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직그림이 올라온 곳 :
https://www.youtube.com/watch?v=DVAfmoZuI2Y
☞ 옮긴이(잉걸)의 말 :
이 움직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그러니까, 지지난해)의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근세조선의 실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책( 『 경세유표(經世遺表) 』 )과 그 안에 담긴 이론이 그가 죽고 난 뒤 들고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의 ‘교재’가 되다니!
그리고 몸소 땅을 일구며 일하는 상민(常民 : 그러니까, 평민. 점잖지 않은 말로는 ‘상놈’)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 출신 지식인(다산[茶山] 선생)이 “(몸소) 밭 가는 이가 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다니!
나는 동학군이 맨 처음 들고 일어났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인 동학(東學)‘만’을 혁명의 근거로 내세웠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근세조선의 실학도 ‘혁명의 도구’로 삼았다는 걸 알아,
‘그렇다면, 비록 근세조선 후기의 실학은 지배층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어도, 민중에게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 졌고, 따라서 그것은 “가봇[절반]은 실패했지만, 가봇은 성공한 사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국수주의자들처럼 “(근세)조선에는 실학이 싹트고 있었기에, 스스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사학자나 서양/왜국(倭國) 학자들처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나라였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러니까, 내 생각은 한국 국수주의 사학과 식민사학 양쪽을 모두 뿌리치는 ‘제 3의 이론’인 셈이다).
서기 1894년에 일어난 동학 혁명이 그 이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이른바 ‘민란’)들과는 달리, 오래 계속되었고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으며 근세조선의 봉건왕조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비록 ‘반 봉건/반 외세’를 내세워서 호응을 얻기는 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신흥종교’였던) 동학뿐 아니라 (그래도 그 뿌리는 양반 사대부였던 지식인들이 합리성과 이성과 논리를 갖추어서 주장했고, ‘현실’에 뿌리를 두었던) 실학도 참고했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다면 역사학자와 『 역사 』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은 동학 교도들과 동학군이 실학을 어떻게 참고했는지를 더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말할 것도 없이, 동학과 실학의 만남/민중혁명을 통한 정권교체/‘안’으로부터의 바뀜이라는 근세조선의 움직임을 총칼로 진압한 근세조선의 관군과 근대 왜국[倭國]은 강하게 비난받아야 한다! 동학을 믿던 근세조선의 민중은 실학자들의 책도 ‘교재’로 삼아 서양/근대 왜국이 변화를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라와 사회를 바꾸려고 했는데, 근대 왜군이 그들을 잡아 죽임으로써 변화의 ‘싹’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지 않은가?).
또한 여름지기(‘농민[農民]’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가 아닌 양반 출신 지식인이 여름지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주장했다는 사실/백성이 아니라 한때 벼슬아치였던 사람이 관(官)의 횡포와 폭력을 고발했다는 사실도, 내게 ‘사람이 꼭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며, 그는 자신의 계급이나 성별이나 인종이나 신분을 뛰어넘어 짓밟히거나 빼앗기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수 있다. 또한 그는 “옳고 그름”이 “나/우리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하리라.
오늘날의 우리들(서기 2023년 현재, ‘왜국의 반[半]식민지 조선’이자 속국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또 다른 동학군이 되고, 또 다른 실학자가 되어 옛날(근대사)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에서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온전한 자유와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한 노력들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 단기 4355년 음력 12월에, “(잘못된/나쁜) 과거를 잊어버린 자들에게 그 과거는 되풀이된다.”는 한 역사학자의 충고를 되새기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