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루트 한민족 기원과 문명을 찾아서
- 이형구 교수의 강연을 듣고
지난 3월 14일 서울 강동구 소재 피스센터 2층에서 있은 색다른 문화포럼에 참석한 것은 결론적으로 말해 행운이었다. ‘코리안드림 역사 문화포럼’(준비위원회 사무총장 김백산)이 주관한 제1차 코리안드림 역사문화포럼 주제는 바로 ‘코리안 루트 한민족 기원과 문명을 찾아서‘ 였다. 전문가도 아닌데 이처럼 난해한 강연을 제대로 경청할 수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 속에 두시간 여 동안 강연을 듣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한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주제 발표자 이형구 교수의 열강이 존경스러웠다.
이형구 교수는 현재 선문대 석좌교수로 일찍이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 고고인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역사학과에서『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만 고궁박물원과 중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던 분이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연구실 교수·자료조사실장 ·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지내고, 1993년 중국 북경대학 고고학과 객좌교수를 역임했다. 1996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고고연구소장 ·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고 문화공보부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역임하고, 경기도 및 인천시 문화재위원회 문재위원과 인천시 문화재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 개성 영통사 복원추진위원회 남측 대표로 방북했고 2002년 10월과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단군과 고조선 관계 남북학술회의를 주관하였다. '특별기획전 고구려!’(강남 코액스) 준비기획위원장을 맡아 남북학술교류에 힘쓰기도 했다. 고조선단군학회 고조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애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와 탁본전시로 신한국인상(김영삼 대통령)을 수상하고 2000년 서울 풍납토성 백제 왕궁유적 발견과 풍납토성을 보존한 공로로 국가(김대중 대통령)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강화도 역사·문화 유적ㆍ 보존 공로로 인천시문화상(최기선 시장)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우리나라 고대민족문화의 ‘시베리아 · 몽고기원설'을 반증하였으며, 지금은 춘천 중도유적과 하남 미사리 유적 보존에 힘쓰는 한편, 동양고고학연구소를 개설하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처럼 이형구 교수의 프로필을 익히 알고 있었던 필자가 다시금 장황하게 이교수의 이력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이분의 강연이 갖는 무게를 더해주고 싶어서다.
0-편견 없이 받아들여야 할 한민족의 기원
이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시종 일관 우리 민족의 기원을 편견이나 선입관이 없이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광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임을 환기시켰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강연에서 인상에 남는 대목은 역시 춘천 레고랜드 공사 중 발견된 중도유적에 관한 것이었다. 중도유적은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차례에 걸쳐 발굴해 270여기의 유구를 확인하고 중도발굴보고서를 5권이나 내놓은 유적인데 공사 중 깡그리 무시됐다며 울분을 토했다. 2010년까지 강원대학교박물관과 한림대학교박물관 등이 여러 차례 발굴·조사한 결과,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된 ‘통사적(通史的)’인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주로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에게 여러 차례 ‘춘천 중도유적 내 레고랜드 건설 중지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묵살 당했다는 것이다.
이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중도 레고랜드 부지 24만98㎡를 발굴한 결과, 청동기시대의 방어 시설인 둘레 400m 크기의 환호(環濠)를 비롯해 청동기시대 주거지·고상가옥·저장 구덩이·경작지 등 3000여기의 유구와 160여기의 돌무덤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과 선형동부, 옥착, 옥부 등 청동기시대(고조선 시기) 지배층의 유물이 약 1만점의 석기·토기와 함께 출토되어 고고학적으로 마땅히 보존해야할 가치가 차고 넘친다는 것이 이교수를 비롯한 고고학계의 공통된 주장이다.
특히 레고랜드 건설공사가 시작된 이 지역은 넓이 240㎡ 안에 돌로 쌓아 만든 고인돌무덤(지석묘) 50여기가 조성된 매우 특징적인 청동기시대 지도자급의 대단위 지석묘군이다.
이교수의 지론은 ‘문화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웃 중국은 춘천 중도유적과 비슷한 랴오닝성 우하량 적석총 유적을 대형 유리 돔으로 씌워 보존하고 있고 일본은 구주의 요시노가리 유적지에 산업단지를 건설하려고 했다가 대단위 유적이 발견되자 중지하고 사적공원을 조성했는데 우리나라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의 문화유산을 말살하고 외제 장난감 놀이시설을 만드는 사업을 당장 중단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모든 국민이 동참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이교수의 지론, 그의 충정에 박수가 터진 이유를 알만했다.
이형구 교수는 광개토대왕능비 신 연구에도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하다. 이교수는 81년 이후 주장해온 「왜」 자 변조설, 즉 비문의 신묘년 기사중「왜」자는 일제군부와 관학자들에 의해 「후」 자가 변조된 것이라는 종래의 학설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비문 제2면 9행의 경자년(영악10년·400년) 기사에서도 이 같은 변조사실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일제 관학자들의「왜」 자 변조는 신묘년 기사에만 그치지 않고 경자년 기사에도 그들의 손길이 미쳤음을 확인했다』 고 주장한다.즉 1880년께 일본육군참모본부 「주순경신」(사까와·가게아끼) 중위의 쌍구가묵본(비면에 종이를 대고 글자의 형태를 베낀 후에 글자의 주변을 먹칠해 글자의 윤곽을 하얗게 드러나게 한 일종의 가척본) 엔 「신라성□성왜만…왜궤성대□…」 (신라성과 이성에 왜가 가득차고 이들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판독된 것이 그 1백년후인 1981년 중공학자 왕건군이 펴낸 『호태왕비연구』중의 주설성 탁본 (1981년)엔 「신라성□성왜구대지성내□□…」 (신라성□성에…하고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다. 그리고 성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마치 신라가 왜의 지배하에 있게 된 것처럼 보이는 주구중위의 「왜만왜지」 가 최근 「왜구대지」로 드러난 것은 바로 석회를 발라 비문을 새긴 고의적인 변조로밖에는 볼 수 없다고 단정했다. 이교수는 “당시 동북아를 석권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에 한낱 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활동을 칭송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 이라고 덧붙였다.
오늘의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하는 정책을 펴면서 우리의 고대역사를 자기 내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고,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인위적으로 왜곡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한일 역사문제에서 제일 많이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광개토대왕릉비 문제이다. 일본인들은 19세기말 광개토대왕릉비를 인위적인 어떤 힘을 가해 비문을 왜곡되게 해석한 이래 지난 1세기 넘도록 고대일본인 왜(倭)가 조선반도를 지배해 왔다는 주장을 계속 펴오고 있다. 현재도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물론 대학의 역사교재에도 여전히 한국고대사의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각종 역사교과서는 광개토대왕의 활약상이나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서술이 아예 빠져 있지 않으면 겨우 몇 줄로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의 역사를 마치 중국과 일본이 그들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보다 더 활발하게 연구하고 국가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역설적인 우리의 역사인식이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0- '풍납토성 지킴이'의 재발견
이교수는 ‘풍납토성 지킴이'로도 널리 알려진 학자다. 이교수가 풍납토성 연구에 뛰어든 것은 국립대만대에서 중국고대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81년. 당시만 해도 ‘풍납토성은 왕성 외곽을 지키는 사성(蛇城)에 불과하다’는 이병도(李丙燾)박사의 학설이 유력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만 유학 시절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나 노나라처럼 중국 고대국가의 도성이 대부분 강을 낀 평지에 진흙을 잘게 개어 시루떡처럼 쌓아 만드는 판축토성(板築土城)이었음을 알게 된 그는 같은 방식의 풍납토성을 사성으로 봐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성 내부는 물론 성곽 위에까지 무허가주택이 들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된 풍납토성에 대한 연구와 보존운동에 자신을 걸었다. 85년 풍납토성을 가로지르는 올림픽대교의 설계변경 운동을 주도했고 94년엔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에 소개된 한성백제의 도성 ‘하남위례성’이라는 논문까지 발표했다. 96년부터는 1년여 실측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의 전체길이가 3.5㎞에 성곽 기단부 두께가 40m, 높이가 무려 10m에 이르는 대형성곽이라 는 사실도 밝혀냈다. 97년 1월에는 신정 연휴기간 풍납토성 내 현대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기원전후에 제작된 백제토기와 기와, 목재가 대거 파괴되는 현장을 잡아내기도 했다.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불탄 지 1500여년이 지났지만 이처럼 순수하게 보존된 곳을 파괴한다는 것은 역사와 민족 앞에 억겁의 죄를 짓는 일로 이런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이다. 이 같은 이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풍납토성 내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보존키로 정책방향이 바뀐 것은 바로 코리안 드림의 성공이 아니겠는지 오랜만에 경청한 문화포럼, 한마디로 유익하고 보람 있는 하루였다.(정운종 전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