮겨 머물렀는데, 항상 일천여 대중이 수행 정진하였다고 한다. 문하에 네 사람의 철인哲人이 나왔으니, 동산수초洞山守初를 비롯하여 지문사관智門師寬, 덕산연밀德山緣密, 향림징원香林澄遠 등이 그들이다.
운문은 평소에 언구의 수다스러움을 피하고, 간단명료하게 의표意表를 찌르는 선문답을 즐겼다. <간시궐乾屎橛>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운문호병雲門胡餠> <체로금풍體露金風> <수미산須彌山>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등의 공안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데, 자유자재한 언어의 마술사로, 세 글자로 선禪을 말하기도 하고(살펴보아라(顧), 비추어 보아라(鑑), 아이쿠(咦)), 때로는 묻는 말에 한 글자로 답하는 이른바 ‘일자관一字關’으로 유명하다.
1. 문: “무엇이 정법안正法眼 입니까?” 답: “보普.” -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 2. 문: “병아리가 껍질 속에서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닭이 쪼아 주는 것이 놀랍게 일치 하는 현상(줄탁지기啐啄之機)을 어떻게 보십니까? 답: “향響.” - 메아리 (問如何是啐啄之機. 師雲響. 進雲, 還應也無. 師雲, 且緩緩. 이어 “그러면 감응을 말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자, “그렇게 서둘지 말게나.” 라고 대답한다.) 3. 문: “운문의 한 길(一路)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답: “친親.” - 몸소 체험하는 것 4. 문: “부모를 죽인(殺父殺母) 사람은 부처님께 참회하는데, 부처와 조사를 죽인(殺佛 殺祖) 사람은 누구한테 참회해야 합니까?” 답: “노露.” - 드러내라 5. 문: “도道란 무엇입니까?” 답: “거去.” - 가라 6. 문: “돌아가신 영수靈樹 선사께서 질문을 받고 아무 말도 안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비문에 어떻게 새길까요?” 답: “사師.” - 스승이시여!12
운문은 머뭇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기언奇言, 경구警句, 괴언怪言, 망담妄談 등 자유자재한 말과 글로 제자들을 지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 가풍 때문이었는지 향림징원香林澄遠, 지문광조智門光祚로 이어지는 운문종 4대 법손 설두중현雪竇重顯13은『전등록傳燈錄』에서 100칙을 가려 뽑아 게송을 붙인『송고백칙頌古百則』(일명『설두송고雪竇頌古』)으로 공안선公案禪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는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가『송고백칙』을 편찬하여 문자선文字禪을 제창한 뒤로 선종의 공안집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때였는데, 설두는 분양을 능가하는 시적詩的인 아름다움으로 지식인들을 매료시켰을 뿐 아니라, 종래從來 이해理解할 수 없었던 선문답을 친근감親近感있는 언어言語로 되살려 禪의 대중화大衆化를 이끌었다. 『설두송고』는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에 의해 수시垂示, 착어著語, 평창評唱이 첨가되어『벽암록碧巖錄』으로 편찬되었고, 조동종曹洞宗에도 영향을 주어 묵조선을 주창하였던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굉지송고宏智頌古』를 저술한다.『굉지송고』또한 원오를 본받은 만송행수萬松行秀에 의해 시중示衆, 착어著語, 평창評唱이 가해져『종용록從容錄』14으로 편찬되어,『벽암록』과『종용록』은 선종의 대표적 선종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들 선종서는 간화선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
송초 즉 북송에 이르러 시문학의 발전과 함께 선승들은 고칙 공안에 대하여, 송고(頌古, 고칙 공안의 의미를 간결한 게송으로 표현하는 것), 염고(拈古, 고칙에 대한 시적인 촌평), 대어(代語, 고칙에 대하여 타인을 대신하여 평함), 별어(別語, 고칙에 대하여 별도로 말함), 착어(着語, 공안에 대한 촌평) 등의 형식으로 그 의미를 에둘러 표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繞路說禪), 그 효시는 임제 의현의 5대 법손인 분양 선소(汾陽善昭, 947∼1024)였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1004년) ‘전등록’에서 오도기연 100개를 뽑아 송고(頌古), 염고(拈古), 대어, 별어를 붙여서 ‘송고대별삼백칙(頌古代別三百則)’을 편찬, 저술했다. 이어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의 3대 법손인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은 다시 ‘전등록’에서 100칙을 뽑아 게송을 붙여 ‘설두송고백칙’을 편찬, 저술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설두 중현의 ‘설두송고백칙’은 분양 선소의 송고를 훨씬 뛰어넘는 시적(詩的)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송고백칙’은 바야흐로 공안선 시대, 문자선 시대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 뒤를 이어서 공안선의 극치인 원오 극근(1063∼1135)의 ‘벽암록’이 나오고, 굉지 정각의 ‘종용록’과 대혜 종고의 ‘정법안장正法眼藏’, 그리고 송대의 마지막 공안집 ‘무문관’과 ‘허당록虛堂錄’이 잇달아 나왔는데, 특히 원오의 ‘벽암록’은 공안선의 절정을 이룬 완결판이었다. 이시설선(以詩說禪, 시로써 선을 표현함), 선禪과 시詩가 결합하여 북송의 선불교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공안선은, 그러나 ‘벽암록’을 정점으로 막을 내리고 남송시대 간화선 탄생의 단초를 제공한다.15
어디서 왔는가? I 이 화두는 동산수초洞山守初16 선사가 행각 중 운문 화상을 참문參門하여 나눈 대화록이다.『벽암록』에는 행각승이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묻는 선문답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 한 유형이 바로 여기에 소개된 ‘근리심처近離甚處, 어디서 왔는가?’이다. ‘근리심처’에 대한 사례를 몇 개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목은 종달노사님의『벽암록』을 따른다.)
「제10칙 목주약허두한睦州掠虛頭漢」 목주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近離甚處)?” 스님이 “악!” 하고 할喝을 하였다. 목주 화상이 말했다. “노승이 그대 고함에 한번 당했네 그려!” 그러자 스님이 또 할을 하였다. 이에 목주 화상이 말하길, “그렇게 세 번 네 번 할을 한 다음에는 어찌 하려는고?” 스님이 아무 말이 없자, 목주 화상은 곧장 그 스님을 치면서 말했다. “이 사기꾼 같은 놈아!”17
「제34칙 앙산부증유산仰山不曾遊山」 앙산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고(近離甚處)?” “여산에서 왔습니다.” “오로봉에는 가보았겠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대는 아직 산놀이를 하지 못했구먼!” 후에 운문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씀은 모두 자비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중생들을 위한 방편의 말씀이시다.”18
「제35칙 문수전후삼삼文殊前後三三」「제36칙 장사방초낙화長沙芳草落花」「제54칙 운문각전양수雲門卻展兩手」「제66칙 암두수황소검巖頭收黃巢劒」그리고「제76칙 단하끽반야미丹霞喫飯也未」등도 역시 ‘어디서 왔는가(近離甚處)?’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 정성본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는 선지식이 참문하는 수행자에게 던지는 상투적인 수단으로, 원오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설치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살펴 측정해 보기 위해 던지는 한마디이다. 물의 깊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지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마디 인사말(一句)를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벌써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취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인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한마디지만 방심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甚處)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나 위치방향을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나 방향위치를 등지고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인사말이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장소로 대답하면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단순히 인사로 받아들이면 운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운문이 묻고 있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한마디에 장소와 학인의 본분을 묻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19
‘어디서 왔는가?’는 단순히 장소나 방향만을 물은 것이 아니라, 학인 본분의 출처를 동시에 묻고 있다는 해설이다. 선지식이 참문하는 학인의 수행력을 알아보기 위해 던지는 일종의 미끼로,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점검해 보기위한 시험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해설서들도 이와 비슷한 논조다.
어디서 왔는가? II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하기 위해 가볍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하였는데, 실재로는 어땠을까? 본칙에서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한 스님에게, 강서로 호남으로 어딜 그렇게 쓸데없이 싸돌아다녔느냐고 야단을 치고 있다. 그럼 법을 구하러 다닌 것이 비난받을 일이었을까? 조주趙州 선사는 20년 동안 행각한 것으로 유명하고, 대부분의 조사들이 그랬는데, 수행승이 여기저기 법을 구하러 다닌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즉, 행각 자체를 두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해설서의 설명과도 거리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렇게 답한 것이 허물이었다면, 그 허물에 대해 설명을 했어야지 어디를 그리 돌아다녔느냐고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전체적인 대화진행으로 보아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으로 느껴지는데, 그 전모를 알 수 있는 대화가『운문록雲門錄』에 보인다.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서 떠나왔느냐?” “사도査渡에서 왔습니다.” “여름결재는 어디에서 지냈느냐?” “호남湖南의 보자사報慈寺에서 지냈습니다.” “언제 그 곳을 떠났느냐?” “작년 8월입니다.” “너에게 곤장 석 대를 때려야겠다.” 다음 날 그 스님이 다시 올라와서 문안드리고 물었다. “어제는 스님께 몽둥이 석 대를 맞았습니다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겠군요.” “밥통아, 강서 호남에는 무엇 하러 가느냐?” 그 스님은 이 말끝에 크게 깨닫고 드디어 말하였다. “저는 이제부터 사람 없는 곳에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한 톨의 쌀도 쌓아두지 않고 한 포기 채소도 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시방에 왕래하는 선지식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못과 쇄기를 뽑아주고 기름때 묻은 모자를 벗겨주며, 겨드랑 냄새나는 베 장삼을 벗겨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말끔한 납승이 되게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밥통아 몸은 야자椰子만 한데 입은 크게도 벌리는구나.”20
스님이 깨닫고 나서 하는 말을 참고하면, 강서로 호남으로 돌아다닌 것에 대한 후회가 묻어난다. 그래서 최소한 야단친 부분이 적절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즉, 스님이 세 번의 질문에 그대로 답한 것을 탓한 것은 아니고, 전체적으로 스님의 현재 상태와 문제점를 파악하고 쓸데없이 짚신만 낭비한 것에 대한 충고를 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 번의 질문에 순수하게 그대로 대답 한 것이 허물이 아니고, 올바른 참선 수행은 등한이 한 채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세월만 보낸 것에 대한 질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 번의 문답으로 압축하여 표현하였지만, 실재로는 세 번의 문답 외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대화 속에는 어디 어디를 어떻게 더 돌아다녔다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나, 그 부분은 공안으로 편집될 때 편의상 생략되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편집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 생략되어 이런 모습으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동산은 중국의 서북의 한 구석인 봉상鳳翔 출신으로 운문이 주석하는 광동성 소주 운문산까지는 몇 천 킬로나 떨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실재 동산은 그곳에서부터 행각을 하며 대륙을 횡단하여 운문의 처소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 험난한 길에 수많은 곳을 거쳤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 끝에 이제 행각을 멈추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조언 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가는 것이다. 선은 상식이다. 아주 세밀한 유리알 같은 상식이다.
운문의 입장에서 볼 때 동산은 훌륭한 수행자이지만 불법의 현지를 알지 못하고 여기저기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한심한 놈이다. 불법의 현지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여기저기 선지식들에게 불법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21
결국 “어디서 왔는가?”는 그냥 “어디서 왔는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가? III 한편『벽암록』「제54칙 운문각전양수雲門卻展兩手」는 본칙과 시작은 같은데 이어지는 후반부의 내용은 다르다.
운문 화상이 어느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고?”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서선사에는 요즘 어떤 말들이 오가는가?” 스님은 말없이 두 손을 펼쳤다. 운문 화상이 한 대 때렸다. 그러자 스님은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이에 운문 화상이 즉시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데도 그 스님이 아무 말이 없자 운문 화상이 또 때렸다.22
찾아온 운수납자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묻자 서선사에서 왔다는 것까지는 같은데, 다음 “서선사에는 요즘 어떤 말들이 오가는가?”라고 물은 것은 본칙과 다르다. 서선사의 주지는 어떠한 법문(言句)으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느냐는 말일 테고, 나아가서는 그 법문을 듣고 체득한 경지는 어떠한지 제시해 보라는 뜻이다. 그러자 스님은 말없이 두 손을 펼쳐 보인다. 이에 운문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스님을 후려친다. 이에 나도 할 말이 있다는 스님의 기개가 돋보이나, 아직은 어설펐던지 또 두들겨 맞는다.
이 공안이 본칙보다는 더 논리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 부분을 본칙에 삽입하면 전체적으로 이야기 진행이 부드럽다. 3돈 방을 면해 준 것도 그렇지만, 두들겨 맞은 뒤에 왜 맞았는지 고민하다, 다시 찾아가니 제대로 된 공부는 안하고 남들 하는 대로 눈동냥이나 하며 어디를 그리 싸돌아다니기만 하였느냐고 핀잔을 준 것으로 보면 본칙보다는 상식적으로 이야기 진행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본칙과 이 부분, 그리고 앞서『운문록』에서 보았던 대화까지 합치면 그때 두 사람 간의 대화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 것은 선문답에 자주 등장하는 행동으로 전수展手라고 한다.
전수展手는 자비의 손을 중생들에게 드리우는 수수垂手나 수자垂慈와 같은 말로 부모가 손을 내밀어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보듬는 것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한다.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에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는 이러한 보살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법화사상에서 말하는 수적垂迹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을 나툰 것을 말하고, 불보살의 근본을 본지本地라고 하며 화신으로 몸을 나툰 것을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고 한다.23
스님은 나름대로 손을 펼쳐 보여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하고 있는데, 운문은 거기에 일격을 가한다. 원오는 이런 운문을 공연히 “도적을 끌어들여 집안이 망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럼 운문종의 개조인 훌륭한 운문은 왜 그런 스님을 때렸는가? 이에 대해 정성본 스님은 운문의 안목은 ‘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고함과 같이 일체의 분별심과 거짓 흉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즉, 운문은 이미 이 물음 이전에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님이 흉내를 내고 있다고 보고 일격을 가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와 안목’ 갖춰야지, 흉내를 내고 모방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 굴리기가 아닌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체득한 자신만의 경계를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아직은 덜 익고 소박하였을지라도.
참고로,『벽암록』에는 선지식이 행각승에게 ‘어디서 왔는가?’라는 묻는 공안도 많지만, 역으로 행각승이나 수행승이 선지식을 상대로 묻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아마 ‘어디서 왔는가?’라는 인사가 오간 뒤 이어지는 본론 부분을 보여주는 공안일 터이다. 인사 부분은 생략하고 본론 부분만을 공안으로 채택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데, 그 예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4칙 덕산협복문답德山挾複問答」「제7칙 혜초문불慧超問佛」「제9칙 조주사문趙州四門」「제12칙 동산마삼근洞山麻三斤」「제13칙 파릉은완리설巴陵銀椀裏雪」「제14칙 운문일대시교雲門一代時敎」「제15칙 운문도일설雲門倒一說」「제16칙 경청쵀탁기鏡淸啐啄機」「제17칙 향림좌구성로香林坐久成勞」「제20칙 취미선판翠微禪板」「제21칙 지문연화하엽智門蓮華荷葉」「제26칙 백장독좌대웅봉百丈獨坐大雄峰」「제27칙 운문체로금풍雲門體露金風」「제28칙 남천불설저법南泉不說底法」「제29칙 대수수타거야大隋隨他去也」「제30칙 조주대나복두趙州大蘿蔔頭, 제31칙 마곡지석요상麻谷持錫遶床, 제33칙 진조구척안陳操具隻眼」「제39칙 운문화약란雲門花藥欄」「제43칙 동산무한서洞山無寒暑」「제45칙 조주칠근포삼趙州七斤布衫」「제47칙 운문육부수雲門六不收」「제50칙 운문진진삼매雲門塵塵三昧」「제51칙 설봉시십마雪峰是什麽」「제52칙 조주도려도마趙州渡驢渡馬」「제56칙 흠산일족삼관欽山一鏃三關」「제57칙 조주전고노趙州田庫奴」「제58칙 조주분소부하趙州分疎不下」「제59칙 조주하불인진趙州何不引盡」「제68칙 앙산여명십마仰山汝名什麽」「제73칙 마조사구백비馬祖四句百非」「제75칙 오구굴봉굴烏臼屈棒屈」「제77칙 운문호병雲門餬餠」「제79칙 투자일체불성投子一切佛聲」「제80칙 조주초생해자趙州初生孩子」「제81칙 약산주중주藥山麈中麈」「제82칙 대룡견고법신大龍堅固法身」「제85칙 동봉암주작호성桐峰庵主作虎聲」「제90칙 지문반야체智門般若體」「제93칙 대광저야호정大光這野狐精」「제98칙 천평행각天平行脚」「제100칙 파릉취모검巴陵吹毛劍」등 대강 살펴보아도 무려 42개다. 그러니『벽암록』은 절반 정도가 선지식을 방문하여 문답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그 외 나머지는 대개 상당법문이나 설법을 다룬 내용으로 구성 되어 있다.
어디서 왔는가? IV 지금까지 선지식과 수행자간의 선문답을 분석해 보았는데, 아주 드물게 부러 선지식들을 시험하러 다니는 경우나 입실점검을 원하는 행각승의 경우를 제외하면, 만나자마자 수행정도를 타진打診하고 화두 경계를 묻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특수한 경우도 있겠지만 선지식과 수행승의 만남은 우리 일상의 만남과 비슷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법을 묻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고함을 치거나 툭하면 몽둥이질을 해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임제할로 유명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에 대한 월암 스님의 다음 글은 이 같은 상황을 다소나마 대변해주고 있다.
북경 및 하북성의 수도 바로 옆 정정현 임제사는 당나라 시대에는 변방 중의 변방, 북경 수비도시다. 임제를 둘러싸고 있는 교화대상은 군인들이다. 창, 활, 방 등이 군사 용어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군인이냐. 민간인에 맞는 언어로 바꿔야 한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한 사람들을 위한 언어들이라 폭력적이다. 그래서 간화선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단순, 무식, 폭력, 고집, 불친절’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24
임제선풍이 군사문화라는 스님의 말씀은 사실여부를 떠나 상식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므로 할과 방이 난무하는 공안의 내용은 수행자와 선지식이 만나 일어난 일들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려는 과정에서 과장되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보통의 경우, 방문객에게 어디서 무슨 공부를 했는가를 물어 볼 수도 있겠고, 옛날 같이 교통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행각승에게 여행한 곳에 대해 물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동안 얼마나 수행이 진전되었는가를 물을 수도 있겠다. 지인知人이 오랜 동안 헤어져 있다 만난 경우라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또는 여행은 어땠는지에 대해 물어 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여행을 다니면서 가끔 스님들과 대화할 기회를 가진다. 작은 절일수록 오가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스님의 수행담에, 산중 생활 경험담에, 그리고 여러 가지 주변이야기까지 정겨운 대화가 이어진다. 스님들은 신도 확보 차원에서 더욱 더 적극적인 것이 보통인데, 그러나 선문답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화를 해보면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구지 그런 것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무문관無門關』이란 책을 아는 스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무문관』이니『벽암록』이니 하는 선종서가 시중에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어 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래 오대산 염불암에서 만난 스님도 알고는 있었는데, 무슨 화두를 하느냐고 물은 뒤 경계를 물어보니 묵묵부답이다. 선도회 같은 재가 단체가 있느냐고 신기해 할 뿐이었다. 그처럼 대부분 선문답에는 소극적일 뿐 아니라, 화두경계를 논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화두 입실점검 체계로 공부하지 않아서인지 화두 경계는 도무지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선문답은 선지식들이나 하는 정도로 치부할 뿐이다.
조계종의 거량은 전부 멱살잡이다. 임제문풍에서 거량하는 것이 멱살잡이 하는 걸로 안다. 조실방장 스님들이 아들들에게 멱살 잡히면 부끄러우니까 거량을 피한다. 그러니 ‘입실문실’이 있을 턱이 있나. 옛날에는 거량이 중요한 깨달음의 수단이었다. 점검도 없어져 버렸다. 밝은 태양과 달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반딧불 눈이라도 모아 밝혀야 한다. 말법시대 아닌가. 선지식 명안종사가 없으면 서로 반딧불이 되어 탁마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25
요사이는 위빠사나 수행이나 인도 여행에 대해 말하는 스님들이 대부분인데, 서로 이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상적인 대화가 전부이다. 그것은 수행하는 스님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임제종을 표방하고 있고 간화선을 수행체계로 삼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화두점검체계를 이어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장 기본적인『백장청규百丈淸規』「선원규식禪院規式」에 명시된 ‘선원의 모든 대중은 아침에 참문하고, 저녁에 모여야 한다.’로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의 입실제도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요즈음은 선각자들이 있어 세계화 속에 나름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려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고, 일반 신도들은 수행을 넘어 큰 스님들의 생활태도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고 있는 현실 또한 사실이다. 일반 대중들은 그냥 오랜 전통이 남아 있는 절이 있고 수행자가 있어 절에 가는 것만으로도 평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가끔 소박한 스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화선 성립이전에도 인도든 중국이든 법이 존재하였고 끊임없이 부처나 조사들은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왔는가? V 불교사를 보면 시대에 따라 불교 이론이나 수행방법들은 끊임없이 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국불교사에 있어 간화선이 중국선의 마지막 귀결이며, 인도 이래 명상수행이 기나긴 모색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외국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이 정체 되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분발할 일이다.
중국선은 『무문관』에 이르러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이며, 그것은 이제 이 이상 더 진보하려고 하지 않는 한계에 왔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26
달라이 라마를 찾아간 한 스님이 달라이 라마와 만나는 자리에서 면전에 주먹을 쑤욱 내밀었더니 달라이 라마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 스님 딴에는 법을 논하고 싶었겠지만, 서로 수행한 방법이 다른데 초면에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을 시험하는 것은 수행자로서 옳은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흡사 내가 믿는 종교로, 내가 하고 있는 수행법으로 상대방을 시험해보려는 편협한 사고이다. 선도회 회원들은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선도회 회원들은 당송이래 내려온 간화선 점검체계에 따라 폭넓게 공부하였으니, 상대방 눈높이에 맞추어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보통 재가자들은 스님하면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지는데, 그런 선입견 또한 버려야 스님을 바르게 볼 수 있겠다. 스님도 스님이기에 앞서 인간이고, 그러므로 스님이 어찌 어찌하여 실망했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III. 사설
신비神秘와 수행 미디어media에서 선문답을 처음 접하면 통쾌감과 함께 과연 그 뜻이 무엇일까라는 의문 또한 강하게 인다. 그래서 그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 선공부에 돌입하게 되는데, 필자가 선도회 간화선 수행을 통해 얻은 것 중에 하나가 그런 의문들로 부터의 해방이다. 입실점검을 통해 모호하기만 했던 화두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서 다른 의문들까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화두 탄생의 배경과 역사 또한 자연스레 공부하게 되어 선에 관련된 지식 또한 풍부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신비神秘한 것에 대해 현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벽(黃檗希運, ?~850) 스님이 어느 날 천태산天台山을 유람하다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익히 알았던 사이처럼 금방 친해졌다. 그런데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눈에는 사람을 쏘아보는 광채가 있었고 용모 또한 매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강이 있는 곳에 이르러 망설이고 있는데, 그 스님이 황벽에게 함께 건너가자고 제안하였다. 황벽은 건널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노형께서는 건너가고 싶으면 혼자 건너가시오!” 라고 하자 그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 위를 걸어 건너가면서 소리쳤다. “오시오! 어서 건너오시오!” 그러자 황벽이 꾸짖어 소리쳤다. “예끼, 저만 아는 놈(自了漢)! 내 일찍이 그런 줄 알았더라면 네 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았을 것을…….” 이에 그 스님은 오히려 감동하여 이르기를, “참으로 대승大乘다운 법기法器로고! 나는 그야말로 그대의 상대가 못 된다.” 라고 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27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 일화가 ‘황벽의 눈에는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로 “참나”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라는 책의 설명보다는, 물 위를 걷는다거나 혹은 홀연히 사라졌다거나 하는 내용에 더 관심이 갔다.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 선사가 책보지 말라고 한 이유이기도 한데28, 책 내용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으로 빠진 것이다. 수행을 하고 나서야 겨우 물 위를 걷고 홀연히 사라진 것에 대한 의문은 사라졌다. 이야기 구성상의 허구일 뿐 믿을 게 못 된다는 확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신비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부정도 긍정도 아닌 눈으로 무심히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비가 신비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신神이나 혹은 신비를 가을 하늘에 날아다니는 잠자리나 잔디밭에 돋아나는 토끼풀처럼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다 국선도 수련을 하면서 큰 탈 없이 일생을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왼쪽 어깨가 아파 컴퓨터 작업을 오랫동안 할 수 없게 되었다. 1982년 이래 지금까지 컴퓨터를 사용한 업보요, 주로 마우스를 사용하여 작업한 까닭에 집중적으로 한 쪽만 쓴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선도 수련을 오래하였다고 자만하여 자주 수련을 건너 뛴 결과이기도 하다. 선 공부한다고, 글 쓴다고 수련을 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은 결과다.
춘성 스님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할 때의 이야기다.
춘성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한다. 스님은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냉수가 얼어 항아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춘성 스님은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앉아 정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춘성 스님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춘성스님이 3개월 동안 밤마다 물독에 들어가는 혹독한 수행으로 잠을 이겼노라고 하셨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경지를 한 번 얻었다고 죽을 때까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 되지 않으면 그런 경지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자는 삶 자체가 바로 끊임없는 수행(생수불이生修不二)이다.
얼마 전 ‘기공’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사람이란 뭣인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살아나가면 된다. 타인의 인생에 돌을 던지는 비열한 인간은 되지 말며, 남을 헐뜯고 죽이는 인간이 되지 말자. 기공의 수련은 이것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몸을 단련하는 기공 수련도 마음 수련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모든 수행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법이 다르다고 무조건 정법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다름’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선 수행은 지혜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이지, 경계의 우열을 다투기 위함은 아니다. 조화로움을 우선으로 하면서,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지켜나가야 하겠다.
IV. 참구 운문 화상은 왜 또박또박 옳게 대답한 행각승에게 3돈 방을 면해 주겠다고 했는가? 이를 잘 살피면 여러분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 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지만 선은 상식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아니다.
V. 감상
효봉 스님이 출가 할 때 이야기이다. “공부하기로 결심한 사람인데, 석두스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 말을 듣던 세 분 스님 중에 풍채가 좋은 분이 그의 말에 응답을 했다. “어디서 왔는고?”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스님은 방랑인의 모습이 역력한 찬형(효봉)을 향해 또 다시 물었다.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는고?” 발걸음을 헤아려 보지 않았으니 알 수 가 없어 약간 주춤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큰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이렇게 왔습니다.”29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지금 어디인가?
팔 괴고 누워 파란 가을 하늘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을 하얀 눈으로 바라본지 꽤 오래되었다.
Blue Moon의 The Waltz 파란물처럼 번지는 피아노 소리 초록 먹은 솔바람 소리 연한 초록 향의 히아신스 둘
팅! 풍경소리 땡그랑! 팅! 팅!
VI. 참고한 책과 글
1)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중국 당나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중국 선종禪宗 오가五家의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의 창시자이다. 절강성浙江省 소주蘇州 가흥현嘉興縣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씨이다. 어려서부터 출가를 바라다가, 17세때 향리鄕里의 공왕사空王寺 지징志澄 율사律師에게 의탁하여 득도得度하였고, 20세에 수구受具하였다. 교학과 계율에 깊은 지견을 얻었으나, 그것이 ‘궁극적인 자신의 본분사는 밝히지 못함’을 알고 곧바로 선문禪門에 들어, 목주도종睦州道蹤(黃檗의 법사法嗣)에게 참예參詣하여 깨달았고, 이어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의 문하에서 수년간 정진하여 인가를 받았다. 제방諸方을 유력遊歷하며 많은 선객들과 교류하였고, 乾化 원년(911) 조계육조曹溪六祖의 탑塔을 참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수여민(靈樹如敏, 793~883, 장경대안長慶大安의 법사法嗣, 백장의 손제자)의 會下에 있다가, 영수가 천화遷化하자(918) 광주廣主(광주廣州의 왕) 유엄劉龑의 청에 의해 法席을 이었다. 同光 원년(923) 소주韶州(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유원현乳源縣 북쪽) 운문산雲門山에 가람을 짓고 주석하였는데, 항상 천명 대중이 수행하였다. 天成 2년(927) 後唐 明宗이 ‘광태선원光泰禪院’이라 사액賜額하고, 天福 3년(938) 後晋 유성劉晟은 ‘광진대사匡眞大師’의 호를 내렸다. 운문산에서 30여년을 주하며 宗風을 떨치다가 乾和 7년 4월 86세로 示寂하였다. 유계遺誡에 의해 塔을 건립하고도 유체遺體를 방장方丈에 안치安置하니 몰후沒後 17년 동안 기서奇瑞가 있었다. 그는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운문호병雲門胡餠><체로금풍體露金風><수미산須彌山><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등 많은 公案을 남겼으며, 저서에『운문광록雲門廣錄』『운문어록雲門語錄』등이 있다. 뇌악雷岳은『운문산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雲門山光泰禪院匡眞大師行錄』과 <實性碑>를 찬撰하였다. 운문의 계보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 청원행사(靑原行思, ? ~740) →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 →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 운문문원으로 이어진다. (語錄附 行錄, 南漢金石志 1 2 實性碑, 全唐文892 碑銘,『조당집』11,『전등록』17,『계고략』3)
2)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선사는 당대唐代 청원하靑原下 덕산선감(德山宣鑑, 780~865)의 제자로,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 남안南安 출신으로 속성俗姓은 증씨曾氏이다.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포전蒲田 옥윤사玉潤寺 경현慶玄 화상和尙에게 출가出家하여 17세에 계戒를 받은 후, 부용산芙蓉山 항조恒照 화상和尙에게서 배우다 덕산德山에게 참예參詣하여 그의 법法을 이었다. 그 후 함통咸通 11년(870)에 행실行實의 청請에 의해 복부福府 서쪽 상골산象骨山에 암자를 짓고 주석住錫하였는데, 이 산은 겨울에 눈이 제일 먼저 내려 ‘설봉雪峰’이라 하였다. 후에 희종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자가사紫袈裟를 주었다. 양梁 개평開平 2년(908) 5월 87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설봉은 피나는 정진精進 끝에 대도大道를 이룬 인물人物로 유명한데, 어디를 가든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특히 대중공양大衆供養의 취사炊事 소임所任을 자처自處하여 언제나 몸에 밥주걱을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문하에 항상 천 오백여 제자가 수행하였으며 법제자法弟子로는 운문종雲門宗을 개창開創한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을 비롯하여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보복保福, 경청鏡淸, 취암翠岩 등이 있다. (송고승전12, 전등록16, 통기42, 통재25, 禪宗正脈7)
3)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229.
4)『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은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선사들의 생각과 말, 행동을 모아 엮은 인물 조명기照明記이다. 조산본적曹山本寂, 풍혈연소風穴延沼, 천복승고薦福承古 등 42명의 선사를 상권, 광혜원련廣慧元璉, 앙상행위 등 39명을 하권에 담았다.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 선사는 임제종 황룡파인 진정극문(眞淨克文, 1025∼1102)의 법제자로 남악南嶽의 13세 법손이다. 강서江西의 석문사石門寺에 있을 때, 학덕과 문필이 널리 알려져 ‘석문사 문필 혜홍각범’이라고 불렸는데, 스스로는 적음존자寂音尊者라고 칭하였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하여, 별다른 이유 없이 투옥과 유배 등 굴욕적인 사건들을 겪었고, 출가 사문으로서는 미증유의 수난을 체험하였다. 말년에는 상서湘西 남대사南臺寺에 명백암明白庵을 짓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세수 58세 법랍 39년으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30권과 그 외『임간록林間錄』2권,『지증전智證傳』10권,『냉재야화冷齋夜話』10권, 그리고 시문집인『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30권 등이 있고, 법화, 금강, 화엄, 원각, 능엄, 기신 등에 대한 본격적인 주소注疏가 있다.
5) 출가한 승려가 불법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계율을 모아 엮은 불교의 경전. 불멸 1백 년 후에 담무덕이 상좌부 근본 율을 4번에 걸쳐서 가려 뽑은 율장.
6) 목주도종(睦州道蹤, 780~877) 선사는 목주도명睦州道明이라고도 불리며, 황벽희운의 제자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목주睦州 용흥사龍興寺에서 종적을 숨기고 짚신을 삼아 어머니를 봉양했기 때문에 ‘진포혜陳蒲鞋’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경·율·논 삼장에 모두 밝았으며, 명리를 싫어하여 평생 은자로 살며 세상에 잘 나타나지 않아 ‘진존숙(陣尊宿 존경받을 받을 만한 분)’으로도 불렸다. 황벽희운(黃壁希運, ?∼850)의 수제자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을 독려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고,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다리를 부러트리면서까지 가르침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7) ‘진시탁력찬秦時車*度轢鑽’은 진나라 때 만리장성 쌓을 데 쓰던 전차. 종달 노사는 도력찬鍍轢鑽으로, 진시황이 아방궁을 지을 때 쓴 큰 못으로 설명하셨는데, 큰 못은 보통 민가에서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숭산 노사는 ‘진시도삭찬秦時鍍鑠鑽’이라 하여 곱패로 장치된 커다란 송곳으로 보았다. 종문宗門에서는 한갓 말솜씨만이 지나치게 날카롭고, 얻은 바 없는 사람을 평하는 말로 사용한다(숭산행원 큰스님,『道話集』 p. 204).
8)『벽암록碧巖錄 上』(선림고경총서 35)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71~72.
9)『설봉록雪峰錄』(선림고경총서 19)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32~133.
10) 영수여민(靈樹如敏, ?~918?) 선사는 복건성福建省 민천閩川 사람으로, 백장下 복주福州 장경대안長慶大安을 이어 광동성広東省 소주韶州 영수사靈樹寺에 住하였다. 숙세宿世를 알고 미래를 예지豫知하는 신통력神通力이 뛰어나, 양왕襄王 유은劉隱, 고조高祖 유엄劉龑 등에게 대대로 일의 길흉을 상담相談 예견豫見하여 ‘지성대사知聖大師’라고 불리며 존숭尊崇을 받았다. 11)『벽암록碧巖錄 上』(선림고경총서 35)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72~73.
12)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238.
13)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은 중국 선종의 일파인 운문종雲門宗의 승려이다. 자는 은지隱之, 호는 명각明覺, 중현은 이름이고, 雪竇는 거주지인 산 이름을 딴 것이다. 부모를 여의고 어렸을 때 출가하여, 처음에는 성도 보안원成都普安院의 인선仁銑과 지문광조智門光祚에게 사사하였다. 지문광조의 법을 이어받아 쑤저우[蘇州] 취봉사翠峰寺와 항저우[杭州] 영은사靈隱寺에 살았으나, 만년의 31년간은 밍저우[明州] 설두산 자성사資聖寺에서 활약하였다. 시문詩文이 뛰어나『설두칠부집雪竇七部集』이라는 저술이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저서로『설두송고雪竇頌古』『조영집祖英集』『어록語錄』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설두송고』는 100칙의 공안公案을 가려 뽑은 것으로, 선종禪宗 내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는『벽암록碧巖錄』의 모체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14)『종용록從容錄』또는『종용암록從容庵錄』은 중국 선종의 선어록禪語錄으로, 원명은『만송노인 평창 천동각화상 송고 종용암록萬松老人評唱天童覺和尙頌古從容庵錄』이다. 중국 선종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하며 묵조선默照禪의 시조인 천동산天童山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이 고칙(古則, 후인의 수행의 규범이 될 만한 옛 사람(古人)의 언구) 100칙을 골라 여기에 송고頌古를 붙였는데, 이것이『굉지송고宏智頌古』이다. 그 후 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가 1223년(嘉定16)에『굉지송고』에 하나하나 시중示衆, 착어著語, 평창評唱을 가한 것이 본서이며, 그 평창을 쓴 장소가 종용암宗容庵이었기 때문에『종용암록』이라고 이름 지었다.『굉지송고』가『벽암록碧巖錄』의『설두송고雪竇頌古』를 본받은 것처럼 만송萬松의 평석評釋도 원오圓悟의 것을 본뜬 것으로 간주되며, 옛날부터『종용록』과『벽암록』의 두 저서는 선문禪門의 쌍벽으로 존중되어 왔다. 특히『굉지송고』의 묘미妙味있는 시와 만송의 뛰어난 착어, 평창에 본서本書의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키백과)
15) 윤창화,「공안선公案禪」법보신문, 발행호수 : 1157 호 / 발행일 : 2012-08-15.
16)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 선사는 운문스님의 법제자로 법명은 수초守初이고 봉상鳳翔 부씨傅氏 자손이다. 양주讓州 洞山이라하여 균주筠州의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와 구별한다.『무문관無門關』「第18則 동산삼근洞山三斤」의 주인공이다.
17) 擧. 睦州問僧, “近離甚處”. 僧便喝. 州云, “老僧被汝一喝”. 僧又喝. 州云, “三喝四喝後, 作生”. 僧無語. 州便打云, “這掠虛頭漢”.
18) 擧. 仰山問僧, “近離甚處”. 僧云, “盧山”. 山云, “曾遊五老峰”. 僧云, “不曾到”. 山云, “사黎不曾遊山”. 雲門云, “此語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19)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 p. 340.
20)『운문록雲門錄 下』(선림고경총서 16)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48. (원문) 第二天, 守初禪師便上丈室, 向雲門和尚問訊:“昨日蒙和尚放三頓棒,不知過在甚麼處?” 雲門和尚道:“飯袋子!江西湖南便恁麼去?” 守初禪師言下大悟, 頗為自得地說道:“他後向無人煙處, 不蓄一粒米, 不種一莖菜, 接待十方往來, 盡與伊抽釘拔楔, 拈卻灸脂帽子, 脫卻鶻臭布衫, 教伊灑灑地, 作個無事衲僧, 豈不快哉!” 雲門和尚笑道:“你身如椰子大, 開得如許大口!”
21)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 p. 152.
22) 擧. 雲門問僧, “近離甚處”. 僧云, “西禪”. 門云, “西禪近日 有何言句”. 僧, 卻展兩手. 門, 打一掌. 僧云, “某甲話在”. 門, 展兩手. 僧, 無語. 門, 便打.
23)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 pp. 341~342.
24) 벽송사 벽송선원 선원장 월암스님,「선방 30년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 임제 선풍은 군사문화의 잔재물이다」불교닷컴 2009년 11월 24일.
25) 벽송사 벽송선원 선원장 월암스님,「선방 30년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 오와 매가 유하면 오매일여는 틀린 말이다」불교닷컴 2009년 11월 24일.
26)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안영길 옮김,『선의 사상과 역사』 p. 156.
27)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16.
28) 어느 날 약산이 경을 보고 있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 “저희들에게는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스님은 왜 경을 보십니까?” 그러자 약산이 말했다. “나는 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가림하고 있는 거야.(只圖遮眼)” 그러자 스님이 “저도 화상을 배우려는데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약산이 말했다. “만일 그대라면 소가죽도 뚫으리라.” 藥山惟儼禪師看經, 僧人問:「和尚尋常不許人看經,為什麼卻自看?」藥山說:「我只圖遮眼.」僧人又問:「我能夠效法和尚嗎?」藥山答:「若是你,牛皮也須看透.」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시라.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간경을 허락하지 않았다[尋常不許人看經]”함은 지금 사람이 옛 가르침을 보지만 마음속에 소란함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요, “다만 눈을 가리려 할 뿐이니라[只圖遮眼]”함은 마음속의 소란함을 면하고자 하면 다만 옛 가르침을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요, “만일 그대라면 쇠가죽이라도 꿰뚫어볼 수가 있어야 되리라[若是汝也須看透]”함은 글줄을 찾고 글자를 세면서 문자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 3』「337. 간경看經」 p. 414)
29)『현대 고승인물 평전』(불교영상), 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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