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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업(醫業 의술을 베푸는 직업)의 길
헤론(John W. Heron 혜론蕙論 1856~1890)은 1856년생이니 소생보다 96년 먼저 태어났던 분입니다. 의사가 되고난 다음해(1885) 우리나라에 의료선교를 왔다가 5년 만에 이질로 순교하셨습니다. 알렌을 이어서 고종의 어의를 했으며 제중원 2대 원장이었습니다.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은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1891년에 우리나라에 왔다가 3년 만에 발진티푸스로 요절하였습니다.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이들과 그 가족들 145명이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올 때마다 경건함이 저절로 묻어나는 양화진입니다. 그들과 후손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신 분들도 있고 6·25전쟁에 참여한 후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7월부터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오래 전부터 서울에 오면 가보고 싶었던 100주년기념교회에 혼자 가서 등록까지 하였습니다. 아직 처자식들은 대구에 거주 중이고 소생은 영등포 안세병원에서 9월부터 개업하기로 하였습니다.
30대 초반에 어린 자녀들을 뒤로 두고 이국땅에서 헐벗고 굶주린 조선의 백성들 한가운데서 묵묵히 진료에 임하다가 자신도 같은 전염병에 감염되어서 요절하신 분들입니다. 워낙 열악한 환경이라 선교사들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며칠 견디다가 그냥 본국으로 귀국한 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의이면 오늘날 대통령 주치의로 서울대학교병원 교수의사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힘없는 일반 국민들은 서울대병원의 교수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헤론은 1888년 정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았습니다.
아무리 그들을 닮아보려고 오밤중에 깨어서 묵상하며 환우들을 치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려지만 흉내조차 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아직 미혼인 2남2녀의 자식들을 생각하면 소생은 진갑이 지났어도 아직 눈을 감을 수가 없는데 헤론은 우리나라에 와서 태어났던 딸들을 생각하면 오죽했겠습니까? 창조주께서 소생을 데려간다면 방법이 없겠으나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그의 나이 서른 넷 헤론은 아내와 친구들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더 뜨겁게 더... 더... 사랑하고 싶소.”
해리어트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하실 수 있어요. 하시게 돼요.”
“병원에서 나하고 일하던 친구들... 나를 아는 한국의 친구들을 다 불러 주시오.”
병원의 조수들, 집인일을 돕던 사람들 모두가 헤론의 침상 가까이 몰려들었다.
헤론은 그들을 따뜻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나를 사랑해 주고 도와 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유언이라기보다 설교였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외치는 복음 전파였다.
그리고 잠자듯이 눈을 감았다. 1890년 7월 26일의 일이었다.
젊은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손을 거쳐간 많은 환자들과
지금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헤론의 나이 34세.. 소생의 나이 34세이면 1986년은 방배역에서 갓 개업했을 때의 나이입니다. 정신과전문의를 취득한 지 1년반 만에 개업을 했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골프를 배우며 생기는 돈은 모두 주식에 투자하여 1년이면 보통 트로이카 주식(건설, 무역, 금융)으로 1000%의 수익을 올리던 때입니다. 1980년 서울대병원 인턴 때 향린교회에서 김호식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으나 1981년생 딸, 1984년생 아들과 함께 1주마다 일요일이면 겨우 교회당을 찾는 일요교인일 뿐이었습니다. 헤론은 소생의 그런 철없는 시절에 이미 타국의 미개한 나라에 와서 5년간 선교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소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지금도 울음이 복받쳐 오르며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됩니다.
소생이 철이 들도록 모든 자산을 잃게 하여 ‘가난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해하기 힘든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남의 병원에 옮겨다닌 지 7년째 이제 다시 태어난 고향에서 45년간 살았던 타향 같은 고향(서울)으로 옵니다. 지난 7년간 재차 열악한 여건의 정신질환자들의 입원실에 들어갔었던 경험은 [회복의 정신병원 이야기]를 출판하게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기술한 사례연구 38은 정신과의사로서 온몸과 마음으로 환자들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창조주의 축복이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조현병의 증상들이 깨끗이 사라지지 않아서 헤매는 젊은이들을 구해내는 중입니다.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無心之醫(병자에게 연민을 담아 보는 눈이 醫業으로 출세나 치부의 욕망과 바꿀 수 없다)의 개념은 의사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몸에 베인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세의 의사나 교사나 성직자의 모습은 業으로의 길이 아니라 말세에 나타나는 징후들을 보이고 있는 중입니다.
늦게나마 양회진에 와서 정신과의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헤론을 위시한 한 분 한 분 먼저 간 선배의사들을 정성을 모아서 기려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 130주년이 헛되지 않도록 100주년기념교회에 헌신하며 정신과환우들을 위한 썩어서 밑거름이 되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2014.7.29. 2:4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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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은 1856년 6월 15일 영국 더비셔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길 원했던 그는 1881년 테네시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883년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교수회의가 주는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테네시 동부에 위치한 존스보로에서 약 18개월 동안 개업하였다. 뉴욕의과대학에서 1년 동안 수련을 받으면서 어려운 경쟁 시험을 통과해 블랙웰 아일랜드 병원에서 자리를 얻었고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뉴욕에 있을 때인 1884년 4월 24일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에 의해 조선에 파견될 최초의 선교의사로 임명받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결혼 후 1885년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한 헤론은 같이 근무하던 알렌과의 불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교사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환자진료에 있어서 그는 뛰어난 기술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특히 백내장 수술은 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886년 6월 14일 헤론은 정3품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고, 1888년 1월 6일에는 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1887년 10월 알렌이 조선의 주미 초대전권대신으로 부임하는 박정양을 따라 참찬관의 자격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자, 헤론은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됨은 물론 고종의 어의로 임명되었다. 또한 전임자 알렌이 하던 대로 서울의 외국 거류민들과 선교사들도 돌보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헤론은 이질에 걸렸는데 처음에는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았으나 갑자기 나빠져 스크랜튼과 맥길William B. McGill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약 3주 동안 심하게 앓다가 1890년 7월 26일 오전 9시 남한산성의 한 외딴집에서 운명하였다.
조선정부는 조약에 따라 그의 묘소를 서울 중심가에서 약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의 넓은 장소를 지정해 주었는데, 이곳이 현재 마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다.
[네이버 지식백과]헤론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근대병원 이야기), 2008,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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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헤론 선교사 양화진에 첫번째로 잠들다
“땅끝으로 가라”는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한국땅을 밝고 한없이 울던
존 헤론(John W. Heron)은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목회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존이 14세때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로 이민 와서
정착하고 목회를 했다. 존은 1883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이라는 영예를 안고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테네시 의과대학에서는 존 헤론에게 모교에 남아서
교수가 되어 후배를 양성하는 길을 택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
그 길은 장래가 보장되는 안정된 길이기도 했다.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존은 학교 당국과 스승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은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의사 시험 준비를 하던 중에 존은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84년 봄, 그는 해리어트 깁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받아 1885년 6월 21일에 코리아에 입국하였다.
▲광혜원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더 늘자 화제는 더 많아지고 활기를 더했다.
조선의 역사, 정세, 풍속부터 상감의 전의(典醫)가 된 알렌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왕이나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까?”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대면할 수는 없는 일이고 휘장이 무겁게 내려진 이쪽으로 내어민 왕비의 손으로
맥박을 짚어볼 수밖에 없었지요.
기이한 느낌이었지만 긴장할 대로 긴장하고 있어서 느낌이고 무엇이고 문제가 아니었어요.
왕비의 혀를 찰색해야 겠는데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그 구멍으로 왕비가 내민 혀를 볼 수밖에 없었지요.”
헤론은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헤론은 알렌의 병원일을 도왔다.
여러 가지 병과 갖가지 사연을 안고 오는 환자들이 병원에서 연출해 내는 일들도
또한 가지가지였다.
여자들이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는 ‘에라! 기왕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라면
병원에나 한 번 가보고 죽자’는 심정에서 마지막길로 알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헤론은 눈이 둥그레져서 알렌과 언더우드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만 두 번째 그런 부인 환자들을 보는데
혹시 조선의 부녀자들에게만 있는 무슨 특별한 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헤론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알렌이 물었다.
“혹시 두 분께선 그런 여자 환자를 못 보셨습니까?
여자의 배꼽 밑에 화상(火傷)의 흉터가 있는 것 말입니다.
오늘 온 환자는 배꼽 둘레가 화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가 나섰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게 무슨 특별한 병은 아닐까요?”
알렌은 그러한 환자를 다룬 일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배꼽병이라... 혹시 피부병의 일종이 아닐까요?”
“조선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화상 같기도 한 상처였습니다.”
헤론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더우드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무슨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풀릴 수수께끼입니다.”
언더우드의 추측이 들어맞았다. 여인들의 배꼽 화상의 흉터는 아들을 얻겠다는 집념에서
오는 것이었다. 온제종자법(溫劑種字法)이라 하여 뜨겁게 볶은 소금을 배꼽에 얹고
그 위에 쑥찜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금뜸질을 2백 번 내지 3백 번 한 끝에
합방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헤론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한산성에서 1890년 7월의 어느날 아침,
선교사 가족들이 여름 휴가차 남한산성을 향해 떠났다.
스크랜턴 가족, 아펜젤러 가족, 언더우드 가족, 헤론 가족 등등...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
논밭 사잇길을 지나서 산길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길이었다. 부녀자들은 가마를 타고 갔다.
산성 가까이에 오르니 한강이 멀리 내다 보였다.
남한산성의 성벽 둘레는 20리가 넘는다.
성 안에는 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은조왕을 모시는 숭렬전,
남한산성을 지키는 순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 등이 있다.
헤론은 몇 사람 환자와의 약속과 치료중인 환자의 용태를 지켜볼 일이 있다면서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그는 병원과 남한산성을 오가는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헤론은 닥터 스크랜턴을 따로 은밀하게 만났다.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진찰하고 약을 지어주면서 치료를 서둘렀다.
헤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별로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질 기운이 좀 있으니 조심을 해야겠지요.
더위를 무릅쓰고 오가다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헤론이 앓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 했다.
휴가를 며칠 앞당겨 끝낸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앞세우고 서울로 돌아갔다.
헤론은 하던 일을 놓고 쓰러졌다. 동료 의사들이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왔던 게일 목사는 덜컥 겁이 났다.
“닥터 스크랜턴,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 남한산성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오, 닥터! 헤론의 나이 이제 서른 넷입니다.”
“부인을 빨리 모시고 와야 합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게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남한산성으로 헤론의 가족을 데리러 떠났다.
헤론의 병상을 지키고 있던 알렌도 침통해 했다.
게일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때는 칠흑같은 한밤중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줄기에 바람까지 몰아쳤다.
게일이 헤론의 부인 해리어트를 데리러 온 것을 보고
아무도 그 길을 만류하지 못 했다.
가마 채비를 하랴, 초롱불을 밝히랴 모두가 허둥댔으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초롱불은 풍전등화였다.
횃불은 단 몇 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가마채를 잡은 교구꾼들 앞에 비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횃불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진흙의 수렁이었다. 후미진 곳이나 계곡에 이르면
교구꾼들은 가슴까지 차는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야만 했다.
불길하고 초조하기 이를 데 없는 밤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내려 때리는 장대비를 밤새 맞으며
눈물의 행군을 감행한 하룻밤이었다.
서울에 이르러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폭풍우의 지옥을 벗어난 듯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인.” 닥터 스크랜턴이 해리어트 앞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나이 서른 넷 헤론은 아내와 친구들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더 뜨겁게 더... 더... 사랑하고 싶소.”
해리어트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하실 수 있어요. 하시게 돼요.”
“병원에서 나하고 일하던 친구들... 나를 아는 한국의 친구들을 다 불러 주시오.”
병원의 조수들, 집인일을 돕던 사람들 모두가 헤론의 침상 가까이 몰려들었다.
헤론은 그들을 따뜻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나를 사랑해 주고 도와 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유언이라기보다 설교였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외치는 복음 전파였다.
그리고 잠자듯이 눈을 감았다. 1890년 7월 26일의 일이었다.
젊은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손을 거쳐간 많은 환자들과
지금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슬픔과 충격 위에, 묘지가 결정되지 않는 근심이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언더우드와 헤론이 성경 번역과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집 한 채가 따로 있었다.
선비라고 불리는 조선인 조수들이 합숙을 하면서 일을 돕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 집 한 쪽에다 무덤을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요. 지금 사전 작업을 하고 있는 집 뒤뜰에 우선 가매장을 합시다.”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선교사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집을 쓰고 있던 서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펄쩍 뛰며 달려들었다.
“아니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울타리 안에다 무덤을 쓰겠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모두가 한결같이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또 숙의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헤론 박사댁 뒤뜰에 무덤을 쓸 수밖에요.”
헤론이 살던 집 뒤뜰을 묘지로 정했다.
그리고 오후 3시를 장례식 시간으로 정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 3시에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서생들이 울며 불며 옷을 잡아뜯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벌벌 떨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니 선교사 어르신네들, 왜들 이러십니까?
기어코 집안에다 묘지를 쓰실 작정이면 온 장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아니 됩니다.”
장례식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시신을 묻을 땅 한 평 없는 고통으로
헤론의 아내 해리어트는 실신한 듯, 한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영혼이 떠난 헤론의 육신은 더위 앞에 무력했다.
7월의 폭염이 사정없이 썩게 하고 냄새나게 했던 것이다.
“... 할 수 없습니다. 매장지가 결정될 때까지 시신을 밀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밀봉을 했다.
그리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다가 안 될 눈치면 헤론의 집 뒤뜰에 매장할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이 땅에서 사망한 외국인은 제물포 근처 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서울 땅에 송장을 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제물포까지는 백여 리 길이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노새와 가마밖에 없는 형편에
시신을 메고 복더위에 백여 리 길을 걸어갈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미국공사의 양해를 얻어
정동 미국대사관 경내에다 임시 묘자리를 정했다.
그러자 이것 때문에 말썽이 생겼다. 선교사들은 외교 공세를 취하였다.
알렌이 조정과 미국공사관을 수없이 드나들더니 어느날 희색을 띠며 나타났다.
“새로운 자리를 허락받았습니다.
설명을 듣기에 괜찮은 듯한 곳인데 우리 한 번 가보십시다.” 몇 사람이 서둘러 나섰다.
한국 조정에서 허락해 준 장소는 양화진 나룻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였다.
언덕 밑으로 푸른 한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모래밭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아, 코리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고 와서 젊음과 땀과 눈물을 뿌리고
고귀한 목숨까지 코리아에 묻고 간 의료선교사 헤론...
제물포로도 못 가고, 그가 살던 집 뒤뜰에도 매장을 못 하고
갈팡질팡 눈물을 흘린 결과, 이렇게 주어진 곳,
이것이 양화진 외국인 묘지 역사의 첫 장이다.
코리아를 사랑하던 헤론은 푸른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언덕에 고이 잠들었다.

첫댓글 감동입니다..
글을 제대로 아직 쓰기 전인데.. 맞습니다. 감동으로 어제 새벽에도 양화진 묘지 앞에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양화진]을 읽으며 그의 요절에 얼마나 서러워 했었는지요. 어제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새벽에 시간이 남아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다가 묘비석 앞에 함께 마시자고 두었다가 제가 다 마셨습니다. 미리 대접할 생각이었으면 제가 먼저 마시지 않았을 터인데.. 죄송했었지요.
아침 대용으로 먹던 비스켓 2개는 비석 앞에 두고 왔는데 벌레가 다 먹겠지요. 100년 전 선배의사인데..
시공간을 넘어 교류하는 장면에 더 큰 감동을 느낍니다.건승하세요.
권선생님의 진실한 고뇌에 진심으로 감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