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7일(수), 경주 미타사에 가서 법장 스님과 굉현 스님을 만났다. 예상대로 이곳에는 관징 스님에 대한 자료가 꽤 많았다. 관징 스님이 1998년 강의하시던 손수 쓰신 차트, 사진, 그림 같은 것들이다. 더구나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강거사와 통화를 하고 3월 7일 만나기로 약속까지 한 것은 큰 성과였다. 자료를 모두 사진으로 복사하고, 굉현 스님이 직접 차로 금장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금장사 굉덕 스님은 관징 스님이 오시면 가까이서 먹을거리와 옷 같은 수발을 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정수기를 받은 사진도 보여주고, 절을 지으려고 했을 때 관징 스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도 보여주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상주 석문사에 다다랐다. 늦은 밤이지만 굉룡 스님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다 내놓았다. 관징 스님이 1997년 처음 왔을 때 찍었던 사진, 그리고 관징 스님이 써준 그림, 부채까지 합해 5점이나 되었다. 원주에 사는 보살과 전화를 바로 연결해 주었다. 관징 스님이 오시면 잘 모셨던 분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큰 소득은 바로 관징 스님이 처음 오셨을 때 모셨던 굉도 스님을 소개 받고, 굉도 스님이 낸 책을 2권 받았다. 모두 극락세계유람기와 정토선 정의를 실어 보급한 것이다. 이처럼 정토선을 수행하고 보급한 스님이 계셨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9시가 넘어 괴산 택시를 불렀다. 그런데 이 택시 운전수 최영철 거사가 바로 관징 스님이 오시면 여러 번 수송을 담당했고, 더구나 2002년 불교방송국 강당에서 법문하기로 했으나 관징 스님이 오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 최영철 거사가 중국에 있는 홍용대 후배에게 연락하여 오실 수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야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대화 내용을 기록하였다.
2월 28일, 연지암(宏道 스님)을 찾았다. 이름도 처음 듣는 이 스님은 관징 스님을 최초로 한국에 초청한 타공 스님과 함께 수행을 했었고, 자해 스님과도 같은 문도였다. 타공 스님이 처음 초청하여 오셨을 때 관징 스님을 친견하고 안동 임하 염불원에서 관징 스님 모시고 법회를 한 장본인이었다. 아쉽게 타공 스님과 자해 스님의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다. 관징 스님을 처음 만나 정토선을 접하고 난 뒤 지금까지 오로지 정토선 염불만 하여 자성염불까지 한 스님이시다.
우리를 안내한 최영철 거사에게 2002년 불교방송국 법회 때 관징 스님 비자문제를 해결한 홍용대 거사 이야기와 관징 스님께서 기사인 자신에게도 따뜻하게 해주신 이야기를 증언하여 기록하였다.
2013년 3월 4일, 굉철 거사가 신촌 ‘맑은나라 불교연구소’까지 와주어 한나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관징 스님 이야기를 나누었다. 8년간 관징 스님을 통역하며 모셨기 때문에 참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나와 동갑인 70살이지만 기억력이 놀라울 만큼 좋아 당시 통역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재생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나는 그때 이미 관징 스님 연보를 작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방문에 대한 기록은 모두 상의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무슨 문제만 생기면 전화로 당시 상황을 물어서 보충하곤 하였다. 관징 스님 일대기 한국편을 쓰는데 큰 도움을 준 산증인이었다.
2013년 3월 15일(금), 저녁에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원장을 만났다. 전병롱 원장은 그동안 관징 스님에 대해 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내가 모은 자료들을 모두 보여주고, 전원장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에 대해 나의 의견을 개진했다. 요점은 6년 반 동안 선정에 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징 스님은 어디에서 선정에 들어가 6년 반 동안 극락에 다녀왔다고 쓴 적이 없다. 다만 관세음보살의 안내로 다녀왔다고 했는데, 불보살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불보살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며 긍정했다.
관징 스님에게 굉명이라는 법명을 받은 전원장은 그날 저녁 집에 있는 법당에서 그동안 관징 스님을 의심했던 것을 참회했다고 한다. 선도 대사는 참회하는 사람이 진정한 대장부라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 관징 스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많은 곳을 방문했지만 가장 기대에 어긋나는 곳이 바로 이 싱가포르 남해보타산으로 기억한다. 사실 「극락세계 여행기」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책의 내용이 관징 스님이 처음 이곳에서 강의한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절에 대해 크게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다 모든 책에는 <‘정토선’ 수행을 하기 위해 염불 테이프가 필요한 사람은 싱가포르 남해보타산으로 연락 바람.>이라는 문구가 들어있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싱가포르에 연락을 하거나 찾아갔으리라고 본다.
관징 스님이 싱가포르 남해보타산을 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은 당시 중국 본토는 아직 국제적인 포교를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 남해보타산은 1987년 이 책이 나온 뒤 그런 역할을 해냈다. 1988년부터 시작하여 1992년까지 4년간 이어진 윈쥐산의 링쥬옌사와 미륵대전 불사 때 많은 싱가포르 신도들이 참석하였고, 1992년 세워진 관징 스님 연탑도 다 싱가포르 제자들이 불사를 한 것이다.
원우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도 관징 스님을 따라 두 번이나 싱가포르 가서 법회를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관련을 맺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7년 관징 스님이 입적하고 나서도 싱가포르 제자들이 찾아 왔다고 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2013년에 글쓴이가 가보니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미국에 갔을 때 왕박사가 한 말이 기억난다.
”관징 스님 입적하기 전에는 싱가포르 제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공법사나 대만 불광사로 모두 옮겨갔다.“
법보시하는 곳을 가보니 그 말이 실감 난다. 거의 100가지에 가까운 DVD를 법보시를 하는데, 모두가 정공 법사가 운영하는 정종학회에서 나온 것이다. 정공 법사 쪽에서 관징 법사를 가장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왜 그렇게 관징 스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었다.
제법 많은 전화번호를 가지고 가서 주지 스님 파밍 법사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처음 이곳에 갈 때는 1987년 처음 나온 「극락세계 여행기」 같은 자료나 몇 장의 사진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조용히 접어야 했다. 그저 「극락세계 여행기」의 탄생지라는 역사적인 장소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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