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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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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선지자는 바람같이 나타났다가 바람같이 사라진 선지자이다. 엘리야 하면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갈멜산이요. 그곳 단에 임한 여호와의 불이다. 한국교회는 병적이라 할 만큼 불을 좋아한다. 그래서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작성할 때에 “여호와의 불” 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밤에 여호와의 불이 임하게 하자” 고 외친다. 이것이 본문이 의도하는 바일까? 성경을 향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①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상은 어떠했는가? ② 엘리야의 신분은 무엇인가? ③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④ 하늘로부터 임한 불은 무엇에 대한 응답이요, 표징인가? ⑤ 불이 임함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이 정도만 물어보아도 설교의 방향이 빗나가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 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기록된 본문이 이 시 대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강론
성경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열조가 애굽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 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다”(렘7:25)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시대일까요? 아니면 악한 시대이겠습니까?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상
엘리야는 북쪽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그 시대상을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던(16:30) 시대였으니 이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의 신분
엘리야는 이러한 암흑한 시대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이것이 엘리야의 신분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악한 세대를 향하여 책망하고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는 사람이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17:1)한 말을 엘리야 개인의 말로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그뿐만 아니 라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시냇가에 숨고”(17:3) 하신 말씀을 대할 때에 엘리야가 숨은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숨은 것입니다. 암흑시대란 하나님의 말씀이 숨은 시대입니다. 제아무리 악한 시대라할지라도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있는 시대는 아직은 한 줄기 빛이 비취고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말씀이 숨으면 우로는 내리지 않게 됩니다. 은혜의 단비는 말씀과 함께 임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공궤하는데 쓰임을 받았던 과부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아노라”(17:24) 이것이엘리야의 신분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사명
“많은 날을 지내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18:1) 하십니다. 숨었던 말씀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3년6개월 의 가뭄에 단비가 내리리라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되어야 할 선행조건이 있었 던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18:21)고 촉구합니다. 그런 연후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16:4)에변명할 여지가 없는 표적을 보여줍니다. 이 것이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한” 갈멜산 제단에 임한 “여호와의 불”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18:36-37). “아브라 함과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왜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있을까요.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맹세로 보증하여 주신 언약의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함을 뜻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응답하옵소서”합니다.
형제여 갈멜산 제단에 임한 불이 무엇에 대한 응답임을 이제 아셨습니까?
①여호와가 하나님되심을 입증하는 불입니다.
②엘리야의 입에 있는 주의 말씀이 참됨을 증거하는 불이었습니다. 귀한 것은 불이 아니라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표적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만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③“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게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마음이 바알을 좇고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패역한 길에서 돌아 서기를바라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전하였고 붙잡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네말이 맞다. 나는그러한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한 응답이 불로 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불이아니라 여호와의 마음입니다. 패역한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오래 참으심입니다. 말씀의 대언자들은 이를 드러내고 증언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사명이었습 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고 참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짓신으로 폭로된 바알의 선지자들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큰비는그후에야 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침체에 빠진 말씀
열왕기상 19장의 장면은 18장과는 판이 합니다. 이세벨의 위협을 피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 소서”(19:4)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선지자를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호렙산 굴에 숨어 있는 엘리야를 보게 됩니다. 그토록담대 하고 당당하던 엘리야가 왜 이처럼 연약해지고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선지자에게 격려하신 말씀을 상고해보면 그 이 유를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겔3:79).
그러나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엘리야와 같은 침체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 하여 여기있느냐”(19:9, 13)고 거듭 책망어린 말씀을 하십니다. 엘리야는 또한번 불이 내려오기를 기대하고있 었단말인가! 그러나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불이 아니라 말씀이 역사하시게 해야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역자가 “나만 남았거늘 나만 남았거늘”(19:10, 14)하고 절망에 빠진다는 것은 구속의 역사란 자신이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33:22)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나가시는 역사임을 망각한 불신앙일 수가 있습 니다.
신약성경은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4-5)고 답변합니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남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밤 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땅의 그루터기“요(사6:13)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낙심은불신앙입니다.
높임은 받는 말씀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란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면 모두다실패자일수밖에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패역의 길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실패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그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불 수레와 불말들을 보내시어 데려가시는 것을봅니다(왕하2:1).
이 장면도 이제까지 살펴본 동일한 맥락에서 엘리야 개인의 영광이나 축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거절하고 박대하며 대적하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높여주시며 영화롭게 하여 주시는가를 보여주는계시사건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불가해한 장면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야 마땅합니다.
창세기4 5:27에서 이에 대한 빛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과 애굽이라는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말이 믿어지지 아니하므로 기색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족하도다. 내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합니다.
자기를 태우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엘리야의 기운은 얼마나 소생하였을까요. 이는 엘리야 한 사람을 위한 영광이 결코 아닙니다. 변화산상에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엘리야는 모든 선지자의 대표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승천을 예시적인 사건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모든 대언자들을 위로와 격려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끝으로 중요한 전망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갈멜산의 사건을 통해서도 멀리 그리스도를 바라 볼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에 두 단이 있었음을 압니다. 바알의 단에도 송아지가 제물로 올려졌고 여호와의 단에도 또다른 송아지가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렇다면 두 단 사이에 구별점이 무엇입니까? 응답과 불응답, 불이 내려옴과 내려오지 않음이 전부입니까?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조각품인 우상을 병행적인 대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뿐만아니라우상에게 제물을 받치듯 하나님 앞에 똑같은 방법으로 제물을 드려도 되는 양 당연시 하는 발상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 사야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 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없다”(사66:3) 고단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십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하는 것은 우상에게 어울릴 지언정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게는 모독적인 일인 것입니다. 바알의 단과 여호와의 단에 같은 제사가 드려졌다고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드려진 제물을 “번제물”(18:38)이라고 말씀합니다. 번제물이란 레위기1장에서 계시하고 있는대로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로 드려주실 것에 대한 그림자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만 제사제도는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드려진 번제물은 하늘로 부터불이 임하게 하기 위한 불쏘시게로 사 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라면 단에 벌려놓은 나무만으로도 족했을 것입니다.
그 번제물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의 그림자로 드려진것입니다. 엘리야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른 그 족장들에게 하신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천하만민을 구원하여 주시겠다 는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첫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다”(히9:15)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자기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으신 몸을 번제로 드려주신 대속제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가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가버린 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게(회개) 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이되셨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은 오늘의 시대를 암흑시대라 말할까요. 아니면광명한 시대였다고기록할까요. 이시대가 참선지자를 필요로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말씀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하여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광채”(고후4:4)가 비춰지고 있지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숨은 시대요. “여호와의말씀이 희귀한”(삼상3:1) 암흑시대일수 밖에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들 있습니다. 최우선적으로 말씀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대언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케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그시대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전하여 뭇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있습니다.
이사역을누가 감당해야합니까? 그 시대시대에 세움받은 말씀의 사역자들입니다. 엘리야나 이사야 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움받은 사역자들이 회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영합하는 설교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외로운 길을 감수 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한다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 혹시 형제는 선을 행하다가 엘리야 처럼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설교는 형제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