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러 나라의 성장
[1] 부여
-반농반목의 사회, 1C초 왕호 사용 (중국의 접경지역으로 일찍 중국의 문화 수용).
-3C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 494년 고구려에 편입.
-왕+마가, 우가, 구가, 저가 => 5부족 연맹체
-연맹 왕국의 단계: 부족장의 세력이 왕과 비슷 / 왕은 중앙, 부족장은 사출도를 다스림.
-관리: 대사자, 사자 등을 둠.
-제가회의에서 왕을 추대.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음.
-연맹왕국 단계에서 고구려에 멸망.
-존재 의의: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계통임을 자처.
-풍습: 순장 (노예제의 존재를 반영) , 우제점법.
-특산물: 말, 주옥, 모피.
-제천행사: 12월(은정월)에 영고
[2] 고구려
-위치: 졸본 -> 국내성
-5부족 연맹 (왕: 소노부--> 계루부 고씨가 세습)
-옥저 동예등 정복, 공물을 받음.
-왕 아래 대가들이 있고 사자, 조의 선인등 관리를 거느림.
제가회의에서 중대 범죄자 처리.
-토지가 척박하여 일찍부터 주변 민족 약탈. 증거: 부경, 하호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나라: 부여, 옥저, 동예
-풍습: 데릴사위. 주몽과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 부여와 같은 점복의 풍습
-제천행사; 10월에 동맹
[3]옥저와 동예
-지형적인 원인으로 선진문물 수용이 늦음. 고구려에 의한 수탈.
-군장: 읍군, 삼로 --> 큰 정치세력을 형성 못함.
-토지 비옥하여 농사 잘됨 -> 고구려에 공납을 바침.
-동예: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고 삼베를 짜는등 방직 기술 발달.
-풍습: 옥저의 민며느리제, 골장제, 죽은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닮.
동예는 책화(영역침범시 소와 말로 변상)와 족외혼. => 씨족적 전통.
-특산물: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 동예는 단궁, 과하마, 반어피.
-제천행사: 동예 10월 무천.
[4] 삼한.
-일찍부터 진 국이 성립. 고조선 멸망기에 고조선의 유이민들이 철기를 가지고 내려와 토착문화와 융합되면서 발전, 삼한 연맹체 출현.
-마한:대전, 익산 중심. 54개 소국. 세력이 가장 큼. 그 중 목지국의 왕이 마한왕 또는 진 왕으로 추대되어 삼한을 영도.
-진한:대구, 경주 중심. 12개 소국으로 구성.
-변한:김해, 마산 중심. 12개 소국으로 구성.
-대군장:신지, 견지.
-소군장: 읍차, 부례
-이들 정치적 군장들: 물 관리권 장악.
-제사장: 천군 ->소도를 다스림 (유이민과 토착세력간의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
★제. 정 분리 사회.
-삼한 사회: 주거는 반움집, 귀틀집. 두레-공동체적 전통.
농경사회. 철제 농구 사용. 벼농사 널리 보급. 저수지 축조.
변한의 철은 낙랑과 일본에 수출, 화폐로도 사용.
-철기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지방 소국들이 발전-> 삼국의 성장.
백제국-마한통합-> 백제.
사로국-> 신라
가야국-> 가야연맹.
-제천행사: 5월 수릿날, 10월의 계절제.
III. 고대 사회의 발전
1. 고대 사회의 형성
(2) 한국의 고대 사회
[1] 고대사회의 성장
1>고대왕국의 성립과정: 독립된 세력이었던 지방의 족장세력이 중앙의 강력한 왕권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
2>고대왕국의 특징: 대내적-율령반포 등 체제정비, 불교 수용->사상의 통일.
대외적-정복활동을 통한 영토확장-> 영역국가화.
=> 중앙 집권화 & 왕권강화.
3>고구려: 2C 태조왕 때 국가체제 정비. 남조와 북조를 견제하며 '다면적 외교'를 펼침.
백제: 남중국과 교류하며 중국적인 세련된 통치체제 수립.
신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토착세력이 강성.
[2] 초기의 고구려
1> 고구려 사회의 성격: 부여의 유이민 + 토착민 => 둘 다 북방 유목문화에 가까움
=> 정복국가 체제로 발전.
2> 고대 왕국의 기틀 확립: 2C 태조왕
-정복과 통합 활발; 옥저 정복, 만주로 세력 확대, 낙랑에 압력
(¿낙랑축출은? 313년 미천왕)
-계루부 고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 이루어짐
-집권적 관료 조직 갖춤.
=> 왕권 강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로의 진전.
[3] 초기의 백제
1> 사회 구성: 고구려에서 내려온 북방 유이민 + 한강 토착민
유이민 집단이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지배층 형성.
2> 성장: 하남 위례성( 지금의 서울) 지역 중심으로 한강 유역의 연맹왕국으로 성장.
한 군현의 침략을 한강 유역 소국들과 연맹하여 막아냄.
3> 고대 왕국의 기틀 확립: 3C고이왕
- 대외적으로는 한 군현과 항쟁, 대내적으로 새로운 관제(16관등) 마련.
- 관리의 복색 제정
=> 왕권강화. 중앙 집권체제로의 진전.
[4] 초기의 신라
1> 사회 성격: 태백,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혀 폐쇄적 지형. 토착세력 강성. 유이민 세력이 토착세력에 흡수, 동화. 발전이 가장 늦음.
2> 성장: 경주 지방 사로국에서 출발. 박, 석, 김 3 부족 연맹체에서 이사금 선출 -> 6부족 연맹체로 발전. (왕위는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세습)
3> 고대왕국의 기틀 확립: 4C 내물왕
-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확장.
- 체제 정비: 김씨의 왕위 계승권 확립.
- 마립간(정치적 의미의 대수장) 칭호 사용.
☞ 김씨의 왕위 세습은 고구려 군사력과 밀접한 관련. 신라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가 신라내에 진주함. 증거: 호우총에서 발굴된 호우명 그릇에 광개토 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글씨체가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체와 유사.
4> 발전: 제도 개혁.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며 발전.
수리 사업과 우경에 의한 농업 생산력 증가.
우역과 시장 개설로 물자교류 활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함.
[5] 가야 연맹
1> 사회구성: 해변을 통해 들어온 유이민 세력+ 토착세력 => 토착 세력 강성.
2> 성장: 2,3 C 김해 금관가야 주축으로 소국 연맹체 형성 -> 소국을 병합하며 영토 확장. 통치조직 정비. -> 고구려와 백제의 항쟁과정에서 고구려 군대가 낙동강 유역에 진출. -> 금관가야 약화. 소국들의 탈퇴. -> 5C 고령의 대가야 중심으로 다시 연맹
※ 중심의 이동을 말해주는 증거: 5C 이후 고분유적을 살펴보면 경남 해안 지대 고분의 수나 규모는 위축, 내륙 산간 지역의 고분의 수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짐.
이후, 대가야는 남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신라나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
-> 6C 전반 대가야 연맹은 백제, 신라등의 침략으로 축소, 다시 금관가야로 중심이 이동.
-> 신라는 백제와 왜의 세력을 의식하여 서둘러 금관가야 연맹을 병합. 이후 대가야 연맹은 신라와 결혼동맹으로 세력을 유지하다가 내부의 분열로 신라에 병합 (562년)
☞ 가야가 끝내 중앙 집권국가로 정치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이유?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
3> 가야의 문화: 벼농사 짓는 농경 문화.
철의 생산과 중계무역으로 발전.
토기 제작 기술 보급, 수공업 번성.
한 군현과 예, 왜와 교역, 해상 중계무역 장악.
☆가야토기--> 일본의 스에키 토기에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