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길(1750-1827)은 정조와 순조 때의 학자로 안정복(安鼎福)의 문인이다.
이 집안은 대대로 한강 남쪽 양천의 두호(斗湖), 지금의 가양동 궁산 아래에 살았는데 젊은 시절 몇 년간 도저동에 살았다.
도저동(桃渚洞)은 도저동(桃楮洞)이라고도 적는데 조선시대 이 둘이 혼용되었으며 줄여서 도동(桃洞), 혹은 도곡(桃谷)이라고도 하였다.
도저동은 오늘날 남대문 바깥 서울역 일대를 이르는 말이다.
동쪽의 남산과 서쪽의 만리재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 남대문을 지나서 도저동 앞쪽 길을 따라 청파(靑坡)로 하여 노량으로 가는 길이 가장 중심 도로 중 하나였다.
황덕길이 살던 집은 오늘날 서울역 앞쪽 남산 기슭 어디엔가 있었던 듯하다. 위의 글에는 두꺼비처럼 생긴 섬암(蟾巖) 아래라 하였는데,
섬암은 곧 후암동 삼거리 위쪽에 있던 두텁바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두꺼비를 예전에는 ‘두터비’라 하였으므로 후암(厚巖)을 곧 섬암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위의 글을 보면 후암동 남산 자락에는 최호(崔傐)라는 선비의 아름다운 정원이 산기슭에 있었고,
그 아래로 몇 길 높이의 폭포가 떨어져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 만천(蔓川, 蔓草川이라고도 한다)으로 합류하였던 듯하다.
도저동은 한 때 이덕형(李德馨), 이덕수(李德壽), 심육(沈錥) 등 명망 높은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그 이름처럼 복사꽃이 아름다웠다.
이익(李瀷)은 〈도곡팔경에 차운하다[次桃谷八景韻]〉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에 따르면 도저동은
‘도저동의 맑은 봄빛[桃渚晴春]’,
‘풍암의 저물어가는 가을[楓巖晩秋]’,
‘대궐의 새벽 종소리[禁城曉鍾]’,
‘여염집의 밥짓는 연기[閭井暮煙]’,
‘약현의 저녁 햇살[藥峴落照]’,
‘노량강의 멀리 떠 있는 배[露湖遠帆]’,
‘남산의 푸른 산빛[南山翠嵐]’ 등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다.
또 이익의 또다른 시 〈아곡팔경시에 차운하다[次鵝谷八景韻]〉를 보면
서울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도곡의 안개 낀 숲[桃谷霧樹]’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 도저동은 도성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곳이라 평민들의 주거지로 바뀐 듯하다.
황덕길이 도저동에 이르렀을 때 초라한 집 몇 채만 있었다.
도저동이라는 명칭을 보면 한때 복사꽃이 아름다웠겠지만 생계가 급하여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라 꽃나무를 키울 생각을 하지 못하여 황량하게 바뀐 것이리라.
황덕길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가에 버드나무를 10여 그루 심었다.
해가 바뀌자 버드나무가 물가에 빼곡하였다.
황덕길은 없는 복사꽃을 대신하여 있는 버드나무로 마을 이름을 바꾸고자 하였다.
동네 이름은 유저동(柳渚洞)이라 하고 밭은 유포(柳圃)라 하였으며 집 이름을 유북실(柳北室)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유북촌(柳北村)이라 하였다.
시원한 바람을 즐기려고 창 이름을 풍래유(風來牖)라 하고,
개울 물소리를 듣고자 벽 이름을 침류벽(枕流壁)이라 하였다.
황덕길이 살던 도저동이 그다지 아름다운 땅도 아니었고
또 그 집이 크지도 않았겠지만,
버들과 물과 바람으로 집을 꾸몄다.
이것이 선비의 삶이다.
물론 황덕길이 버들을 심은 뜻은 집 곁에 다섯 그루 버드나무를 심고 은자의 삶을 즐겼던 오류선생((五柳先生) 도연명(陶淵明)의 뜻을 따른 것이리라.
복사꽃이 없는 도저동에 버드나무를 심어 유저동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개울은 물론 복사꽃도 버들가지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큰 빌딩 사이라도 복사꽃과 버드나무를 심고, 창과 벽에 ‘풍래유’, ‘침류벽’이라는 글이라도 걸어두면 도심의 답답함이 다소 가시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