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떡
안 종 문
설, 보름을 지내고 그 해의 농사철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집안일은 감자눈을 따는 일이었다. 때론 밤늦게 때론 이른 새벽에 희미한 호롱불을 밝혀놓은 안방에서 엄마가 망태기에 담긴 씨감자를 재바른 손놀림으로 여러 조각을 만들어 또 다른 그릇에 담았다. 씨눈을 고르고 남은 감자는 별도의 바가지나 냄비 그릇에 담긴다. 어린 나도 엄마를 도와 고사리 손으로 그것들을 깎았고 쌀 위에 안쳐 먹곤 했다.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이른 봄날에 아버지는 소로 밭을 일구어 고랑을 만들어 놓았고, 우리 형제들은 재를 뒤집어쓴 씨감자를 꺼내 밭으로 옮겨다가 이랑 중간 높이에 한 뼘 간격으로 엎드려 심었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 씨감자가 얼까 소 마구간 퇴비거름을 내다 덮기도 하였었고, 더 따뜻한 봄날엔 외양간 인분을 낑낑거리며 퍼 날라 깔아주기도 하였다.
늴리리 버들피리 불 때면 감자 새싹은 어김없이 돋았고, 강가의 자갈밭에 꽂아놓은 버드나무 잎 색깔이 짙어지면 이에 뒤질세라 함께 어울려 장단을 맞추었다.
새 소리 바람 소리 들으며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 감자는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에 맞추어 자주색 혹은 하얀 별모양의 꽃을 피워 벌과 나비까지 불러들였다. 하지만 무당벌레들이 감자 잎이 맛있는지 그냥 두지를 않았다. 모내기에 바쁜 우리가 채 눈여겨 돌보기도 전에 유월의 땡볕 가뭄은 덩달아 감자이파리들을 녹여서 옷을 벗긴다.
모내기를 끝내고 돌아서서 보리 베기를 하였고, 보리 베기가 끝나면 장마가 닥칠까 서둘러 감자를 거두었다. 감자 대를 잡고 힘을 주어서 뽑아 올리는 일은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탄성을 지르며 어느 놈이 가장 큰 지를 서로 알아보는 놀이었다. 강변의 모래밭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엄마가 호미로 캐낸다. 눈깔사탕만 한 것 이상이면 비료 포대나 큰 고무 대야 혹은 양동이에 담아서 집으로 옮겼다.
튼실한 놈은 그 자리에서 끝이 날렵한 감자 숟가락으로 껍질이 벗겨져서 여름 저녁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이삼일을 그늘에서 바람을 쇈 감자는 별도의 그릇에 담겨 훗날을 위해 보관되었다. 선택되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은 잔챙이들과 제 뜻과는 상관없이 볕을 보고 자란 푸른 감자다. 그것들은 마당 한구석 감나무 그늘에 나뒹굴다가 바깥에서 일할 수 없는 비 오는 날이면 우물가에 옮겨져서 수동펌프로 길러진 물에 몸을 깨끗이 씻겼다. 헌 장독에 담긴 감자는 물에 잠겨서 세월을 익혔다.
장독 뚜껑은 노란 마대 종이로 덮은 다음 까만 고무줄로 꽁꽁 동여매었다. 그럼에도 해마다 한 여름철 우리 집 골목에 들어서면 감자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하였다. 어린 감자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썩는 아픔이었다.
그러기를 한 달, 독에 든 감자는 엄마 손에 주물러져서 형체는 사라지지만, 육신의 건더기들이 채를 통해 맑은 물속에 가라앉는다. 며칠을 우려낸 다음 건져진 건더기들을 삼베 보자기에 담아 물기를 짜내고 햇볕에 말리면 희뿌연 감자녹말이 만들어진다.
장맛비가 오거나 점심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날은 감자떡을 찐다. 뒷방의 감자녹말을 꺼내어 물을 부어 알맞게 주무른다. 가마솥 나무 채반에 삼베 보자기를 올려놓고 반죽이 된 것을 쏟아 부어 고루 편 다음 풋양대나 콩을 듬성듬성 뿌려서 찐다.
나는 감자떡을 만드는 엄마 곁에서 타작하고 남은 보릿단을 옮겨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허기를 참는다. 김이 무쇠 솥뚜껑을 밀치고 뿜어져 나올 때를 기다린다. 은근한 화기에 내 얼굴이 빨개질 무렵이면 내뿜는 김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한참을 뜸 들인 후에 솥뚜껑을 열어서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할 때 보이는 감자떡은 보기에는 물론이거니와 먹음직한 냄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뿜는 김의 열기를 피하며 부엌칼로 이리저리 열십자로 칼질한 후 조각들을 채반에서 떼어내어 그릇에 담으면 여름 한 철의 별미 감자떡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맨손으로 잡아 한 입을 깨물었을 때의 그 알싸한 맛은 감자떡의 진미이다. 손에 묻은 떡 찌꺼기까지 쪽쪽 빨아 먹었던 추억이 선하다.
출가한 딸과 사위가 손자, 손녀를 앞세워 찾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아낌없이 감자떡을 준비하였다. 나는 곧잘 엄마 곁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에 타는 보릿단 소리도 신이나 덩달아 축포소리를 들려주었다. 가을걷이 끝날 때까지 감자떡은 옥수수와 더불어 농촌의 큰 간식거리로 제 소임을 다했다.
지금도 감자떡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엄마의 옛 모습과 나의 어린 시절이 선하게 떠오른다. 한 시도 쉴 틈 없이 일하시며 자식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해주시던 우리 엄마. 별다른 간식이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생생한 추억이다.
올 추석날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말을 걸어보았다. 엄마가 해주시는 감자떡을 먹어보고 싶다고.
대답하시는 말씀 “감자떡 참 마싯데이. 어디 감자가루 만들어 놓았나?” 이젠 엄마의 감자떡을 먹어볼 수 없다. 무심한 세월은 엄마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
지금은 엄마 대신 아내의 감자떡을 먹고 있다. 굵고 큰 감자를 시장에서 사와 강판에 갈아 즉석에서 만들어 준다. 맛은 더 있지만 어릴 때의 그 감자떡 냄새를 느껴볼 수가 없다. 가마솥 부엌 아궁이에서 보릿단 타는 냄새와 함께 그 옛날의 감자떡 냄새가 그립다. 가무잡잡하고 쌉쌀한 감자떡을 맛보고 싶다. 그 시절처럼 손으로 집어서 눈, 코, 입 온몸으로 먹고 싶다. 요즘처럼 식구들만 오붓이 먹는 것보다 이웃과 나누어 먹었을 때가 맛이 더 있었던 것 같다.
감자떡은 밀수제비와 더불어 여름철의 별미 음식이었다. 감자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차례로 그려보면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옛날 가정에는 집집이 자녀가 감자 캐듯 주렁주렁 매달렸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달랑 두셋이 전부다. 그마저 감당하지 못해 버거워하는 씨감자가 요즘의 우리로 보인다. 비록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거나 그 무엇을 선택하는 여지가 사람에게는 감자와 다르게 있다손 치더라도 자라는 장소와 천기와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또, 개인 삶의 결실들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화유산으로 볼 때 감자떡도 그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 무게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세월의 산물이다.
감자 씨가 될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감자떡 재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하며 가을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첫댓글 진갱빈 가족분께서는 위의 글을 읽고 잘못 표현된 곳을 아시는대로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올 연말 <수필사랑> 책자에 실릴 제 수필 작품이기에 .... 설날에 모이면 그 보답을 정중히 올리겠습니다.
수고하셨네요 잘읽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부단한노력으로 자연스런 경험,느낌과 되고있네요`부족한형수가``혹은 다른사물명(개란, 탁구공)등도좋지않을까요
과바람님의수필사랑***
마지막자신의교훈도 전
감자크기표현을 애기
아! 그렇겠군요. 참신한 생각을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덕분에 서두도 결미와 어울리도록 손보아 보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