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사와 발원
먼저 잠자고 있는 이 불사를 일으켜 세워 주신 대구 자운사 혜명 스님에게 감사드리며, 자료 수집에 도움을 주신 천은사 은산 스님, 서방사 등정 스님, 옥천사 적멸보궁 지성 스님, 청련암 원명 스님, 해인사 능혜 스님, 만경사 동인 스님, 운흥사 야은 스님, 그리고 자료 수집과 교정을 맡은 불모화 보살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증보판 때 아주 꼼꼼하게 교정을 봐주신 등원 스님과 공원 스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불사를 마무리해 준 맑은나라 맑은소리 김윤희 대표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불사를 계기로 법계의 모든 중생이 극락에 가서 태어나길 빌며 14년 역사를 마칩니다.
2022년 6월 20일 새벽.
맑은나라(普淨) 서길수 합장
첫째 마당
일제 강점기 극락 간 사람들
(1910~1945)
1. 1918년, 건봉사 5회 만일회 베푼 만화당과 서쪽으로 뻗친 무지개
고종 23년(1918)
「高城 乾鳳寺 萬和堂 大禪師 碑文」, 「乾鳳寺本末寺蹟」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부종수교전 불심인 대각등계존자 전수호오대산적멸보궁 겸
팔도승풍규정원장 만화당 대선사 비문과 머리말
전가선대부 비각지제고 동궁시독 해평 윤희구尹喜求가 짓고, 전통정대부 검사 월성 김돈희金敦熙가 쓰고 새기다.
같은 한 가르침인데 어떤 이는 동쪽 진단국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서쪽 천축국이라 하며, 말세가 된 나머지 옛날처럼 덕이 높은 스님이 없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든(自利) 남을 이롭게 하든(他利), 또 크든 작든, 정진하면 같은 수행이고, 원만하면 같은 공덕이다. 내가 여러 붇다의 가르침을 들어 보면 만일염불회를 말하는 사람이 비록 저쪽 (천축)의 화엄 도량이 지금까지 7곳에서 9번 열렸다는데 지금 건봉사 1곳에서 만일회가 4번에 이르니 대단한 것이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건봉사는 금강 정토이니 신라 경덕왕 14년(755) 발징 화상發徵和尙이 1회 (만일염불회를) 만들어 원성왕 2년(786)에 10,000일 불사가 끝나서 선남선녀 31명 몸뚱이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순조 2년(1802) 용허聳虛 대사가 2회를 세우고, 철종 2년(1851) 벽오碧梧 대사가 3회 세워 모두 법대로 마쳐 회향하였다.
고종 18년(1881)에 4회를 세우니 바로 만화당 대사萬和堂大師가 그 사람이다.
스님 이름은 관준寬俊, 본디 정씨 집 자손이니, 개국공신 삼봉三峰 정도전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진록振錄, 어머니는 최씨다. 꿈에 쌍룡을 보고 감응하여 태기가 있었다. 황제 원년 경술(1850) 11월 23일 간성군 용포龍浦 시골에서 태어나 자를 쌍용雙龍이라 하였다. 성품이 총명하여 영민하길 마치 깨친 사람과 같았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출가할 뜻이 있었는데 부모가 난색을 보이자 허락하지 아니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여 드디어 승낙을 받았다. 드디어 건봉사에 이르러 금현錦玹 장로를 따라 머리 깎고 물들인 옷과 바루를 받았으니 이는 호암 정공虎岩淨公으로부터 9세손이다. 정계淨戒는 대허 유공大虛遊公에서 받았다.
임신년(1872) 23세에 이미 석왕사釋王寺 향관香官 일을 맡고, 이어 건봉사의 탱화 화주幁畵化主에 뽑혔으며, 이루 공이 매우 컸다. 이듬해 갑술년(1874) 승통에 오르고, 3년 뒤 정축년(1877) 전등사 총섭總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안 가 우리 절이 불타 버리자 모든 것 떨치고 돌아와 발로 뛰어 몇 해 가지 않아서 모조리 다시 세웠다.
만일회 일을 맡게 된 것은 신사년(1881)이니 대사의 나이 32세 때였다. 덧붙여 화엄법회를 연 것이 50회가 넘고, 참석한 신도만 8천을 헤아린다. 오랫동안 우리 절을 다시 세우는 데 화주가 되어 팔상전, 극락전, 음향전 등을 다시 세웠다.
광무 5년(1901)에 승진하여 부종수교전扶宗樹敎傳 불심인佛心印 대각등계존자大覺登階尊者 수호오대산적멸보궁守護五臺山寂滅寶宮 겸兼 팔도승풍八道僧風 규정도원장 糾正都院長이 되었다. 간간이 관동도교정關東道敎正이 되기도 하였다. 이미 우리 절에 세운 비석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인연이 작용한 나머지일 것이다.
(만일)회의 만기일이 다가옴에 나라와 임금의 조상, 온 법계의 유령을 위하여 먼저 1,000일 동안 참석자의 제한을 두지 않는 법회(無遮大會)를 열었으며, 융희 2년(1908) 9월에 마쳤다.
이렇게 영 · 호남으로 지팡이(錫杖)를 바삐 옮기고, 서울에 가서 방할(棒喝)에도 차례대로 따랐으나 기봉機鋒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니 탄복하여 혀를 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승려가 묻기를 “쇠로 만든 당간 하나 100길이나 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가져다 댈 만한 땅이 없는데 이것을 사람들을 위하여 세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걸 들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내가 주먹으로 부숴 버리겠다”라고 하였다.
무오년(1918) 가을 모시는 사람에게 “너는 알고 있어라. 올 9월 13일 나는 참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날 아침 일어나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고, 대중을 불러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極樂自心地 (극락자심지) 극락은 스스로 마음자리에 있으니
何用三世佛 (하용삼세불) 3세 붇다 무엇에 쓸 것인가.
三世雖莊嚴 (삼세수장엄) 삼세 비록 장엄하다고 하나
佛佛自心佛 (불불자심불) 붇다마다 자기 마음의 붇다니라.
十方虛空中 (시방허공중) 시방 허공 가운데
我佛本如然 (아불본여연) 내 붇다는 본디 그러하니라.
말을 마치자 바르게 앉아 서쪽을 향하고 숨을 거두었다(說已端坐 向西而化). 이때 속세의 나이 69세 법랍은 57세였다. 바야흐로 열반에 들 때 7가지 빛깔 무지개가 서쪽으로 뻗쳤다(有彩虹 亘于西). 다비식을 끝내자 사리 한 알이 나왔다.
스님은 키가 8자가 넘고, 입에는 이가 4개나 되었으며, 몸은 매우 무거웠고, 목소리는 종소리 울리는 것 같고, 앉아 바라보는 모습이 높은 산 같았다. 또 선정에서 나와 대할 때는 여자나 아이들도 편하게 따랐다.
서울이나 시골에서 못된 소년들이 놀려도 그냥 웃으며 끄덕거릴 뿐이었다. 스님 아래 용이나 코끼리 같은 제자가 자그마치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지금 그 문도들이 비를 세우고자 하여 나의 벗 영호 정호映湖鼎鎬가 대사의 간추린 행장을 가지고 와서 비에 새길 글(銘)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불법에 어두운 내가 어떻게 대사 같은 분을 잘 알겠는가. 다만 정호 상인이 알려 준 것이다. 비에 새길 글은 이렇다.
日十二時 一時八刻 分分秒秒 念念正覺
하루 12시간, 1시간 8각(15분),
분마다 초마다 생각생각 깨어있고
一日二日 至于萬日 念念正覺 萬日如一
하루 이틀 1만일까지,
생각생각 깨어있길 1만일이 하루 같았네.
是卽修行 修行功德 天上天下 無地別法
이것이 수행이고 수행이 공덕이지
천상천하에 따로 다른 법 없으니
誰與爲者 爲萬化師 師在何處 念之則來
누구 위함인가 만화 스님 위함이지,
스님 어디 계시나 생각하면 바로 오니
師在之處 碑則在此 後五百年 如是如是
스님이 계신 곳 비가 있는 이곳,
500년 뒤에도 또한 그러겠지.
옛날 이른바 위인 호걸들이 비록 책에 극히 많이 실려 있으나, 천년 지나면 아득하여 어렴풋하다. 내가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인물 가운데 세 분을 볼 수 있으니 조계의 함명函溟 노스님, 금산의 용명龍溟 노스님, 그리고 이 풍악의 만화 노스님이다. 노스님은 참으로 위인 호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거의 산문에만 계시니 빛이 감추어졌기 때문에 천하 국가에 크게 쓰인 적이 없고, 두드러지게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숨길 수 없는 타고난 소질이었다. 그러므로 높고 빼어난 기백과 준수하고 위엄 있는 풍채는 가만히 여산廬山의 원적遠赤 · 안종眼宗과 견줄 수 없다.
아! 이제 노스님의 땅속에서 빛나는 봉황 숲, 동산의 고요, 푸른 바다의 꿰져 흐름, 단정한 바위의 푸른 서슬 같은 모습과 행동을 어느 날 다시 뵐 수 있단 말인가! 노스님 자리를 이은 훌륭한 제자들에 힘입어 조사의 길을 잘 펴고 드날려, 돌아가신 스님의 뛰어난 공훈이 영원하기를 도모하노라.
우당 윤희구尹喜求의 훌륭한 글과 성당 김돈희金敦熙의 꿋꿋한 전서箭書를 얻어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긴다. 영호 정호映湖鼎鎬는 일찍이 가풍을 흠모하여 감히 뒤를 잇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같이 훌륭한 글 뒷자리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갑자년(1924) 4월 영호 정호가 삼가 기록하노라.
卍 보정의 꼬리말
이 비석도 만화당 스님(1850~1918)이 입적하신 지 6년이 지난 뒤 세우면서 벽오당이 3회를 만화당이 4회라고 해서 벽오당 비문이나 「대한국 간성 건봉사 1만일 연꽃모임 전해 오는 이야기(大韓國杆城乾鳳寺萬日蓮會緣起)」에서 벽오당이 4회, 만화당이 5회라는 것과 달라 기록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목숨이 다할 때 “서쪽을 향하고 숨을 거두었다”라고 해서 극락 가서 태어난 것이 아주 뚜렷하다. 다만 임종게에서 유심정토를 강조한 것과 틈이 있다. 임종게보다는 마지막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실제 정토삼부경을 바탕으로 1만일 연꽃모임을 만들어 운영한 만화당 스님은 당연히 극락 가서 태어나기 위해 염불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심정토唯心淨土란 경전에 나오는 말이 아니고 당나라 때 이통현李通玄 거사가 719년 신화엄경(80권)을 가지고 『화엄경론』을 지었는데, 여기서 각종 경전과 경학가들의 논서論書에 나오는 10가지 정토 가운데 ‘오로지 마음이 정토다(唯心淨土)’라는 정토를 처음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만화당 스님이 붇다의 말을 따랐지, 당나라 때 거사 말을 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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