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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찬 바람 길
아침 기온이 차, 손이 상당히 시려왔다.
그렇지만 해가 솟아오르면서부터는, 여유가 생겨... 인야는 서서히 사진도 찍으면서 산길을 올랐다.
산 뒤 구름 속으로 솟아오르던 해가 드라마틱해 보여, 사진을 찍느라... 그만큼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떠오르는 해에 따라 주변 풍경의 색깔도 변하면서, 다소 환상적인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래. 이 근방을 지날 때면 늘 풍경이 아름다웠지. 깊은 분지와 꽤나 높은 산악 지형이라 안개가 깊게 끼는 등, 여기를 지날 때마다... 늘, 뭔가 독특한 풍경이었었지. 그러더니 오늘은 또 다른 풍광을 보여주는구나......'
그러면서 둘러 보니, 인야가 이삼일에 걸쳐 지나왔던 산들이 저 멀리로 겹쳐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내딛는 이 한 발짝 한 발짝이... 굉장한 거야!'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내 발은 위대하다. 그 먼 길을 걸어와, 이젠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 내 발은 정말 위대하다!!'
인야는 혼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세상 만방에, 그 얘기를 알리고도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제 내리막 숲길이었다.
그런데 그 숲길은 생각보다는 훨씬 길었다. 그 전에 올라올 때는 항상 동행이 있어서였는지 그리 지루하지 않았던 길이었는데, 그날은 축축하고 또 쌀쌀해서 그런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전날 내렸던 비로 땅이 질어, 신발도 흙으로 범벅이 되는 등 걷기마저 힘들었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단풍도 아름답게 들어 있었다.
그 부근에 '예사(Yesa)' 호수가 있다는 걸로 보면, 일교차거나 습도의 영향이 커서 그럴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햇볕이 밝아선지, 호수 주변에 무지개도 떠 있었다.
'근데, 어째 무지개가... 아름답다기보다는 처량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가다가 인야는 또다시 길을 잃었다. 그런데 다행히 조금 가다가 아스팔트를 만났고, 그 길로만 따라가면 '루에스따(Ruesta)'가 나올 터라... 큰 걱정이 되진 않았다.
가다 보니 저 앞에 루에스따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성이 보였는데, 인야는 한 두어 구비를 돌면... 그 마을이 나올 걸로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일곱 여덟 구비를 돌아서야, 겨우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그 길이 또 얼마나 지루하던지, 아침나절인데도... 인야는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왜, 이 아라곤 코스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는 게 없는지......'
루에스따를 바로 벗어나, 제 길은 숲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인야는 숲길 대신 아스팔트를 탔다.
음침하고 습기가 많은 숲길(그 숲길이 좁은 미로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겨울 길엔,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찾았던 곳이었기 때문에)이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스팔트 옆에는 풀들이 자라 있어서, 풀을 밟고 가다 보니... 발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로변에는 수도 없는 찔레나무가 있었고, 색깔이 고운 열매들도 꽃 같이 맺혀 있었다.
인야는 다시 찔레나무 열매 몇 개를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시큼한 맛이 입맛을 돋우긴 했지만, 씨앗은 여전히 많아... 다시 퉤퉤 뱉고는,
'뭘, 이런 걸 먹어보라고 그랬다지?' 하고는, 전날 길에서 만났던 불란서 여인을 탓하기도 했다.
허기야 비타민 C의 보고라니, 먹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다만, 먹기가 너무 불편해서 한 말이었다.
어쨌든 인야는 이번 가을 길에선, 길 자체에서 그런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걸어왔던 게 분명했다.
포도, 무화과, 사과, 산딸기... 그러니, '찔레'라고 해서 구박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으니까.
아스팔트가 다 끝나고 다시 길로 접어드는 언덕에 닿으면서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가 넘어 있었다.
물론 배가 고팠다.
그래서 인야는 어제 먹다 남아 가져온 삶은 달걀과 토마토, 초리소, 눅눅한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런데 사실, 어제 샀던 초리소는 맛이 입에 맞지 않아 버리려고 했었는데(정육점마다 조금씩의 맛의 차이가 있음) ... 버리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잖았다면 먹을 것도 없었을 터라.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니 추웠다.
아무래도 찬 음식이 배에 들어가서이기도 했겠지만, 햇살에 비해 바람이 상당히 찬 날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짐을 챙겨 다시 출발했다. 손은 바지 호주머니에 깊숙이 박고.
그런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모자가 날아가서... 한참을 뛰어가서야 다시 주워 쓸 수 있기도 했다. 카우보이 가죽 모자가 바람에 날릴 정도니, 그 바람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거기도 찔레나무가 길가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인야는 심심풀이로, 크고 붉은 것으로 또 몇 개를 따... 이젠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껍질만 입에 넣어 보았다. 그건 그런대로 먹을 만은 했다.
사실 배가 고파서 그걸 따먹은 건 아니었다. 왠지 비타민 C가 풍부하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다 보니, 손이 그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제 멀리 '아르띠에다(Artieda)'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보인 건 한참 전이었지만, 많이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이제 산꼭대기 마을의 형상이 뚜렷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마을 가까이의 한 농부에게 '아레스(Arres)'까진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13km라고 했다.
전날 알베르게의 아가씨는 18km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볼 만 하겠네......'
인야는 조금 희망을 안고, 아레스까지 가기로 했다.
이제 3일이면 끝날 길인데, 조금 서둘러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르띠에다를 우측에 끼고 빙 돌아 외곽으로 지나가는데,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아, 저 마을에서는 두 번인가 잤고... 지난 봄 길에서는 Wh와 맛있는 '가르반소스'를 먹은 기억도 선명한데, 이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는구나. 이렇게 가면, 어쩌면 평생... 다시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마을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인생이 덧없기도 했고 허무하기도 했다.
터덜터덜 길을 가다 보니, 변한 것도 있었다.
물이 흐르는 개울을 만났는데, 이전엔 신발을 벗어들고 건너야 했는데... 이젠 어엿한 다리가 놓여져서, 그런 불편함 없이 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비록 추운 겨울에(봄 길도 마찬가지였다) 맨발로 얾음장 같은 물을 건넜어야 했지만, 그래서 당시엔 정말 발이 어는 줄 알았다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런 게 다 추억이었는데......
'아, 이젠 그럴 일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아련하게 들고 있었다.
이제 벌판이 나왔다.
인야는 거기 돌무덤에서 잠깐 쉬고 싶었다. 거기도 추억이 깃든 곳이었으니까.
거기에 앉아, 비가 오려던지 새카만 들판의 하늘을 보며 하모니카를 불었던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자를 벗어 들고 가야만 할 정도로 바람이 세서, 쉴 수가 없었다.
우뚝 선 피레네 산맥의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던 그 센 바람은, 몸을 밀어주기까지 해서... 저절로 발걸음이 떼어져, 뛰어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바람이 셌다.
그러니 배가 고파도 쉴 수가 없어, 또 한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돌무덤에 앉아, 옛날 생각도 하면서 감상에 젖고도 싶었었는데......
더구나 경치도 좋은 곳이라 쉬기도 좋은 지접이었는데, 인야는 바람에 떠밀려... 도무지 멈춰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바람은 차서, 방수 잠바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걸어야만 했다.
그러니 쓴 모자는 손으로도 잡아야만 해서, 이중고를 겪고도 있었다.
그러다 언뜻 눈에 띈 게, 저쪽 피레네 산맥의 산꼭대기들의 하얀 색이었다.
그건 눈이었다.
'어제 내린 비가, 저기는 눈으로 내렸던 것이로구나......'
그러니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불어오는 바람이 찰 수밖에 없었던가 보았다.
그만큼 공기는 깨끗했고, 또 하늘 역시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그러니 더욱 쓸쓸할 수밖에......
아라곤 들판을 벗어나 잠시 분지로 접어들었다.
거기는 다소 바람이 자서, 아늑함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인야는 요즘, 자신이 너무 잘 걷는 것 같은 느낌에 젖어 있었다.
하루에 40km 정도는 거뜬히 걷는 모양새라,
'이걸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을까?' 하곤 했다. 그렇지만, 몸은 지쳐 있었지만... 몸 상태가 나쁜 건 아닌 듯했다.
가다 보니, 길옆에 사과나무 줄이 있었는데... 한 그루에 몇 개씩은 달려 있었다.
'눈이 내리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남아 있다지?' 하면서도, 지팡이를 이용해 두어 나무에서 사과를 몇 개 땄는데...
생긴 것과는 달리 맛이 참 좋았다.
'더 딸까?' 하다가, '다른 사람들도 따 먹어야지......' 하면서 관뒀다.
그렇게 허기를 달래고, 인야는 이제 멀리 보이기 시작한... 아레스 마을을 향해 걸어 나갔다.
지친 몸으로 급경사인 아레스 마을에 올라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두 자원봉사자가 인야를 맞아 주었다.
하나는 스페인 사람으로 50대였고, 하나는 30대 초반의 이태리 젊은이였다.
더구나 이 마을 역시 가게가 없는 곳이라, 알베르게 자체에서 음식을 제공해주면서 기부도 받기 때문에... 그는 저녁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부담도 없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알베르게에 도착한 사람은, 폴란드인 하나와 아르헨티나인 하나로... 인야까지 셋이었다.
음식은 이태리 젊은이가 했는데, 빠스따 종류였다.
사실 인야는 그가 음식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울 생각이었는데, 스페인 자원봉사자가 자꾸만 비노를 권하면서 얘기를 하자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그러는 사이에 나온 저녁 요리 빠스따는, 상당히 맛이 좋았다.
그러니 인야의 입장에서는, 아까 요리하는 걸 배우지 못한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스페인 자원봉사자는 자꾸만 비노를 권해서, 그날따라 썩 마시고 싶지 않았던 인야는... 계속 찔끔찔끔 마시기만 해서, 자신의 잔에는 비노가 계속 남아 있곤 했다.
저녁은 잘 먹은 편이었다. 다만, 식사 전에 약간의 종교적인 절차가 좀 번거롭긴 했지만.
허기야 저녁을 얻어먹으며(공짜는 아니었다. 다음 날엔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기부금 통에 넣어두고)하고 떠나왔으니까) 거쳐 왔던 알베르게는, 다 이런 식이었으니까. 또산또스(Tosantos), 그라뇬(Grañón), 그리고 여기 아레스(Arres)......
인야에게는 그게 썩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인간적이긴 했다.
그런데 인야와 함께 묵은 두 사람(폴란드, 아르헨티나인)은 다 스페인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도 잘 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스페인에서 살 생각인가 보았다.
인야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젊었을 때... 마음만 잘 먹었다면, 여기서 저들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내 경험으로는, 다 자기 태어난 데서 사는 게 가장 무난하고 또 덜 외로우니까. 제 철에 난 음식에,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 편하고 인종차별도 안 당하는 거니까......'
저녁을 먹고 나니 여기 또한 산꼭대기에 있는 마을로, 기온이 뚝 떨어져... 추웠다. 그래서 얼마 뒤에 바로 침실로 내려가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아, 내일 하루만 더 걸으면... 모레는 '솜뽀르뜨(Somport, 아라곤 코스 프랑스와 국경지점)'다. 그럼 끝이다.'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던 인야는, 어느새 희망에 부풀어...
'내일은, 날아가는 기분으로 걸을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