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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십계명-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생명 존중”
(출 20:13, 신 5:17)
십계명은 딱딱한 법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겨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빠지면 십계명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의 생명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 생명 존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면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20). 그 미움은 살인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그러므로 서로 미워하지 마시고 서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미움을 품고 살면 살인까지 가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깨어져버린 관계로 몰아갑니다. 이 미움은 자기 자신의 건강과 정신과 마음까지도 파먹고 상하게 합니다. 재물에도 손실을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이미지도 나쁘게 만듭니다. 독이 가득한 곳에는 독가스가 나옵니다. 마음에 독기를 품으면 그 독에서 미움의 독가스가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움의 독가스가 가득 찬 곳에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라, 서로 불쌍히 여겨라”고 우리를 향해 성경을 통해 수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금하는 제6계명은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에 관련된 계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제6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오히려 죽입니다(요 10:10).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므로(요 8:44) 처음부터 끝없이 죽이고 빼앗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함께 하는 개인이나 나라는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없이 살려주십니다. 죽은 생명을 살려주십니다. 죽은 신앙도 살려주시고 죽은 가정과 학업과 사업과 건강과 관계도 살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신 개인이나 나라는 생명을 존중하고 살려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셔 들여서 생명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이 살아나시길 바랍니다.
독은 무서운 물질입니다. 독이 몸에 들어오면 온 몸이 상해서 죽습니다. 뱀과 같은 맹독이 있는 동물이나 곤충에게 물리면 즉사합니다. 검객들이나 스파이들이 쏜 독침이나 독화살에 맞아도 죽습니다. 이처럼 맹독이 몸 안에 들어오면 치명상을 입고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맹독을 품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몸에 치명상을 입히고 심지어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거나 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맹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독침을 맞은 적도 맹독성 곤충이나 동물에 물린 적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맹독은 바로 증오심입니다. 증오심이란 독을 품고 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또는 서서히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분을 가득 품고 있다가 마귀에게 틈을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의 밥이 됩니다. ‘틈’은 헬라어로 ‘토포스(tovpo")’입니다. 거주하는 ‘장소’를 뜻하는데 행동할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분을 품고 있으면 그 분노 때문에 마귀가 맹활약할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증오심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망치고 다른 사람까지 해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고 죄가 너를 원하고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 4: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죄가 문 앞에 대기 상태로 있는데도 다스리고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만 죄에게 자신의 마음에 거주할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자 피를 나눈 친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이처럼 미움은 살인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다스려서 내 안에서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너와 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존귀하게 됩니다. 제6계명은 이것을 지켜주려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이처럼 강요의 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이 계명을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잘 따르지 않고 분을 그냥 둔다면 점점 자라납니다. 그러면 분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면 마귀가 점점 더 많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서로 죽이거나 다투거나 초죽음까지 몰고 갑니다. 서로의 관계를 무자비하게 깨고 죽은 관계로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결국 자신마저도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는 맛이 나지 않고 죽는 맛이 됩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평화롭고 화목하고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이러한 증오심과 분노와 독기가 사라지시길 바랍니다.
2. 생명 존중은 자신을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누구의 생명이든 귀합니다. 너와 나의 생명 모두가 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서로의 생명을 해치지 말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해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살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살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살하면 자기 혼자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위에 있는 많은 분들까지 안타깝게 만들고 연쇄적으로 죽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더욱 더 죽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내 생명이니까 내 멋대로 하겠다.’ 아닙니다. 생명은 자기 혼자만의 생명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연합된 생명인 것을 잘 아시길 바랍니다.
제6계명은 생명을 해칠 권리를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입장과 처지가 되어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지키고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술과 담배와 마약과 각종 중독으로 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음식물 섭취와 생활 습관도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대교리 문답 135문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제육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입니까?”이에 대한 답입니다. “제 육 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주의 깊은 연구와 합법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누구의 생명이든지 부당하게 빼앗아 가려는 모든 사상과 목적에 대항하고, 모든 격분을 억제하고, 그런 모든 경우와 시험과 습관을 피함으로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와, 하나님의 손길을 참아 견디는 것, 마음의 평온, 영적 즐거움, 고기와 음료와 약과 수면과 노동과 오락을 절제 있게 사용하고, 자비로운 생각, 사랑, 동정, 온유, 양선, 친절, 화평,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 관용, 화목적 자세, 피해에 대한 관용과 용서, 또한 악을 선으로 갚음과 곤궁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구제함과 죄 없는 자를 보호하고 옹호함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3. 생명 존중은 말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총도 있고 폭탄도 있고 기타 가공할 최신 무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기 외에 우리가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증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살계(殺戒)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붓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둘째는 입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며, 셋째는 돌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무기는 ‘입’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글로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가슴에 깊이 상처를 주는 언어 살인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혀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 입힌 상처는 칼로 입힌 상처보다 더 깊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상처가 나면 재빨리 치료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요? 치료법은 무엇일까요? 서로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잘 되어야 결국 내 자신도 잘 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무거운 미움의 짐과 한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4장 23절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과 말과 글로 낙서하면서 자신을 하잖게 여기고 자기의 마음을 서서히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를 깎아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을 잘못 사용해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잠언 18장 21절은 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자신과 다른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자기 자신의 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말에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에는 이처럼 창조적인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한 말이 나의 온 몸과 운명을 좌우합니다. 큰 배에 달린 작은 키가 배를 좌우로 움직이듯이(약 3:4) 내 몸의 작은 혀가 나의 온 몸과 마음과 운명을 좌우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나는 못한다. 할 수 없다. 나는 못 산다. 나는 가진 것 없다. 나는 안 된다. 나는 망했다. 우리 집은 안 된다. 틀렸다.’ 이런 부정적인 말은 그 말이 씨가 되어 자라서 그 말대로 됩니다. 부정적인 결과가 계속 들이닥쳐서 파괴하고 죽입니다. 지혜도, 재능도, 용기도, 재산도, 사람도, 신앙도 무너지게 만듭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도 안 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해 보자.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말 그대로 총명이 생기고 힘과 용기가 생기고 하는 일이 말 그대로 잘 됩니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자꾸 생기고 만들어지고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입술의 말로 묶이거나 입술의 말로 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6장 2절입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파괴적인 말, 부정적인 말, 실패하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도 해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 생산적인 말, 축복과 승리와 위로의 말을 하여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명의 말을 하시길 바랍니다.
룻기를 보면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생명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서 곡식을 베는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 이렇게 복을 빌어주는 장면이 많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2:12, 3:10), 룻이 보아스에게(2:13), 나오미가 보아스에게(2:19, 20), 장로들과 백성들이 보아스에게(4:11), 여인들이 나오미에게(4:14)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말로 창조적인 결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밭에서 곡식을 추수한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심은 대로 축복을 거두어 예수님의 가문이 되었고 그 자손 가운데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그 당시 힘들고 어려웠던 암흑기였던 사사시대였지만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한 가문은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입으로 말한 대로 복을 빌어주고 위로한 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잠언 11장 9절과 11절은 이러한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작은 혀가 격려하기도 하고 기를 죽이기도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면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리이위는 그가 쓴『세치 혀가 백만군사보다 강하다』에서 ‘이유극강(以柔克剛)’을 말했습니다. 부드러움으로 견고함을 이기는 책략입니다. 부와 지위의 상징인 더글러스와 미국의 대선에서 맞붙게 된 링컨의 예화입니다. “저는 링컨이라는 시골뜨기에게 귀족의 맛을 보여 주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더글러스에 맞서 링컨은 유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글러스는 체신장관, 토지장관, 내무장관 등을 역임한 큰 인물입니다. 반면에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재산이 얼마인지 물어봅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밖에 없지만, 그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지할 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오직 여러분들뿐입니다.”
혀는 개인과 나라를 살리기도 하고 망치기도 합니다. 최초의 살인은 누가 했습니까? 친형이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하여 깎아내리는 살인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깎아내리면 나 자신도 깎이는 아픔을 겪고 상대방 역시 아픔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와 한 인생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격려하고 축복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시키고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의 말을 하시길 바랍니다.
4. 생명 존중은 이웃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제6계명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단순하게 행동으로 살인한 것만 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정은 이것만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살인한 것까지도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이웃의 생명을 지키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생명 지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영적 119구조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을 보전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웃의 삶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 세계인 가운데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도와주지 않아서 죽으면 살인 방조죄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살할 정도로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회나 성도나 이웃이 책임을 지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경주 부자로 만석군 최씨 가문이 있습니다. 이들이 지키는 가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흉년이나 가뭄에 땅을 사들이지 마라”는 말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힘써 벌어서 이렇게 생명을 살려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죽음의 위험이 다분히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한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한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죽음을 가지고 무모한 묘기 등을 행할 때 제6계명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룰렛게임을 하거나, 수영금지 지역에서 수영하거나, 위험한 절벽 등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도 하면 안 됩니다. 자살하면 모든 끝이 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더 크고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알고 다시 부활하는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도 관심을 가져야하며 구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는데 경고하거나 붙잡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범죄에 해당되므로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겔 3:11, 17-21). 그러므로 영적 구조대로서 열심히 전도하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잘 지키는 생명 지킴이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5. 생명 존중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판단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공적으로 심사하고 판단하는 이외에 사적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쓸데없이 강한 사람은 자기 죄는 잘 안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는 잘 보입니다.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는 잘 안보이고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끌은 잘 보입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자기에게는 약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강합니다.
이와 같은 불건전한 판단은 모든 사람에게 독이 됩니다. 판단하는 자기 마음이 먼저 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편하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해가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가지고 불건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재판관이 아니라 실행자라고 하셨습니다(약 4:11).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섭섭해 하면 미움이 들어오고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살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가 불쌍히 여겨주어야 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약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추어내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사울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씩이나 찾아왔습니다. 동굴에서 한 번, 침상에서 한 번입니다. 두 경우 모두 힘들이지 않고 쉽게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유 없이 시달리고 쫓겨 다녀도 판단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사울 왕을 판단하고 처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악하기에 무조건 죽여야 할 악한 왕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부당한 취급을 받으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증오심이 생기고 미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사이의 문제임을 알고 처분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불의를 참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처리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처럼 행세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해주었습니다(창 50:15-21).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무술영화를 보면 대부분 부모나 스승을 죽인 사람을 찾아 나서서 복수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복수에 복수가 꼬리를 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 가문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 자손 대대로 죽이고 죽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 이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복수를 멈추게 합니다. 어느 한 쪽이 과감하게 일어나서 용서하면 복수는 멈추게 됩니다. 요셉은 복수하기를 멈추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의 생명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를 판단하고 자기가 당한 대로 복수했더라면 이스라엘 지파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판단하여 정죄하지 않고 용서함으로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레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으니 이제 보복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악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한 유언대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싹싹 빌었습니다. 지금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어마어마한 권세가 있으니 말 한마디면 자기들의 목이 모두 다 달아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때 요셉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울었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제쳐놓고 마음대로 형님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제가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녀까지 기르겠습니다.” 형들은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사랑을 낳고 생명을 낳습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흥분해서 형제를 죽였다면 이스라엘 열두 족속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밉고 섭섭한 것 많아도, 억울한 것 많아도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았기에 오늘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계속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질 수 있었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졌습니다. 지역, 이념, 빈부, 세대 간의 갈등이 많아졌습니다. 정치든 사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그 어디든 다툼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헤어지고 서로 죽이려고 덤비고 있습니다. 온통 깨지는 소리가 대한민국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르면 모두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다른 것을 틀린 것을 여기고 나쁜 것으로 여기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분열은 생명을 해치고 조직을 해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목 거울이 있으면 볼록거울이 있습니다. 자물쇠가 있고 열쇠가 있습니다. 톱니바퀴도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잘 돌아갑니다. 합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해야 된다. 나 같아야 한다.” 너무 강하면 탈이 납니다. 화합이 잘 안 됩니다. 여기서 서로 섭섭한 것이 많이 발생합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무조건 바꾸려고만 하지 말고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의 장점과 강점을 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알고 나쁜 것으로 아는 부부는 이것 때문에 일평생을 싸웁니다. 30-40년 까닭 없이 싸운 것을 후회하는 부부도 많습니다. 다른 것을 모르고 그것을 악으로 생각하고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기쁨은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해도 없어도 기쁘게 생각한 것처럼(합 3:17, 18) 상대방을 대해야 합니다.
지금 정부는 2만 달러 시대에 국민통합, 사회 통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극한 투쟁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투면 해결책이 없고 서로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미 말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요셉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리에 벗어나고 도덕에 벗어난 악한 것 이외에는 판단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함부로 정죄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잠언 20장 22절은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야고보 역시 4장 11절과 12절에서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요셉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미워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하여 화목을 택했습니다. 형제에게 보복하기보다 형제의 생명과 형제의 자녀들의 생명을 택하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울기까지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하고 형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생명을 택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권력이 있음에도 남용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이웃 형제의 생명을 살리는데 힘써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6. 생명 존중은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자신의 피도 흘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창 9:6-7). 성경은 이처럼 생명 존중의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생명을 살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요?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살리는 종교요 교회도 살리는 사명이 있고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해놓고 왜 죽어야 한다고 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이 사실을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진실로 진실로”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시려고 버둥거리면서 버티셨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인류의 목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한 목숨을 던지셨기 때문에 나와 우리 모든 인류는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24절에 이어서 25절에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삶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생의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26절에 더욱 더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리이기에 그 말씀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명 존중은 제도가 모든 것을 잘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장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세우신 기관인 기독교와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지체인 그리스도인이 살려주는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의 생명이 보존되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많은 생명을 살리시길 바랍니다.
7. 생명 존중은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치든 교육이든 어느 분야든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잘 다스리지 못하면 잘못된 것이 더 기승을 부려서 좋지 못한 결과가 옵니다. 평화 대신에 혼란이 옵니다. 선 대신에 악이 횡횡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 대신에 살기 어렵고 무서운 세상이 옵니다. 잘 다스린다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인입니다.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아들인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동생인 아벨을 그만 최초로 살인했습니다. 살인한 이유는 죄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죄가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런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그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해드림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부시는 56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40세까지 탕자였습니다. 20세부터 방탕하기 시작하여 극심한 알콜 중독자, 바람둥이에다 마약까지 복용했습니다. 부시가 40세 되던 해에 친구와 생일파티를 하는데 한 친구가 전도했습니다. 부시는 그 자리에서 교회에 한 번 나가 보겠다고 술에 취해 약속했습니다. 부시는 그 약속대로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갔는데 그 이후 술을 마시면 온 몸이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부시는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술을 끊게 되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부시는 “내가 끊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마시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끊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 힘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술을 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는 한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기는 것도 죄를 다스리는 것도 그 무엇을 하는 것도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생의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죄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죄를 다스려나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어도 예수님 피로 의롭다고 인정은 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죄와의 처절한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21)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죄도 함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고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떻게 해결 받을 수 있었기에 찬양을 드렸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 8:2) 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3-4).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18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우리에게 참 좋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죄를 다스리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 왔습니까? 그런데 생각만큼 잘 해결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와 멸시와 욕설 등으로 마음속의 살인을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죄를 다스려야 내가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자기의 수양에 의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다스리기 위해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구원이 없습니다. 약간의 수양은 될지언정 여전히 죄 가운데 죄에 눌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의 놀라운 사명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이루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아멘. 무조건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힘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안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죄를 다스려야 행복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생명의 법인 성령의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죄를 다스리면 됩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아멘.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가 하는 대로 그냥 버려두면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이 죄를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사울은 죄에 대해 변명하였으나, 다윗은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역사에 오명을 남겼고, 다윗은 역사의 성군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죄를 그냥 두면 안 됩니다. 큰 산불이 나는 것도 성냥 한 통에 전부 불이 붙여야 산불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냥 한 개로 불이 붙습니다. 담배 한 갑에 불이 붙어야 큰 불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담배꽁초 한 개가 큰 불을 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조그마한 죄도 용납하거나 침투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유혹할 때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회개하여 죄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자리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37편 8절을 보면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노와 불평은 악을 만듭니다. 살리지 않고 오히려 죽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최초의 가족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노를 처리하지 못한 가인에게 죄가 들어오자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해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분노가 죄를 만들어 가족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분노가 만든 죄가 신앙도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올바르게 드리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파괴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냐?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처럼 죄는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엎드려 있습니다. 인간을 덮치기 위해 으르렁 거리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먹이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우리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분노가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루를 넘기지 않도록 풀어야 합니다. 분노가 죄로 이어져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죄를 성령님을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평화의 나라를 이루시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나라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참좋은 제자들교회/참좋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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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