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국제공산주의운동 역사에는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공산주의 이상이 실현 될 수 없다는 진리가 이론 실천적으로 완전히 검증되었습니다. 아직 공산당이 집권하는 중국, 월남, 쿠바까지도 이미 오래 전에 공산주의 궤도를 벗어나서 지금은 개혁, 개방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한반도에서만 이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강력한 반공체제가 수립되어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상황이 어째서 오늘처럼 어지 럽게 됐겠습니까?
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북한의 대남침투 공작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와서 살며 느낀 것은 우선 법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법치국가라고 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아주 공정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재판과정 을 보면서 참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증인 신분으로 법정에서 서서 “지금 여기 대 한민국의 신성한 법정이 북한의 대남공작 전술에 농락당하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김일성 교시>를 인용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전술 가운데는 <법정 투 쟁 전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내려와서 대한민국 수사기관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 기본이지만 부득이 체포됐을 경우는 일체 증거를 인멸시키고 유력한 변호사를 금품으로 내세우라는 것입니다. 변호사 비를 몇 백만원 쓰느냐 몇 천만원 쓰느냐 하는 그 액수에 따라 변호사의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며 변호사는 법정에서 <우리>의 유일한 방조자라는 겁니다. 판검사가 “그런데 왜 예심과정에 서그렇게 진술했소?” 라고 물으면 “경찰에서 하도 고문하기 때문에 될수록 고문 덜 당하기 위해서 거짓진술 했다” 고 번복해야 죄가 감면될 수 있고 잘 하면 무죄로 석방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얼굴이 시뻘개 가지고 반대 시문을 하기 때문에 제가 변호사에게 물었습니다. "변호사 선생! 변호사의 본분이 뭡니까? 피의자가 의식 중이건 무의식 중이건 범법행위를 했을 때 5 개만한 죄를 지었는데 10개 해당하는 중형을 받으면 억울하니까 억울하지 않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도 록 변론하는 것이 변호사의 본분이 아닙니까? 덮어놓고 죄를 깎고, 무죄로 만드는 것이 변호사의 본 분입니까? 그리고 “우리 체제를 뒤집어 엎겠다는 반공법에 저촉되는 사건 심의의 변론을 맡으려면 공산주의자 들의 전략전술이 어떤 것이라는 기초적인 것은 알고 나와 야 할 게 아닙니까?” 그랬더니 변호사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해방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대남 공작이 집요하 게 벌여져 왔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이 대남 공작을 전개해온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해본다면 해방직후에서 전쟁 일어나기 전까지가 격동기, 50년대 쇠퇴기, 60년대 상승기, 70년대 침체기, 80년대 회복기, 그 이후시기를 북 한에서는 앙양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60년대 상승기류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한의 안보상황이 허술했던 사정과 관련됩니다. 5. 16의 후유증으로 사회혼란이 야기되었던 데다가 휴전선 일대를 비롯해서 동서남해안 경계밀도가 희박하고 장애물도 거의 없는 무풍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계태세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연고지 공작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그 때는 성공률도 높 았고 한때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68년 통혁당 사건이 일어나 지하당 조직 이 파괴되면서 그때부터 쇠퇴기를 맞게 된 겁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통혁당 사건으로 인한 손실을 만회할 목적으로 68년 11월 울진 삼척에 대규모 무 장공비를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시도했으나 그 공비들도 모두 사살되거나 생포되어 실패로 끝나고, 무 장공비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민들의 대공 경각심이 높아지고 신고율도 높아졌기 때문에 70년대 는 간첩들이 내려오는 족족 내려오는 쪽쪽 거의 다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것은 불과 몇 건 안됐습니다.
또 70년대 초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을 비롯한 남북조절위원회, 등 남북대화로 인해 대남공작이 2년 동 안 중단됐었고. 그리고 75년에 월남이 공산화되면서 남한에 강력한 반공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공작하 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이래서 70년대는 완전히 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2차 인혁당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남민련 사건, 등 대형사건들이 꼬리 를 물고 일어났기 때문에 70년대 당시까지는 노동당 연락부가 재기불능의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 다.
이렇게 재기불능의 침체상태에서 전전긍긍하던 노동당 연락부가 갑자기 10, 26사태가 일어나는 바람 에 뜻밖에 회복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 후 5공화국 정부는 ‘통행금지 해제’, ‘맑스주의 관계서적 판금조치 해제’, ‘해외여행 자율 화’, ‘제주도 무비자 입국허용’, 등 제반 법적 규제 완화조치를 취함으로써 간첩들의 활동 무대 를 활짝 열어주었고, 또 6공화국정부 역시 국민들 앞에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문회에 밀려 안보 체제를 무너뜨리고 적색노조를 키워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다음 문민정부는 과거 군사독재의 정권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면서 사회 대 화합을 표방하며 재야세 력을 제동권내에 흡수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6,3세대들이 실세로 등장하여 제도권 내에 좌익 진지를 다지게 된 겁니다.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민주투사>의 탈을 쓰고 92년 대통령 선거 때 공을 세운 주사파들을 일등공 신으로 알고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요직에 두루 임용했습니다. 이렇게 돼서 결국 친북 좌익세력들이 우리 제동권내에 합법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이선실 사건 잘 아시죠? 10.26사태 직후인 80년 3월에, 이선실이 제일교포 신순녀의 신분으 로 세탁해서 여기 들어왔습니다. 그 때 이선실이 혼자 온 게 아니라 노동당 연락부 통일전선부 부부 장 급 거물 공작원들 열 명이 내려왔습니다.
여기 신문에는 안기부에서 이선실 관련사건을 발표하면서 남한 조선 노동당사건, 민중당과 접촉한 인터뷰 자료에 86년 87년 이후 활동상황만 공개했습니다. 그러면 이선실이 80년 3월에 들어와서 87년 까지 가만히 앉아 놀았다는 얘깁니까? 이선실이 여기 10년 잠복해 있는 동안에 북한은 국기훈장 1급 두번, 노력훈장 등 다섯 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선실이 지하에 잠복해 있던 조직들을 수습한 다음 제일 먼저 접촉하고 규합한 재야 인물들이 문 xx, 계xx, 함xx 등등입니다. 이들을 규합해서 좌익운동이 합법화된 활동무대를 최대한 이용해서 그 세력들을 반합법 단체로 부각시키면서 제일 먼저 만들어낸 것이 83년 민청련입니다. 그 다음 재야 원로들을 총 망라하여 85년 민통련을 결성하고 전국 규모의 반합법 단체들을 무수히 조 직해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벌여 이른바 격동의 80년대를 연출한 것입니다.
한 가지 실 예로 13대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 태우가 당선돼서 6공화국이 출범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은 YS아니면 DJ다 그래서 둘 중 누가 될지 모르니까 좌익 주사파 주동세력들을 두 패로 갈라서 한패는 상도동으로 접근시키고 한패는 동교동으 로 접근시켰습니다. 그랬다가 92년 대선에서 YS가 당선되는 바람에 상도동으로 접근했던 무리들이 먼저 빛을 보게 된 것 입니다. 신문에도 다 발표됐으니까 다 아시겠지만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요직 핵심부에 틀어박히게 된 겁니다. 그 다음 15대 대선 때는 동교동 쪽으로 접근했던 그룹이 또 빛을 보게 된 것이죠.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친북 주사파세력이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이 이렇게 어지럽 게 된 겁니다.
70년대 10.26 사태만 안 일어났어도 아마 노동당 연락부가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사실 노동당 연 락부 공작팀 과 남한 수사팀 간의 쫓고 쫓기는 싸움에서는 이미 승부가 가려졌습니다. 그것은 80년 12월 경남 남해군 미조리 앞 바다 사건 과 83년 12월 부산 다대포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위 두 사건은 모두 남한 수사기관이 간첩 체포 사실을 발표하지 않고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무 전으로 보고하고 지시 받고 하다가 1년 후 공작을 종결짓고 접선을 요망한다는 전파를 날려서 북한 공작팀을 불러내 가지고 일망타진시킨 사건입니다. 돌이켜볼 때, 남한 수사기관이 역 공작을 해서 쾌거를 올린 건수는 크게 네 건이 있었습니다. 69년 6월 흑산도 사건 과 80년 12월 경남 남해군 미조리 앞 바다 사건, 83년 12월 부산 다대포 사
건, 95년 10월 충남 부여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흥미 있는 것은 검거 간첩 전OO을 가지고 역 공작을 해서 쾌거(80년 12월 경 남 남해군 미조리 앞 바다 사건)를 올린 다음, 15년 후에 또다시 역 공작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사실 남한 수사공작 팀은 80년 12월 미조리 앞 바다사건(역 공작)에서 간첩선을 격침시키고 접선장소 에 상륙한 안내원 2명 모두 사살한 것으로 종결짓고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있다가 전 아무개한테 방송지시가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혹시 해서 여기서 보고를 올렸는데 한 달 간격으로 또 지시가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가 역 공작한 것을 노동당 연락부가 파악하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감을 잡고 계속해서 15년 동안 보고를 주고받고 하다가 마지막에 접선 해서 잡은 것이 충남 부여사건입니다. 이렇게 간첩하나 잡은 것으로 15년 동안 두 번 역 공작해서 쾌거를 올린 예는 국제 첩보전의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이처럼 노동당 연락부 공작팀과 남한 수사기관 간의 정보 전에서는 남한 수사기관이 완승을 거두었는 데 역대 정부가 그들에게 역습의 빌미를 주었기 때문에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가고 문민정부 를 거쳐 15 - 16대 대선을 통해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고 오늘은 또 4, 15 총선을 겨냥하여 국회까지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이번 17대 총선이 김정일을 통일대통령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여기고 여기에 사활 을 걸고 있다.
원래 공산주의자들(레닌)의 선거 전략은 부르조아 선거에서는 보이콧하는 게 기본 상식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선거제도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70년 칠레에서 아헨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돼서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때 김일성이 그랬습니다. “칠레 아헨데의 경험은 선거를 통해서도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충분 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아헨데가 실패한 원인은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다음에 너무 급진적으 로 개혁을 서두르다가 역 쿠데타를 당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김대중 납치 사 건과 관련해서 민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남조선 인민들의 반 박정희 감정을 잘 유도해서 명망 있는 인물들을 내세우면 국회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이제부터는 대 국회공작도 프락치 공작 에 그치지 말고 의석을 확보하는 공작으로 전환해야 되겠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입니다. 그 이후 부터 아헨데의 경험과 교훈을 심층 분석한 데 기초해서 새로운 전략을 세워서 남한에서 진행되는 각 종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겁니다.
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다가 YS 와 DJ의 고질적인 경쟁의식 때문에 실패하였고, 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때는 “김영삼한테 표를 주면 식민지 독재정권이 연장된다” 면 서 DJ를 밀었지만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97년 15대 대선 때에 와서 자기들이 계속 밀어왔던 후 보가 어느 때보다도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반 신한국당 연합전선을 펼쳐 DJ를 대통령으로 당선시 켜 비로소 친북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하고 뒤 이어 16대 대선에서도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으로 민주 당 정권을 재창출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당 정권이 재창출되자 386 주사파가 권력 핵심부와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마지막 고지인 국회를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북한에서 말하는 <민주투사>들이 원내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게 되면 앞으로 연방제 통일로 거침없이 치닫게 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이번 4, 15총선을 연방제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국면을 조성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아주 중대한 분수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국민들이 반 xxx당 연합전선에 규합되어 민주국회를 창출하기 위해서 총 궐기해야 된 다고 계속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4월 3일 한민전 중앙위원회 총선 비상 대책위원회에서 여 기 내려보낸 지령 문입니다. 작년 11월 15일 날 총선투쟁 지침이라고 해서 “반 xxx당 연합 전선으 로 총선 승리를 이끌자”는 투쟁 지침을 하달한 이후 이틀이 멀다하게 이런 성명, 호소문, 공개서안 이런 형식으로 계속 내려옵니다.
‘온 국민의 격노하는 반 탄핵 투쟁에 부딪혀 친미 보수 세력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미국은 총선을 연기하거나 파탄시키며 내란 형국을 구실로 군부를 개입시킬 위험천만한 흉계까지 꾸미고 있다’ 선 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말이 많이 돌고 있습니다. 어디서는 친위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처럼 지금 상황이 아주 급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금 여당에서는 탄핵정국 이후에 지지율 이 급상승한다고 요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엊그저께 문xx하고 명xx이 탈당했습니다. 지지율이 급등 하고 아주 유리한 상황인데 어째서 쪼개져야 한다고 하면서 탈당했겠습니까? 이건 모종의 뭐 하나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겁니다. 문xx이 참여정부의 핵심 브레인 중에서도 핵심입니다.
여러분들 작년 대선 직전에 “군자산의 약속”이란 것 있었던 것 아시죠. 그 때 16대 대선 직전에 여 론 조사 결과 민주당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 xxx당 승리가 확실시 될 경우에는 전국적인 규모에 서 폭동을 일으키려는 예비 모의훈련이라는 게 그겁니다. 이번에도 만약에 4. 15총선 직전에 만약에 판도가 기울어져서 불가능하게 될 경우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아주 급박한 상황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총선이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깐 시간도 없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국민들의 결정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만 이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군자산의 약속”이라는 것이 2002년 9월에 군자산에서 행해졌습니다. 그 때 관계된 자료 제가 다 가지고 있는데 다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김정일 특공대 500명이 서울에서 활동 중이라는 것이 4월 에 현대조선에 났는데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500명 정도가 아니라 북한의 특수공작원들을 중국연 변교포로 신분세탁을 해서 합법적으로 들여보낸 것만 해도 천명이 넘습니다. 그 중 일부가 군자산에 합류돼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건 아주 극비사항이니까 인원수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만경봉호가 다대포에 정박해 있으면서 게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 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게 미국 CIA 에서는 다 포착이 됐습니다. 만경봉호가 거기 뭣 때문 에 나옵니까? 비용도 다 이쪽에서 대주고 응원단 호텔에서 숙박하게 했으면 됐지, 국제관례대로 한다면 만경봉호에 서 여기 부산 다대포항에 내릴 때는 국경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여기서 만경봉호를 들어 갈때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국경을 넘은 건데 출입국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했습 니다.
그리고 거기 실려지는 짐짝도 세관절차가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만경봉호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 는지 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미국 정부기관에서는 다 포착한 것 같습니다. 이럴 정도로 완전히 벗어 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들 다 아시지만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것은 다 깽판 쳐 도 좋다, 또 어떤 사람은 정치가 안정돼야 남북관계가 잘 풀릴 수 있다, 고 역설했는데 남북관계가 잘 풀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근데 요즘에 방송 통해서 심야토론 각 당 대표들 나와서 하는 것 보면 좌익 정당들은 말끝마다 국민 의 요망, 국민이 바라는 뭐,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사람들은 사실 국민이라는 말을 쓸 자 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어차피 이념대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 대표들이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국민이라는 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제는 말끝마다 <국민>이요 <민주>요 하는 친북 추종세력들에게 공개질의 해야 합니다. 우선 300만 의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사실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굶겨 죽인 사람이 누구냐? 또 목숨을 걸 고 북한을 탈출해서 우리의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탈북 용사들을 당신들은 어떻게 보느냐? 우선 그 입장부터 밝혀라 하고 따져야 합니다. 300만의 자국 국민들을 굶겨 죽인 김정일의 편에서 그를 비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국민이란 얘기를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300만 굶어죽은 사람들은 북한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렇 게 따지고 공개질의하고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런데서 는 자꾸 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의 국가 안보상황이 위험한 단계까지 오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젠 국민들 얘기 들어보면 “안보가 어지럽게 됐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이젠 군밖에 믿을 수 없지 않느냐”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 언론매체도 전부 장악됐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역대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전을 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기껏해야 동아일보 광고 해약 사태입니다. 또 5공 정부에서는 언론 통폐합 한 것밖에 없습니다. 6공, 문민정부에서도 제대로 저것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15대 대통령 선거이후 에 국민의 정부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완전히 인민재판 식으로 여론화하고 세무사찰, 고소고발, 세 무사찰 한번 받으면 아주 진물이 나도록 시달린 답니다.
지금 우리 신문에 웬만한 거 안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언론기관도 친북 좌익세력들이 거의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 조작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론조사 다 뭐다 하는데 저부터도 여론조사기관에서 전화 오면 끊어 버립니다. 또 그쪽에서 전화 받는 사람 이 목소리 들어보고 한 5, 60대 넘을 거 같으면 그쪽에서 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네 코드 맞는 사람 들끼리 주고받고 여론조사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가서 간단히 이 정도로 오늘 얘기 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연사 김 건, 강연일시: '04.4.8. 총동창회 확대 임원회 약력소개:
'67-'76. 9월: 북한 노동당 365부대 대좌로 대남공작에 종사(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 수령 '76.9.20: 전남여천 ㄱ문도로 7차남파당시 귀순권유에 불응항거하는 조원 2명 살해,단독 의거귀순 귀순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안보행정학과 졸업 '79-'89: 치안본부 내외정책연구소 연구위원 '89-'96: 서울 지방 경찰청 보안문제 연구소 전문위원 '96-'01.6월: 경찰대학 공안문제 연구소 현재: 제3세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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