飄飄靜上人
표표히 떠나가는 靜이란 이름의 스님은
橫吹紫鸞笙
붉은 난새(하늘의 天子새)타고 피리소리 바람에 부쳐 보낸다.
披雲呼我道
그는 구름을 헤치고나와 내 불러 말하기를
自是安期生
나 자신은 옛날 신선이라고 일러지던 安期生이라네.
-蓬萊翁書(봉래옹 씀)-
봉래 양사언의 친필을 찾아서 - 포천 금수정.
금수정은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한탄강 상류에 있다.
뒤에 보이는 물 줄기는 전곡을 거쳐서 한탄강 본류와 합한다.
이 현판 글씨 金水亭은 물가 바위에 봉래 양사언이 새긴 글씨로 모사하여 걸었다.
금수정에 걸려 있는 시문으로 그 한구절인 蓬萊創建遂成功(봉래창건수성공)이란 문구로 보아 봉래선생이 창건 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사언 이전에는 우두정(牛頭亭)이었던것을 봉래 양사언선생이 개축하면서 정자의 명칭을 <금수정>으로 하였다는것이 포천지역의 옛 기록에 나온다.
금수정 건물 동북방 벼랑에 세겨진 金水亭 -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로 전해온다.
위치 -정자에서 계단을 타고 물가로 내려가 수로에서 좌회전하여 100여 m 지점 벼랑이다.
금수정 동북방 150 여 m 지점 바위에 란석(瀾石)이라 쓰여 있다. 瀾은 물결란.
물결파(波)와 같은 의미로 잔잔한 물결을 의미한다.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로 전해온다.
금수정 정자 건물 동북방 10m 거리의 바닥돌에 금대(琴臺)라 쓰여 있다. -봉래의 글씨.
봉래 양사언의 명필 휘호 경도(瓊島)는 금수정 정자로부터 서남으로 약 200 여 m 지점 물속의 곱게 씻긴 바위 위에 쓰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바위의 잘록 한 곳에 글자 島 가 보인다. 경도(瓊島)라는 두 글자의길이는 약 2m로 물가의 약 15m 떨어진 거리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양사언의 명필 휘호 -경도(瓊島)- 위 아래 길이 약 2 m.
경도(瓊島)라는 어휘의 유래는 본래에 북경의 고궁 서편 北海公園에 있는 황제의 궁원 안쪽 한 돌 섬이다. 북해공원은 바다가 아니라 아름다운 인공호수로 북경 서쪽 교외에 있는 玉泉山에서 솟는 샘물을 끌어서 만든 호수 공원으로 그 규모가 자금성에 필적한다. 面積은 72만㎢ 이다. 瓊島는 아름다운 옥과 같다해 瓊華島라고 불리어 왔다.
金나라의 군대가 북송의 수도(지금의 開封市)를 1128년에 무너뜨리고, 그 동북쪽에 있는 艮嶽에서 이름난 돌을 구해 북경으로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념으로 조성한 바위 섬 이 바로 경도(瓊島) 였다. 그래서 北京에서 가장 오래된 900년 歷史를 지닌 호수公園일 뿐만이 아니라 경도 위에는 라마교의 白塔이 서 있다.
金나라 이후 元나라까지는 宮殿이던 것을 명 청대에 이르는 皇帝의 宮園으로서 사용했고 元代 이래 王宮의 庭園이었던것을 20세기에 이르러 開放한 것이다. 봉래 양사언은 그 유서 깊은 경도(瓊島)가 여기 포천의 금수정 아래 바위라고 여긴 듯 멋들어진 휘호를 남겼다. 보고 또 보아도 멋들어진 휘호임에 틀림이 없다.
금수정 정자로부터 서남방 약 200 m 지점 물가 바위에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로 전해오는 초서 글씨.
금수정 정자의 물가에는 봉래 양사언의 시조시비가 서있다. 본래에는 포천지역의 유지들이 건립 추진을 하여 봉래선생의 사당 길명사 앞에 세우기로 하였으나, 청주 양씨 종중에서 같은 내용의 시조시비를 사당앞에 세우기로 하여 이곳 금수정 물가로 세워지게 되였다.
글씨는 외길 김진동(金縉東)서예가의 글씨로 다른곳에서 볼수 없는 아주 특이한 필체를 구사하였다. 시조시의 내용은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이 없것만은,
사람이 제 아니 모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외길 김진동은 호가 외길 또는 釣月人으로 평생을 서예에 몸울 바쳐 여러 작품을 남기고 아깝게도 2006년 타계하였다. 외길은 붕어낙씨 보감으로 알려진 <무엇을 낙는가>를
저술 출간하기도 하여 전국 낙시애호가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하였다.
봉래선생 시조시비 전체 모습.
참고로 이곳에서 연천방면으로 2 km 지점의 벼랑 바위산 창옥병(蒼玉屛)에는 한석봉의 친필 휘호 여러 점을 감상할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