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과 여성 수행자 09 ◉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한 밧다 꾼달라께사 비구니
-- 여성불교 2013년 8월호 원고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는 처음 자이나교 교단에 출가하였다가 불교로 귀의한 비구니 스님이다.
밧다 꾼달라께사는 왕사성 대문호의 딸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창문으로 삿투카라는 도둑이 강도죄를 지어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밧다는 삿투카의 모습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렇게 우연히 찾아온 사랑이 그녀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를 형장에서 빼내달라고 간곡히 청하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간수에게 뇌물을 주고 감옥에서 그를 빼내었다.
감옥에서 벗어난 삿투카는 밧다의 집으로 피신하였고, 밧다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결혼을 했는데, 밧다는 진심으로 삿투카를 사랑하였지만 삿투카는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보석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어느 날 삿투카는 밧다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벗어나면, 어느 산에서 신에게 공물을 바치기로 했는데,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밧다에게 보석이 잔뜩 박힌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뜻이라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여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몇 가지 보석을 챙겨 출발했다. 두 사람이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삿투카는 본색을 드러내었다.
“나는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에만 관심이 있지, 당신 따위는 관심이 없소이다. 나는 오늘 당신에게서 보석을 빼앗아 멀리 달아나려고 하오.”
그녀는 ‘사형장에서 구해주고 결혼까지 했는데,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을까?’ 배신감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했는데, 이별 인사로 당신을 안아보고 싶습니다.’ 삿투카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하는 사이, 밧다는 그를 낭떠러지 벼랑 밑으로 밀어버렸다. 삿투카는 벼랑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했다.
밧다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자이나교 교단으로 출가하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의 어리석었던 행동과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극심한 고행을 하며 괴로운 마음을 견뎌냈다. 밧다는 자이나교의 승려들에게 부탁해 자신의 머리털을 야자 빗으로 몽땅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머리털을 뽑은 뒤 차츰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숱이 점점 많아지고 빽빽하게 곱슬머리로 자라났는데, 봉두난발 혹은 곱슬머리라는 뜻으로 경전에서는 그녀를 꾼달라께사(Kundalakesā)라고 부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마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밧다가 도둑을 진심으로 사랑한 일과 배신당함, 그녀가 재치를 발휘해 죽음의 순간에 살아난 것 등 그녀를 영웅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당시 여자들은 밧다의 용기 있는 행동과 과감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당시 여자들이 밧다를 칭송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도는 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를 천대시하는 나라이다. 고대에는 여자에 대해 ‘정신적으로 열등하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공부하지 마라’, ‘글을 읽어서는 안된다’, ‘베다 경전을 읽으면 장님이 된다’는 등 관습법적 개념이 존재했다. 여자의 유일한 의무는 남편을 잘 모시는 일이었다.
또한 인도 고대 『마누법전』(BC 200∼AD 200년경에 만들어졌다는 인도 고대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으로 당시 힌두인이 지켜야 할 법을 규정해 놓은 것)에 의하면, 초경 이전에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그 애비는 지옥에 간다는 풍습이 있어서 빠르면 5~6세에 시집을 보냈고, 늦으면 8살~초경 사이에 시집을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부모에게 한창 사랑받을 아이가 아닌가?! 여자는 시집을 가면서부터 그 집의 가정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새댁은 남편과는 떨어져 살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같이 살았다고 한다.
또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부인을 거느리게 되어 있었다. 한편 어느 지역에서는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하여 남편 장례식 때, 여자를 산채로 매장하거나 화형시키는 사띠(Sati)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가 근대까지 행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 인도에서 여자를 남자들의 장식용 물건처럼 여기던 시대에 밧다는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적인 고난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갔던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된다.
밧다는 오랫동안 자이나교 진리를 공부하고, 수행한 뒤에 더 이상 마하비라 니간타(자이나교의 교주)의 가르침에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곳을 행각하며 수많은 논사들과 문답을 나누었다. 밧다가 논쟁을 지속하면서 그녀의 논리성은 점점 발전했고, 논쟁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그녀가 새 마을에 들어서면, 언제나 마을 입구에 모래를 쌓아놓고, ‘나와 논쟁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이 나무판을 밟고 오시오’라는 팻말을 세워 두었다.
어느 날 사리불 존자가 사위성 교외에서 이 팻말을 보고, 아이들에게 그것을 밟도록 하였다. 이를 본 밧다는 사리불과 논쟁하기 위해 기원정사로 찾아갔다. 이렇게 해서 밧다와 사리불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리불은 그녀에게 먼저 질문하라고 하였고, 밧다가 사리불에게 질문을 하면 사리불은 물 흐르듯이 답변을 하였다. 사리불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유일한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는 사리불에게 인사를 올리며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겠다고 하였다. 사리불은 그녀를 부처님께 보내어 승가에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가 부처님을 만나고, 깨달음의 게송을 읊은 내용이 『장로니게』에 전한다. 밧다의 게송 가운데 109편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나는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예배한 뒤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어서 오라, 밧다여!’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이 말씀으로 나는 바로 득도得度해 마쳤다.”
당시 부처님께서는 여성이 출가해도 비구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환영을 하였고, 교단의 승려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출가하고자 한다면, 평등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평등을 내세웠던 진리의 불교가 부파불교 이후 승려들의 생활 문제에서는 비구 비구니 차별이 심한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장로니게』에서는 밧다 비구니에 대해 ‘일체 속박으로부터 해탈한 비구니에게 공양 올려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매우 빠르게 지혜를 얻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불교에서는 그녀를 첩혜제일捷慧第一 이라고 호칭하는데, 빠르게 최상의 지혜를 얻은 자라는 뜻이다.
밧다 비구니를 통해서 배울 점은 인생의 고난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인 만큼 과감하게 행동하는 추진력이다. 동서양을 통해 여자는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며, 마치 수동적인 성향의 여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현모양처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데, 이제가 시대가 변하였다. 여자라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투자하고, 개척해나가는 여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가 세계인들에게 비난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여성들의 권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불교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비구니 스님들! 재가 여성 불자님들!
그대들은 비구 스님이나 남성에 비해 하열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첫댓글 첩혜제일 밧다 비구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우리나라 승단도 비구니스님들에게 선거참여것을 주어야합니다.승단이 바로설려면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금강경이 무색합니다 ㅡ.ㅡ.....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