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헤겔 (F..Hegel, 1770 - 1831)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2원론을 극복하여 1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그는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후 2년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부터 베를린대학 초빙교수로 1818년부터는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 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1. 헤겔이 쓴 자필이력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 부모: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 운송회계사 고문 그리고 어머니 크리스티네 루이제 프롬, 개인교수뿐만 아니라 고대어 및 현대어 그리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슈투트가르트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수업을 받게함으로써 교육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18세에 튀빙겐의 신학원에 입학하였다. 2년 동안 고전문헌학을 전공으로 하는 슈뉘러(Schnürer), 철학과 수학을 전공으로 하는 플라트(Flatt), 벡(Beckh) 밑에서 공부를 한 후,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잇달아서 3년 동안 르 브레(Le Bret), 울란드(Uhland), 스토르(Storr) 그리고 플라트의 지도하에서 신학과 관련된 학문을 공부한 끝에 슈투트가르트의 신교 총무원에서 실시한 신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과 지원생으로 등록되었다. 무모의 희망에 따라 설교사직을 선택하였으며 신학이 가진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신학 공부에 충실하였다. 신학과 졸업 후, 나는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직업들 가운데 실제 설교사직에 별로 구속되지 않는 직업, 이를테면 고전문학과 철학 연구에 필요한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상이한 조건 밑에 생활하면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직업으로서 가정교사직을 나는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았으며, 여기에서 내가 결정한 삶의 과제인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6년간 이 두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나는 철학에 마음과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예나대학의 명성은 내 장래를 위해 보다 훌륭히 공부할 수 있고 그리고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나는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 전자의 불충분한 점에 관한 논문을 써 그 곳에 지원하였으며, 얼마 후 나의 박사학위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 (De orbitis planetarum)의 공개 변론을 통한 심사에서 그 곳 심사위원회로부터 교수 허가를 받았다. 나는 셸링 교수와 함께 "철학비판잡지" (Das kritische Jurnal der Philosophie) 두 권을 간행했으며, 이 가운데 나의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어떻게 상식이 철학을 취급하는가, (2) 고대와 근대의 회의주의에 관하여 (3)칸트, 야코비 그리고 피히테의 철학, (4) 자연법에 관한 여태까지의 개정. 3년 전부터 철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나는 여러 강의를 하였으며, 작년 겨울에는 수많은 학생이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지난 해 공작 관할의 광물학 협회의 제2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리고 최근에는 자연 연구 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다. 수많은 연구 가운데 철학이 나의 천직으로 굳어졌기에 나는 친애하는 관계 당국으로부터 정교수로 채용되기를 갈망할 따름이다.(1804년 당시 자필로 쓴 헤겔의 이력서)
이 이력서를 쓴 지 1년 후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1807년에는 헤겔 관념론의 핵을 이루는 정신현상학이 출판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생활 면에서 헤겔은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 루트비히 피셔를 얻지만, 1811년 22살된 처녀인 마리 폰 투허(Marie von Tucher)와 결혼을 한다. 이 사이에 1808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 들인다. 1812년 논리학이 빛을 보게되며,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후 다음 해에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엔치클로패디)을 출판한다. 1816년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옆 사진)의 후임 교수로서 초빙되어 1831년 사망할 때까지 연구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2. 헤겔 사상의 사회적 배경 및 철학적 기초
1)헤겔 정치사상의 역사적 배경
독일관념론은 18세기에 그 성립되었으며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유럽은 식민지쟁탈전쟁, 프랑스혁명, 독일 3월혁명도 일어났다.175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19세기 중엽에는 이 두 혁명은 독일시민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하고 또 근대화를 수행했다. 이 사이에 독일시민사회는 형성되고 독일자본주의는 성장했다. 영미에서 처럼 여기서 필연적인 사회경제적 과정은 시민혁명이었다. 즉 산업자본주의의 봉건적 토지소유에 대한 투쟁과 그 승리가 관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독일사회에 있어서 승리를 얻은 것은 산업자본주의만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또 봉건적인 토지소유자 들만도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뒤늦게 근대적 산업자본주의 코스에 들어간 독일적 상황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자본도 발전하였으나 이에 대응해 토지소유가 또한 독자적 근대화과정을 걸어가면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독일에 있어서 봉건주의가 최초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라인강 좌안에서의 프랑스의 외래적인 지배에 의해서였다. 그곳에서는 봉건적 및 교회적 소유지는 농민에게 분배되고 농민은 자유로운 토지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봉건적 토지소유 형태는 독일의 다른 지방에서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해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도 봉건적 소유형태에 일대 변혁이 나타났다. 농민해방(Bauernbefreiung)이 그것이다. 이 농민해방으로 농민은 무산화하여 그 일부는 새로이 대지주가 된 융커(Junker)의 밑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은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전제가 실현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브란덴부르크(Brandernburg), 포머른(Pommern), 쉴레지엔(Schlesien), 프러시아(Prussia), 포젠(Posen) 등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이 시대는 1750년부터 1850년경에 이르는 100년간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에서는 1830년경에 아직 수공업이 우세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지극히 빈궁한 생활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예부터 상업지나 항구도시에서는 다액의 자본이 보유되어 있었다. 대지주도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해서 자본의 축적자가 될 수 있었다. 수공업조합의 소수 거물상들은 또한 약간의 자본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이 가난해진 농민의 대부분을 자기슬하에 포섭하여 공업에 종사하게 하고 전대제도(前貸制度)를 발생하였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수공업의 우세 속에서 전대제도의 발생은 농촌보다 다소 뒤졌다. 거기에는 대부분 쭌푸트(Zunft)의 사장(師匠)이 그 축적한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쭌푸트의 직인의 대부분이 쇠락하여 전대제도의 노동자가 되었다. 특히 쉴레지엔, 작센주의 아미공업을 위시하여 각종의 織維공업에서 행하여졌다.이러한 전대제도의 발달은 공장제수공업으로 넘어감을 의미했다.
2) 헤겔 정치사상의 철학적 기초
헤겔 철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거성인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칸트 철학의 근간은 인식론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칸트는 소위 '심리 철학', 윤리학 그리고 우주론과 신학에 접근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인데, 이 개념은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는 칸트에게 물론 지대한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아'의 문제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헤겔은 '개념'의 문제, 칸트가 주장하는 인간 사유의 산물 자체를 독자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론을 넘어서 다른 방향에서 인식론에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 일종의 '논리적 범주'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운동은 여러가지 헤겔 철학 용어로 풀이되는 바, Idee (개념, 이념), Natur (자연), Geist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용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3. 헤겔 사상의 핵심적인 원리와 주요 논의
1) 진리로 가는 변증법
변증법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사람을 설득하는 문답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일부 소피스트가 부정(不正)을 정의(正義)라고 우기는 기변술(奇辨術)로 사용하면서 변증법을 철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존재했다. 플라톤은 내면화된 이데아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박(論駁)의 기술 또는 명제의 귀납적 탐구술이라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칸트의 경우에도 순수이성이 그 원리를 그르쳐 형이상학적 문제에 적용했을 때에 생겨나는 가상(假象)의 논리를 변증법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성이 범하는 모순의 적극적인 의의를 포착했다. 이를 통해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대변되는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개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 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후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 1796~1862)는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정한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결과물은 또다른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이러한 변화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테제(These), 정립(定立)·명제(命題):
원래부터 정리된 하나의 주장. 변증법적 전개의 제1단계
(추상적·오성적 규정).
안티테제(Antithese), 반정립(反定立)
정립이 내적 모순으로 낳은 대립명제(對立命題). 변증법적 전개의 제2단계
(변증법적 부정적 이성적 규정)
진테제(Synthese), 합(合)·총합(總合)
정립·반정립의 모순의 통일. 변증법적 전개의 제3단계
(사변적·긍정적·이성적 규정).
즉자(卽自, an sich)
그 자체에 따른다는 것. 아직 분열 대립에 이르지 못한 변증법적 전개의 제1단계. 따라서 '즉자적(卽自的)'이란 원래 그 자체는 타와 관계 없다라는 것이나, 잠재적·무자각적인 것이 된다.
대자(對自, für sich)
자신에 대립하고 있는 것. 자기가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는 변증법적 전개의 제2단계. '즉자'의 단계에서 이미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모순이 노정된 단계로서, 즉자에 비하면 한층 자각적이다. 이 대립은 또한 '즉자 및 대자'의 단계에 이르러 통일되나, 그것은 즉자 때의 일체성(一體性)과는 달라서 자기 자신의 내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자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양(止揚, aufheben)
양기(揚棄)라고도 한다. 독일어의 아우프헤벤(aufheben)에는 '보존하다. 보관하다'란 뜻과 '폐지하다. 폐기하다'라는 상반된 뜻이 있으며, 헤겔은 이를 독일어가 지니는 사변적 성격이라 하여 변증법 용어로 사용. 정립·반정립의 대립이 총합 단계에서 통일될 때에는 정립·반정립의 규정 존립이 부정되면서도 그 내용은 보다 고차적인 차원에서 보존되며, 개념이 더욱 구체화된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은 후 일 헤겔 좌파 철학자들을 거쳐 맑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2) 절대이성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우주는 하나의 단일한 마음(the singular mind; Mind)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헤겔에서는 눈 앞의 현상과 관념적 실제가 일자一者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래서 또한 인간과 신 역시 일자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에게 우주는, 한마디로, 심(心)일원론의 전체론적 우주이다.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수양론 혹은 방법론이 없을 뿐, 고대 중국의 유학에서 이미 제시했던 유심(心)론과 아주 유사하다. 유학에 의하면, 형이상의 체(體)(substance)로서의 인(仁)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와 유사하게, 헤겔의 심(心_일원론에서 마음=이성이다. 그리고 형이상의 체體로서의 '이성'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즉, 형이하의 용用으로서의 이성)이 바로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정신', '절대정신', '세계정신', '이성', '절대이성', '세계이성', '절대자', '신', '참 실제', '현실', '현실의 총합' 등은 동의어다. 이런 까닭에 헤겔의 이론과 사유는 이분법적 사유에서 볼 때 모호하고 이중적이고 혼란스럽다
헤겔에게 절대이성은 변증법에 의해 도달되는 최고의 지점, 즉 더 이상 변화될 필요 없는 최고의 위치를 뜻한다.
헤겔의 설명에 의하면, 강에서 한 특정 지점의 사태는 그 상류에 있는 모든 사태들이 총합되어서 그 지점의 정황과 결부된 결과이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어떠한 사태도 이와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떤 사태를 두고 누구나 '이성'적 사유를 하는데, 이 현재의 사유에는 이전 세대들의 관념적인 사유들과 물질적인 조건들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얼핏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과 고정화된 절대 정신은 상충되는 맥락이 있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전제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노에시스 노에세오스(noēsis noēseōs)개념을 차용하여 절대 이성은 순수 사유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로서 이러한 모순점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3) 역사발전론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일체의 현실은, 과거에서건 혹은 현재에서건 혹은 미래에서건 간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성'이 구현되어 드러난 현장이라는 것이다. 헤겔에서 역사란 '이성'이 만들어 나가는 역사, 즉 '이성의 역사'인 것이다.역사는 '이성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한 시점의 사태만을 따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얼마던지 있지만) 세계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관통해서 보면 반드시 진보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다. 헤겔에 의하면, 그것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패턴의 변증법적 원리에 의해서다. 이 변증법적 운동은 어느 한 순간도 동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운동의 어느 한 순간도 '되어감(becoming)'의 과정 중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어느 한 시점에서 포촉할 수 있는 정태적 순간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사관은 기계론적이며 진화주의적인 역사주의로 특징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유럽사상가들은 근본적으로 헤겔이 말하는 '총체성의 역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지적 활동은 통시적으로 진전되는 '역사적 발전'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이루어졌다. 19세기 중엽에 비서구문명들에 관한 많은 양의 정보가 수집되고 축적되자, 헤겔의 역사의식에 기초된 당시 서구의 사상가들은 그 자료들을 통시적인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그리고는 인류문화의 다양성을 전적으로 통시적인 '역사적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개념화했다. 다시 말해, 문화적 차이 혹은 다름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직선적인 역사의 진보적 발전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더 최근의 것, 더 복잡한 것을 더 발전한 것 그래서 더 좋은 것이라고 간주했다. 인류학을 한다는 것은 문화의 역사적 진전을 진화론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총체성의 단일한 세계사적 인식 : '진화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총체성의 단일한 세계사'라는 패러다임은 헤겔 류의 역사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헤겔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콩트, 마르크스, 스펜서, 프로이트를 위시한 많은 사상가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었다. 헤겔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 각각 서로 다른 문화들을 '이성'의 진화적 발현단계들이라고 개념화했다. 마르크스는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생산양식'의 역사적 진화 단계들이라고 보았다. 콩트는 모든 인간사회들이 형이상학적 단계를 지나, 초기 이론적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실증주의적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고, 각 사회들은 이러한 진화적 역사발전의 단계들 중에 어느 한 단계에 있다고 간주했다. 스펜서는 사회적 이질성의 증대에 따른, 프로이트는 성심리의 발달에 따른 역사발전의 단계들을 각각 제시했다[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학적 진화론'이 대두되었다고 보는 것은 중대한 오류다. 사회진화론의 원조는 헤겔이고, 상기 스펜서가 사회학적으로 체계화했다].
4) 역사의 종말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이라는 책을 써서 19세기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 와서 그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역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유이다. 그에게 자유란 사람이 생각하는 힘인 이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란 자유라는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유가 고대 세계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인간이 세계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신적인 작용이 스스로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그를 관념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오리엔트 세계, 그리스 · 로마 세계, 게르만적 세계가 그것이다. 오리엔트 세계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고 그리스 · 로마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다음 단계이고 게르만 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 가운데 오리엔트 세계, 즉 동양 세계는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자유를 스스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세계사는 자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인 '보편사'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쪽으로 움직여 마침내 유럽이 그 절대적인 종착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5)헤겔의 법철학-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관념
법철학요강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1)
(1) 국가의 성격에 대한 논의
(1)논쟁1: 헤겔에 대한 논란중 하나는 그가 자유주의이론가인지 국가주의자인지에 대한 논의이다.
헤겔이 베를린 시절 피력한 국가철학은 “프로이센 복고 정신의 정주(定住)”인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라는 비판이 있는 반면에, 그의 사상 안에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자유주의적 요소들”3)은 현대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싹이라는 예찬 또한 있다
(2)논쟁2 : 유기체국가론: .(미국독립) 국가는 한몸인가? 국가가 원자(atomon)적인 한낱 물체적 개체(individuum)가 아니라 인격적 개체, 곧 개인(Person)들의 구성체이되, 그 구성원들이 의사에 따라 수시로 조립하고 해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몸(one body)’으로 움직이는 한에서는 그 구성 요소 낱낱을 넘어서는 오히려 유기체 같은 것으로서 개개인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인격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면, 헤겔의 ‘윤리적 전체’로서 국가의 사상은 그 타당성을 잃 지 않는다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卽自的 : an sich) 현실화인 낮은단계의 것->참다운(보편적)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다시 도의태(道義態)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여 간다. 이 도의태의 단계에서 정신은 사랑(愛)의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그것의 부정인 개인주의적 이익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로 전진하고, 다시 시민사회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국가라는 최고의 단계에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이 국가라는 완성 단계에서 정신은 완전한 자기실현(보편적 자유)을 얻는다. 국가를 이념과 현실의 완전한 합치한다고 본다. 그 결과 국가를 최종의 것으로 보는 헤겔의 사상은 국가 절대주의에 빠지는 위험을 가지게 되었다.
(2)시민사회(civilis societas)
키케로(Cicero) 이래로 칸트에 이르기까지 ‘국가’(civitas)는 곧 시민사회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시민(cives)’만이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한에서, 시민의 사회는 당연히 국가로 납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누가 ‘시민’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시민의 자격요건에 대한 생각은 칸트의 「법이론」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칸트의 말처럼 “수동적 시민이라는 개념은 시민 일반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들, 이른바 ‘집’(oikos)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생명유지를 위한 기초적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자들은 단지 “가정 사회”(societas domestica)에 속할 뿐이고, 자기의 “생존이 타인의 의사에 덕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 그에게 고유한 권리와 힘에 덕 입고 있는”17) 이른바 “능동적 시민”만이“시민사회(societas civilis) 곧 국가(Staat)”의 구성원 즉 “국민(Staatsbürger, cives)”으로 간주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 제헌의회에서도 아직 여성, 노예, 극빈자 등 “수동적 시민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시민 분리는 「인간과 시민[공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에서 보듯, 인권 사상에 의해 ‘시민’이 ‘인간’ 개념에 녹아들어감에 따라 이미 폐기되기 시작하였다
헤겔의 시민개념: 헤겔이 시민사회의 구성원을 “(부르주아로서의) 시민(Bürger)”으로 놓고, 그것을 필요욕구의 입장에서 본래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표상의 구체적 존재자”(GPR, §190)로 보았을 때, 헤겔은 더 이상 ‘수동적’ 시민과 구별되는 ‘능동적’ 시민만을 시민사회의 성원으로 보지 않았다. 헤겔의 ‘(부르주아) 시민’은 단지 능동적 시민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귀족이나 농민, 또는 천민(Pöbel) 내지 무산자 계급과 구별되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시민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는 개인(Privatperson)” 일반을 지칭한다.
뉴른베르그 시절(Philosophische Propädeutik, 1810ff.) ‘국가사회(Staatsgesellschaft)’의 이름 아래서 ‘시민사회’에 대한 언급 없이 “자연적 사회”(TW4, 245)로서 ‘가족’과 이로부터 보편적 국가사회에로 확장된 “법적 관계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TW4, 246)로서 ‘국가’를 논했던 헤겔이, 시민혁명과 함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회구조의 대변화를 보인 18세기 이후 유럽사회의 구조상의 대변화를 통찰하고 ‘가족’과 ‘국가’와는 다른 윤리 체제로서 ‘시민사회’에 각별히 주목했을 때( 법철학요강 , 1821), ‘시민사회’는 더 이상 ‘국가’와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헤겔은 개인의 주체적 자유와 사적인 경제활동이 중심을 이루는 “시민적 생활”이 공동선의 이념 아래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정치적 생활”(GPR, §303)이 아직은 아님을, 그러나 그렇게 발전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헤겔에서 “시민사회는, 비록 그 형성은 국가보다 더 늦게 되었지만, 가족과 국가 사이에 등장하는 분기점(Differenz)이다.” 시민사회를 경험한 국가는 더 이상의 가족적인 미분화된 ‘우리’를 구성 원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통일을 이룬 ‘우리’를 주체로 갖는 윤리 이념의 실현태인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게서 ‘시민사회’는 특수가 보편화하는 매개로 이해되고 있다.
이같은 인식은 헤겔의 적대적인 철학자들인 마르크스(K. Marx), 엥겔스(F. Engels)를 포함한 헤겔 국가철학의 적대자들조차도 그 적절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시민사회의 구성원은 애당초 각자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여기는 “구체적인 인격”이며, 이 인격은 자연의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필요와 욕구의 주체로서 자기 의사에 따라 행위한다.
시민사회의 분화 '정치경제체제', 법체제, 경찰행정 및 직업단체
시민사회 형성의 내막을 이렇게 파악한 헤겔은
①시민사회의 토대구조:필요욕구의 체계로서 정치경제학
시민사회는 ‘필요욕구의 체계’로서 ‘정치경제 체제(Staatsökonomie)’, “자연적인 필요욕구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조정된 체계”로서 사회적 생산의 분점과 신분계층의 형성
②‘시민사회’의 ‘국가’로의 이행 요소: (1)사법제도와 (2)경찰행정 (3)직업단체
(2)“법이 확고한 보편적인 것”으로 의식되어 효력 있는 것으로 ‘정립된 것(das Gesetzte)’,즉 “법률(Gesetz)”에 기반한 ‘사법 제도(Rechtspflege)’, 필요 충족의사적 행위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거나 불법을 저지를 우연성에 대한 배려와 특수 이해관심[이익]으로부터 공동 이해관심[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경찰행정(Polizei) 및 직업단체(Korporation)’ 등의 “세 요소”를 갖는다고 본다.
‘정치경제 체제’란
헤겔의 시민사회론은 “외면적 국가”의 국면인 근대 ‘시민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근대의 정치-경제적 시민사회가 이성성을 현실화해 진정한 국가로 고양해 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가사(oikonomia)에 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공민(citoyen)들만이 시민으로서 공공의 일 (res publica)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적 국가(polis, civitas)에서 ‘시민사회(civilis societas)’는 곧 ‘국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의 구성원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는 사인(Privatperson)”으로서의 ‘시민(bourgeois)’이다. 이들을 성원으로 갖는 ‘시민사회’는 아직은 보편적 의지의 현실태인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들이 시민사회의 체험을 통해 단지 이기적으로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수한 목적을 보편적인 목적으로 고양시킴으로써 하나의 전체가 될 때 ‘국가’는 비로소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헤겔의 시민사회론은 그 과정을 서술한다. 헤겔은 근대적 ‘시민사회’를 다수의 인격들로 특수화 한 개별자들이 “절대적 통일” 없이 “원자론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비상국가”의 형태로 본다. 시민사회는 상호간에 ‘나’를 목적으로 ‘너’를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전면적인 상호 의존체계”로, 거기에는 “만인의 상호의존의 전면적인 뒤엉킴”이 있다. 각 개인은 자신의 생존과 안녕 및 권리 확보를 의도하되, 그러나 그것은 만인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실현된다. 그래서필요욕구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조정된 체계”인 “법률”에 기반한 ‘사법제도’, 필요 충족의 사적 행위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거나 불법을 저지를 우연성에 대한 배려와 특수 이익으로부터 공동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경찰행정 및 직업단체’ 등의 “세 요소”를 갖는다. ‘시민사회’는 아직 윤리적 현실태는 아니지만, 시민사회에서의 개인의 자각과 발전 체험이 ‘국가’를 보편 속에 특수가 묻혀버린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족장 국가’가 아니라 특수와 보편의 구체적 통일체인 ‘입헌 국가’로 성립 가능하게 한다. 시민사회의 도야과정에서 “개인들과 계층들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 상호간의 관계, 또 개인들의 중심과의 법적 관계”의 규정이 생기고, 이 규정의 보편화가 ‘국가의 틀’ 곧 헌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가족과 함께 국가의 토대이다. 국가는 가족과 시민사회의 지양적 통일체, “개별적 전체”로서, 국가는 이를테면 가족적 시민사회 내지는 시민사회적 가 족이다.
개인, 가족, 시민사회의 현실태인 국가의 일은 그 구성요소들과 관련하여 이중적이다. 국가의 일은 “한편으로 개개인을 인격으로서 보존하고, 그와 함께 법을 필연적인 현실로 만들고, 다음에는 일차적으로는 각자가 스스로 배려할 것이기는 하지만 단적으로 보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의 안녕을 촉진하고, 가족을 보호하고, 시민사회를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과 시민사회를 그리고 “스스로 중심이고자 애쓰는 자인 개별자[개인]의 전체 마음씨와 활동을 보편적 실체의 생으로 복귀시키고, 이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힘으로서의 그에게 복속된 저 권역들에 간섭하고,그 권역들을 실체적 내재에서 보존하는 것이다.”(Enzy., §537) 살아 있는 실체, 곧 주체로서 국가는 “특수한 활동들로 구별되어 있는 유기적 전체”(Enzy., §539)로서 분절된 개인들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생명성은 분절된 개인들의 순전한 묶음 이상의 것이다. 개인들의 활동들은 비록 충분히 의식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이성적 의지의 ‘하나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그 개념을 그 활동들의 결과로서 생산한다.”(Enzy., §539) 그러하기에 국가는 개인들의 궁극목적으로서, 개인들이 국가에 귀속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국가계약설을 주장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래서 헤겔은 국가는 결코 구성원들의 도구적 합리성에 의한 자의적 “계약”의 산물이 아니라고 본다.(GPR, §75 참조) 계약이란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체결할 수도 있고 해지할 수도 있는 것으로 물건을 두고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격이 그의 의지를 어떤 물건에 집어넣을 때, 그 물건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인격은 그의 의지를 이 물건에 집어넣을 수도 있고, 저 물건에 집어넣을 수도 있으며, 그 물건에 집어넣었던 의지를 다시금 빼낼 수도 있다. 한 물건에 집어넣어졌던 한 인격의 의지가 빼내지고, 그 물건에 다른 인격의 의지가 집어넣어지면 소유주가 바뀐 것이고, 그때 물건은 양도된 것이다. 이와 같이 물건을 “중간자”로 하는 두 의지 사이의 관계에서만 자유로운 “계약”이 성립할 수 있다.
5.헤겔의 미학
헤겔의 미학강좌는 본인이 작성한 원고는 현재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술을 연구하는 학문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예술 실천과 가장 가까운 것은 음악학, 미술학, 연극학, 무용학, 영화학 같은 개별 예술학이다. 이들은 다른 장르를 연구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장르를 연구하려면 비교연구를 해야 한다. 예술에는 분명 개성 외에도 공통성이 있다. 각 예술들을 통합해서 연구하는 학문이 일반예술학이다. 일반이란 개별이 아니며 특수가 아니기에 일반 예술학은 개별 예술학보다 추상적이다. 미학은 일반예술학보다 더 추상적이다.
미의 철학은 미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서양미학의 주된 줄기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레하노프, 샤프츠버리, 허치슨, 버크, 흄, 라이프니츠, 파움가르텐, 칸트, 실러, 셸링, 헤겔, 마르크스, 크로체처럼 모두 철학가들이 미학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비록 칸트부터 '미의 철학'이 '심미의 철학'으로 바뀌었고, 헤겔에게서 '예술의 철학'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결국은 철학이다. 미학을 없애버리자고 주장한 것도 철학, 그 중에서도 분석철학이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미는 극히 선명하고 생동적이다. 이성적이고 사유적인 철학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근엄하다. 어떻게 이 둘이 함께할 수 있는가? 철학과 미, 심미, 예술은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이 분야들이 과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사고하고 대답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이 사고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즉 인간의 본질과 행복이며, 유한과 무한, 순간과 영원이다.
헤겔은 1818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여름학기부터 1829년 베를린 대학교 겨울학기까지 대략 다섯 번 정도 미학 또는 예술철학에 관한 강의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18년 여름학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1820/21년 겨울학기 베를린 대학교
1823년 여름학기 베를린 대학교
1826년 여름학기 베를린 대학교
1828/29년 겨울학기 베를린 대학교
그런데 정작 미학 강의를 위해 헤겔 본인이 작성한 원고는 현재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헤겔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필기해 놓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정리해 놓은 열두 편의 원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1818년 여름학기에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한 미학 강의와 관련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다.
1)호토(H. G. Hotho) 板 헤겔 미학강좌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판본은 헤겔 사후에 그의 제자인 호토(H. G. Hotho)가 베를린 강의에 사용한 헤겔의 수고와 수강자들의 필기 노트들을 모아서 1835년(초판)과 1842년(개정판)에 세 권으로 간행한 것이다.
지금까지 많이 읽힌 한글 번역본(≪헤겔미학 Ⅰ, Ⅱ, Ⅲ≫, 두행숙 옮김, 나남출판)도 이 판본에 기초한 주어캄프판(G. W. F. Hegel Werke in 20 Bänden, hrsg. von E. Moldenhauer & K. M. Michel,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69∼1971) 제13, 14, 15권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이후 이 판본을 ≪호토판 미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호토판 미학≫은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근래에 헤겔 미학의 문헌학적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는 바에 의하면, ≪호토판 미학≫은 헤겔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다분히 편집자인 호토의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상 수강자들의 실제 필기록들이 ≪호토판 미학≫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면서 이러한 혐의는 더욱더 짙어지고 있다. 호토는 헤겔 미학을 편집하면서 다른 저서들처럼 미학도 완결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분히 그러한 방향으로 헤겔 미학을 편집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호토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헤겔의 수고와 직필 노트들을 ‘재구성’하여 ≪호토판 미학≫을 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호토는 하이델베르크 강의 노트뿐만 아니라 1820/21년 베를린 첫 강의의 원자료를 편집에서 제외해 버렸다.
그 결과 주로 베를린 시기의 세 편의 미학 강의와 관련된 자료들을 호토 나름으로 재구성하여 펴낸 ≪호토판 미학≫은 헤겔의 본래 강의 내용에 들어맞지 않는 점들도 마치 헤겔의 것인 양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825년 강의 이전까지 헤겔은 미학 강의를 크게 두 부분, 즉 ‘보편적 부분’과 ‘특수한 부분’으로 나누고, 상징적·고전적·낭만적이라는 세 가지 예술형식들을 거의 동일한 분량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헤겔은 1828/29년 마지막 강의에서 ‘개별적 부분’을 추가하여 근대 예술 등과 관련해서 좀 더 풍부한 예들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미학 강의의 구성과 내용이 변화의 과정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호토판 미학≫은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호토판 미학≫은 ‘보편적 부분’에서 세 가지 예술형식들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내용을 ‘특수한 부분’이나 ‘개별적 부분’에서 반복함으로써 분량도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나고, 불필요한 중복으로 인해 오히려 내용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근래에 들어와 헤겔 미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호토판 미학≫이 헤겔 미학의 정본이라는 생각을 접고, 다양한 필기록들에 기초하여 이전보다 좀 더 다양하고 진척된 성과물들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헤겔 미학 강의를 새롭게 편집, 간행하고 연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A. 게트만ᐨ지페르트(Annemarie Gethmann-Siefert)는, 1833년 베를린 대학에서 행한 호토의 미학 강의 노트와 1835년에 출판된 호토의 ≪삶과 예술에 대한 예비연구(Vorstudien für Leben und Kunst)≫를 헤겔 미학 강의에 관련된 자료들과 비교 검토하여, ≪호토판 미학≫이 헤겔 자신의 미학이라기보다는 호토의 미학 강의의 완성본이라는 주장까지 제기한 바 있다.
≪호토판 미학≫에 대해 제기되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최근에는 헤겔이 미학 강의를 했던 시기별로 본래의 필기록들을 새롭게 편집하여 출판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미학 강의는 대략 열두 편 정도가 된다. 이 원자료들 중 1828/29년 강의가 아직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으며, 그 외 나머지 베를린 시기의 강의들은 현재까지 다음과 같이 독일에서 새롭게 편집, 출판되었다.
1820/21년 강의: Vorlesungen über Ästhetik. Berlin 1820/21. Eine Nachschrift. I. Textband, hrsg. von H. Schneider,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95.
1823년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Kunst. Berlin 1823. Nachgeschrieben von H. G. Hotho, hrsg. von Annemarie Gethmann-Siefert, Hamburg: Felix Meiner, 1998.
1826년 강의: Philosophie der Kunst oder Ästhetik. Nach Hegel. Im Sommer 1826. Mitschrift F. C. Hermann & Vitor von Kehler, hrsg. von Annemarie Gethmann-Siefert & Bernadette Collenberg-Plotnikov, München: Wilhelm Fink, 2004.
1826년 강의: Philosophie der Kunst. Vorlesung von 1826. Nachgeschrieben von P. von der Pforten, hrsg. Annemarie Gethmann-Siefert & Jeong-Im Kwon & Karsten Berr,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4.
2) 헤겔 미학의 주요내용
독일 관념론의 초기에 이상과 같은 모든 미학이론들은 대체로 낭만주의 시조의 영향 하에 있었고, 이념과 현상의 플라톤적 이원론을 토대로 하면서 예술에서 그 통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즉, 셸링에서 예술은 절대적 이념을 현상 속에 계시하는 것이었으나, 거기서는 내용으로서의 이념이 형식으로서의 현상에 대하여 아직 추상적 · 피안적 실체에 지나지 않고, 미적 직관에서의 양자의 통일도 결국은 기적적인 사실로서, 낭만주의적으로 강조된 데 불과했다. 졸거, 쉴라이어마허의 미학이론도 이념과 현상의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졸거는 이 이원적 단절을 비판적으로 강하게 의식하여, 美의 비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헤겔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의 독자적인 변증법적 사유에 따른 논리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현상의 저편에 있는 초시간적 보편자로서의 이념은 사실상 이념이라는 진짜 이름과는 동떨어진 추상물에 불과하다. 참된 이념은 현상과 대립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으며, 스스로 현상한다는 것까지를 본질적 규정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절대자란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이 부정을 매개로 하여 다시금 자기를 회복해 가는, 즉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주체로서 동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자에 대한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파악은 헤겔미학의 근본명제라고 불리는 미일반의 규정, 즉 “미는 이념의 감각적 현상이다”에서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이념은 자신에서 나아가 감각적으로 현상하고 이렇게 현상함으로써 비로소 미로서의 자기규정을 실현하는, 동적인 이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이념과 현상의 이원론은 이념의 자기발전이라는 일원론으로 통일되고, 이념은 바로 현상의 내부에서 동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되었다.
헤겔의 미학은 헤겔철학의 전 체계를 필연적 전제로 삼는다. 그의 철학체계는 정신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든 단계를 포괄하고 있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변증법의 논리에 의해 구분되어 있는 것이었다. 즉, 철학의 전 체계는 (1)우선 이념 자체의 내재적인 존재 방식을 다루는 논리학, 이념이 일단 자기를 부정하여 자연으로 되고, (2)이 타재(他在)에서 무기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점차 발전하는 과정을 다루는 자연철학, (3)그리고 이념이 이 부정태(否定態)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여 정신으로서의 자각에 도달한 이후의 과정을 다루는 정신철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러한 변증법적 삼분법은 정신철학의 내부에서도 반복되어, 개인의 의식에서의 주관적 정신과 역사적 · 사회적 세계에서의 객관적 정신, 그리고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절대 최고의 이념으로서 파악하는 절대정신, 이렇게 3단계가 구별된다. 또한 절대정신의 영역은 예술 · 종교 · 철학의 순으로 3단계로 구분되었다. 이 세 가지는 절대적 이념 혹은 신을 공통의 내용으로 하며, 단지 이것을 어떤 형식으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즉, 예술은 절대자를 직접적 대상에서 직관하는 것이며, 종교는 절대자를 믿음에 의해 내면적으로 표상하는 것이고, 철학은 절대자를 자유로운 사유의 힘에 의해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예술이 절대정신의 영역에 놓임으로써 미학에 높은 학적 의의가 부여되었으나,
다른 한편 예술은 종교 · 철학의 전(前)단계 에 놓이게 되어 셸링과 낭만주의의 예술관에서와 같은 최고의 진리인식으로서의 지위로부터는 밀려났다. 그것은 철학의 인식을 뒷받침한다는 의미에서 ‘증서’(Dokument)라고는 불리지만, 더 이상 철학의 최고 ‘기관’(Organon)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이상과 같은 예술의 체계적 자리매김을 근거로 하여 1817년부터1829 년 사이에 여섯 차례에 걸쳐 강연한『미학강의』(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는 (1)예술미 일반, (2)예술의 발전 과정, (3)예술의 체계를 다루는 3 부분으로 구분된다.
(1) 우선 헤겔은 미를 이념의 감각적 현상이라고 하는 앞서의 근본 규정에 의해 미 일반을 철학적으로 규정한 후, 미는 본래 예술의 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정신을 자연보다 고차의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쪽이 당연히 자연에서의 미보다 고차적인 것으로 된다. 물론 자연에서도 무기체의 미로부터 인체의 미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개념을 드러내 주는 아름다운 사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들은 모두 개념과 합치하지 않는 부분, 이념의 표현상 필연적이지 않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의미에서의 순수한 미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예술미에서는 모든 부분이 순화되어 있어서 이념에 적합하지 않는 불순물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체의 미에는 정신의 광휘가 특히 눈에 의해서 드러나는 데 비해, 예술미에는 모든 부분이 무수한 눈이 되어 정신의 빛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이렇게 순수한 유기적 총체를 헤겔은 ‘형상’(Gestalt)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참된 의미에서 미의 이름에 값하는 것은 형상에서 드러난 이념, 즉 ‘이상’(Ideal)이어야만 한다. 이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 일반에 대하여 예술미를 규정하는 개념이므로 헤겔의 미학은 예술미를 본래의 대상으로 하는 예술철학으로서 규정된다.
(2) 그런데 예술미, 즉 이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이념과 형상의 통일이기 때문에, 이념이 형상과 합치되는 관계를 근거로 3개의 예술형식이 필연적으로 분화되어 나온다. 즉, 예술이 이상적 통일을 아직 탐구하고 있는가, 이미 이것을 달성했는가, 더 나아가 이것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가에 따라 상징적 · 고전적 및 낭만적이라는 3개의 예술 형식이 구분된다. 예술의 역사적 발전은 - 이러한 예술형식들을 적용하여 설명하면 -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적 예술형식’을 정점으로 하여, 이 정점으로 상승하는 고대 동방의 ‘상징적 예술형식’과, 이 정점을 위로하여 예술로서는 이미 하강선을 그리는 기독교적 근대의 ‘낭만적 예술형식’을 전후에 배치한 웅대한 포물선으로 이해된다. 우선 상징적 예술형식은 말하자면 참된 예술을 준비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이것의 여러 모습은 페르시아 · 인도 · 이집트 · 유태 등 고대 동방의 예술들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관찰되는데, 여기서는 내용이 거기에 상응하는 형식을 모색하고 있을 뿐 아직 이것과 참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추상적 · 초감성적인 내용을 가지고 자연의 소재에 조야하게 접근하고, 거기서 자신을 무리하게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숭고한 특성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고전적 예술형식의 시대, 즉 고대 그리스 · 로마에서의 이념은 보다 구체적으로 되고 소재의 감각적 형식 속에서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리스 신들은 각기 독립된 이상적 인격을 가지고 살아 숨쉬며 아름다운 형상 속에서 그 본질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본래의 ‘이상’을 실현한다. 앞에서 헤겔이 일반적으로 예술미를 이념과 형상의 통일, 즉 이상으로 규정했을 때, 그는 그리스 고전예술을 그 전형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 세계야말로 예술의 시대, 예술가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되는 바, 헤겔의 미학은 여기서 고전주의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그러나 이념은 형상과의 이상적 통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발전하여 정신으로서의 자신의 보다 깊은 규정에 주목하여 형상과의 융합을 벗어나 정신의 내면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기독교적 근대의 예술형식인 ‘낭만적 예술형식’이 생겨난다. 이념과 형상의 통일은 여기서 다시 파괴되지만, 이념은 정신미로서 정신적인 ‘사랑’에서 현현함으로써 한층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 이념의 정신성은 자기에 적합한 형상을 발견하는 데 지나치게 충실하기 때문에, 그의 현상과 이상적 통일은 심정의 깊숙한 내면으로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화는 예술 본래의 모습에서 본다면 후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념의 변증법적 발전에서 본다면 오히려 예술을 초월하여 종교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확실히 헤겔에 따르면, 예술의 세대 - 정신이 절대자를 전적으로 예술에서 파악하고 있던 때 -는 이미 과거에 속한다. 근대는 철학의 시대이고, 그리하여 예술조차 철학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을 최고의 인식형식으로 간주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관은 부정되고, 예술은 이념의 발전단계에서 보나 현실의 역사에서 보나 철학 이전의 단계에 놓이게 되었다.
(3) 상징적 · 고전적 · 낭만적이라는 이상의 3개의 범주는 예술의 역사적 발전 원리로서 이용될 뿐 아니라, 예술의 체계적 분화의 원리로서도 이용된다. 즉, 건축은 가장 두드러진 상징적 예술로서 규정되고, 마찬가지로 고전적 예술로서의 조각이, 그리고 낭만적 예술로서의 회화 · 음악 · 시가 각각 거론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술들은 각기 일정한 범주 아래 포괄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 그 자신은 모든 범주를 거쳐 발전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건축은 질료의 추상적인 질서 속에서 신의 주변(울타리)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예술로 된다. 그러나 이윽고 개성의 빛이 질료에 개입하고 전당(殿堂)에 신 자신이 들어오게 되면, 정신적 내용은 매체와 완전히 합일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각에서 매체 그 자체는 의미를 상실하고, 정신 · 이념 이 매체의 개별성 속에서 문자 그대로 구체화되어 직접적으로 현현하고, 가장 고전적인 예술이 실현된다. 다음으로 낭만적인 예술들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시(Poesie)에 의해 실현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만적인 시의 개념에서는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각각자기 자신 속으로 귀환하여 서로 다른 것으로 되고, 그리하여 직접적 통일을 해소시키기 때문이다. 예술의 종류별로 보면 이 해소는 회화 · 음악 · 시의 순서로 행해지며, 그에 따라 점차 내면으로의 퇴행이 철저하게 진행된다. 즉 회화는 대상의 입체성을 평면에 묘사함으로써 3차원 속에서 1차원을 주관화하고, 조각에서는 인간의 감정 · 표상 · 행위 등 보다 한층 내면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원리이다. 그런데 음악은 소리, 즉 공간적인 존재 일반을 부정하는 가장 주관적인 매체를 이용하기 때문에, 내면적인 심정(Gemüt)을 직접 심정의 깊은 곳으로 침투시키는 예술로 되고, 한층 깊은 내면성에 도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시에서는 언어가 제공하는 표상 또는 의미가 내용을 담당하게 되어, 감각적 요소는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비중이 가벼운 것으로 된다. 이 표상은 주관의 내면에 직접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내면 속에서 객관적 · 대상적인 세계를 전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시에서의 내면성은 외적 존재의 특수성도 풍부하게 포괄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충실한 정신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헤겔 미학은 상징적 · 고전적 · 낭만적이라는 기본적 범주에 의해 예술의 역사와 체계가 상호 침투하게끔 된다. 일반적으로 헤겔이 말하는 역사는 이념의 체계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거꾸로 이념의 체계는 그렇게 역사적으로 전개된 것을 그 자신의 필연적 계기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헤겔에 의해 확립된 이러한 역사주의입장은, 예술을 철학에까지도 명확하게 관철되도록 하며, 예술미의 본질에 관한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변증법적 파악 및 예술의 역사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과 결합되어 헤겔 미학의 체계를 미학사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로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여전히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있으며, 헤겔의 철학적 입장 자체도 스스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 관념론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종래의 미학사상을 종합하고 웅대한 체계를 산출한 그의 미학사적 의의는 실로 거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독일 관념론의 미학은 헤겔에 의해서 종합되고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헤겔을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헤겔학파의 미학을 비롯하여 이후의 관념론미학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실증적 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관념론 미학으로서의 발전은 더 이상 별다른 진전을 보여주지 못 했다. 관념론 말기에 나타난 이러한 동요는, 다음에 다룰 쇼펜하우어의 독자적인 사상에서 이미 그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
6. 헤겔의 주요저작
저서 (생존시 출간)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 1801)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1812-16)
《철학강요》, (Enzyklopädie I-III, 1830)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
저서(사후 출간)
《종교철학》(Philosophie der Religion)
《역사철학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I-III, 1817)
《미학》, (Ästhetik), 호토 전면 재편집
《세계철학사》,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 18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