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부회장님이신 <원석>님께서 또다시 대작(?)을 내셨습니다.
발로 서울 곳곳을 직접 밟고다니면서 보고 느끼고 얻은 역사 지식을 세심하고 수려한 필체로 고증을 하였습니다. 책 편집 디자인도 멋지지만 근대화 시대 서울 지도와 희귀한 사진을 볼 수 있어 편안하게 쉽게 읽으면서 서울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소장이 필요한 책인 것 같습니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 광복 이후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하는 서울의 풍경 -
1980년대까지 ‘종로서적’은 서점이자 만남의 광장이었다. 핸드폰도 추억의 삐삐도 없던 그때 ‘종로에서 만나’라는 말은 곧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던 종로서적을 의미했다.
---「종로 길 | 모더니스트를 만나다」중에서
전후 명동에서의 명물은 ‘다방’이었다. 다방마다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이 달랐다. 문인들은 ‘모나리자’, 화가들은 ‘금꿩’, 방송인은 ‘라이뿌룸’, 연극인들은 ‘은하수’ 등으로 모였다. 다방은 이들의 아지트였다.
---「명동 길 | 문화 예술의 산실, 다시 꿈꾸다」중에서
삼각지는 시골에서 상경한 관광버스가 꼭 들르는 관광코스였다. 처음 접하는 네 방향 출구인 입체 교차로를 돌다가 출구를 못 찾아 헤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삼천갑자 동방삭도 아니건만 한 번 돌 때마다 수명이 1년씩 연장된다는 속설의 입소문이 나서 노인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기본으로 7번은 돌고 갔다는 이야기와, 3억 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하여 ‘3억 원짜리 도너츠판’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용산 길 | 금단의 땅, 문이 열리다」중에서
조선 시대에 목축장과 척박한 농지로 사용되던 여의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16년부터다. 일제는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하고 거주민을 퇴거시켜 그해 9월 길이 600m의 활주로와 격납고 공사를 끝내고 한반도 최초의 비행장을 만들었다. 일본과 만주를 잇는 중간 거점이 필요한 탓이었다.
---「영등포 길 | 군사비행장에서 한국 경제의 상징으로」중에서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장수라 했다. 이유는 마포에서 한양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살을 맞으며 이동하게 되면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에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채소장수라 했다. 해를 등지고 도성으로 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마포 길 | 서울의 성장 발자취, 한강의 기적」중에서
낮에는 객차로 사람들을 나르고 밤에는 화차로 인분을 실어 날랐는데, 밤이면 수도 없는 똥파리들이 화차에 붙어 파리들로 덥힐 지경이었다. 그 파리들이 낮이라고 해서 어디에 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붐비는 객차에도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왕십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을 ‘왕십리 똥파리’라고 불렀다.
---「동대문 길 | 가난이 만들어낸 끈질긴 생명력」중에서
해방 후 수색역 주변에는 은평에서 보기 힘든 큰 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섰다. 강원도 탄광에서 직접 운반해온 석탄을 가공하는 연탄공장들로, 1964년에 자리 잡은 삼천리연탄과 1970년대 수색으로 이전한 삼표연탄, 대성연탄, 한일연탄 등이다. (중략) 수색역 주변의 수색동과 증산동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까마귀 동네’로 불렸고, 서울에서도 유독 목욕탕이 많은 동네이기도 했다.
---「은평 길 | 서울의 경계점이 아닌 내일의 시작점」중에서
가리봉시장은 1976년에 만들어져 구로공단 노동자의 일상과 문화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여공들이 살던 벌집이 있는 곳이다. 가리봉시장은 가리봉동과 라스베이거스의 합성어인 ‘가리베가스’라고 불렸다. 구로공단 전성기였던 1970, 1980년대 이곳은 사람으로 넘쳐나는 유흥가로 구로공단에서 좀 노는 언니, 오빠들이 모이는 ‘핫 플레이스’였다.
---「구로 길 | 수출산업의 메카 구로공단 이야기」중에서
지금은 강남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 중간’이라는 뜻으로 ‘영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그 당시는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광주군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강남 길 | 정권이 만든 아파트공화국」중에서
결국 서울시는 구의지구 공유수면매립 당시 사용했던 방법을 강행하는데, 시내에서 배출되는 연탄재로 메우기로 한다. 그 위에 토사로 매립해 잠실택지개발공사가 마무리된다. 한때 토사 부족 사태가 심해지자 건설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헐어 거기에서 나오는 토사를 사용하려는 제안을 서울시에 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허가하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한성)의 대표적인 두 유적이 완전히 사라질 뻔했다.
---「잠실 길 | 올림픽을 치른 서울의 시그니처」중에서
첫댓글 와우, 바쁜 와중에도 또 책을 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꼭 사 볼께요~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