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이자, 벤야민과 아도르노 연구자였던 故김진영이 남긴 《발터 벤야민과 근대성》이라는 대중 강연을 녹취하고 정리해 출간한 첫 번째 강의록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철학과 문학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해박함을 통해 김진영이라는 사상가가 가진 폭넓은 지적 통찰과 깊은 지적 혜안을 읽을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의 삶과 사상뿐만 아니라, 벤야민을 매개로 근대성을 신화, 종교, 정치, 육체, 예술, 대도시와 연관시켜 고찰한다.
문학과 철학의 영역에 관심있는 인문·교양 독자들뿐만 아니라 벤야민과 서구 사상, 그리고 근대성·근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한 강의에서 저자는 벤야민을 불러내 과거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 사이의 은밀한 약속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북돋우려 한다. 저자가 깨어낸 벤야민과 벤야민 강의는 글을 읽음에 따라 스스로의 가슴을 부끄럽게 돌아보는 과정이다. 누구나 그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한 지식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가 느낀 부끄러움의 감정에 동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 소개
저자 김진영
철학자. 고려대학교 독문학과 대학원에서 카프카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박사 과정에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철학을 공부했다. (사)철학아카데미 대표를 지냈고, 여러 인문학 기관에서 철학과 소설, 예술을 주제로 강의했다. 문학 텍스트를 텍스트의 문맥에서 깊이 있게 읽어내는 ‘소설의 미로’ 등 인기 강의로 유명하다. 철학아카데미에서 2013년부터 벤야민 저작들을 강독하는 강의를 진행해 왔다. 2018년, 향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고 산문집인 『아침의 피아노』를 남겼으며, 공저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롤랑 바르트’ 편을 쓰고,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옮겼다.
목차
1강 발터 벤야민, 혹은 한 지식인의 삶 5
2강 발터 벤야민 혹은 꼽추 난쟁이 37
3강 벤야민, 근대성, 비상사태 64
4강 근대성과 신화성: 진보주의, 자본주의, 판타스마고리 107
5강 근대성과 종교: 돈, 무의식, 주물주의 149
6강 근대성과 정치: 폭력, 법, 정의 187
7강 근대성과 육체: 에로스, 불임증, 생명 215
8강 근대성과 예술: 아우라, 사진, 영화 247
9강 근대성과 대도시: 메트로폴리스, 폐허, 아카이브 287
10강 근대성과 역사: 전통과 상속권을 찾아서 319
편집 후기
주
출판사 서평
역사가는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가져와 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빼앗긴 전통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 아이들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얼굴을 기록해야만 합니다”(작가의 말)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는 철학자이자, 벤야민과 아도르노 연구자였던 고(故) 김진영 선생이 남긴 강의를 정리한 첫 번째 강의록이다. 선생은 독일에서 오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철학아카데미와 여러 대학에서 벤야민을 강의해 왔다. 2013년부터는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벤야민에 대한 저술을 준비하기 위해 철학아카데미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벤야민 선집을 읽는 강독 강의를 진행해왔다. 이 연속 강의들은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부터 시작되어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같은 중요한 소논문 강독을 거쳐 6학기에 이르는 『독일 비애극의 원천』 강독으로 지속되었고, 병마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아케이드 프로젝트』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이 책은 벤야민 강독에 앞서 대중강연으로 열렸던 “발터 벤야민과 근대성”이라는 강의를 녹취하고 정리해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김진영 선생의 벤야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근대성을 중심으로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독해와 지혜를 선사할 것이다.
왜 벤야민인가?
서구에서도 한국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주목받고 있는 벤야민이지만, 철학자 김진영은 왜 벤야민에게 주목했을까? 김진영 선생은 벤야민이 “역사라는 이름의 운동장에 자신의 삶을 모두 주어버린 사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벤야민은 서구 자본주의의 절정기가 급작스럽게 1차 대전과 2차 대전으로 치닫고 있는 유럽에서 서구 문명의 몰락을 끝까지 지켜보며 기록하다가 자신의 운명까지 바친 지식인이었다. 서구 근대문명을 산보객처럼 방황하듯 거닐며 벤야민은 역사철학적 시선으로 몰락해가는 시대의 표지를 꼼꼼히 수집하고 기록하였으며, 새롭게 배치하며 코멘트(kommentar)를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의 표지처럼 남은 쓰레기들 속에서, 폐허 속에서, 버려진 것들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것들 속에서 남아있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이라는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행위이자 실천이었다. 벤야민은 자신의 삶의 위기의 순간에 정리하고 있던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자신의 유언을 기록하듯이 마지막 장 「꼽추난쟁이」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벤야민은 스스로를 사회의 소외당한 ‘꼽추난쟁이’와 같은 이들을 눈여겨 바라보지 못했던 시절에서 자신이 점점 그러한 꼽추난쟁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로 변하는 과정을 덤덤히 기록했다.
박탈당한 전통을 되찾기
자본주의의 실질적인 행위자이지만 그 한 켠으로 밀려난 프롤레타리아트는 과연 대중이나 군중에 불과한 것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품들이 진열된 쇼윈도의 바깥에서 반짝이는 환등상과 같은 상품들에 그저 부러워하고 현혹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근대인들은 부르주아든 사회주의적 진보주의자든 자신의 온전한 삶을 박탈당하고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나가며, 시대의 꿈과 소망이 담긴 자본주의를 정당하게 상속받지 못한 채 자신들의 삶을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우리가 박탈당한 전통은 의례화되고 아우라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고 지배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지배자들이 소유하고 도구가 되어버린 전통을 박탈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해야 한다.
역사가의 임무
“적들은 나날이 승리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도구가 되어 버린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빼앗지 못한다면,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해 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우리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도 안전해지지 못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소비시대의 소비자로서 수동적인 피지배계급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대중과 군중을 벤야민은 ‘비상사태’ 속에서 역사의 주체로서 깨우려고 한다. 역사 속에서 패배당한 그들 안에는 “복수의 정신”이 오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소외하고 착취한 이들을 정당하게 증오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우리는 과거의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지금 이 “위기의 순간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기억의 이미지를 꼭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미래에 지금 여기의 삶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되며, 과거의 우리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얼굴을 기억해 지금 여기를 조금이라도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역사가는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수집한 무엇을 고르고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기록해 언젠가 후대의 사람들이 그 수집물의 배치를 통해 발견하고 도래하게 될 의미를 충실히 모아 놓아야 한다(아카이브). 그것이 각자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 그리고 우리 역사가의 임무이다.
김진영과 벤야민, 그리고 벤야민 강의
김진영 선생의 강의를 통해 깨어난 벤야민은 김진영의 벤야민이다. 그는 벤야민을 불러내 “과거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 사이의 은밀한 약속”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북돋우려 한다. 벤야민과 같이 “토성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슬픔에 몰입하는 멜랑콜리커로서 자신 안에 있는 “메시아적인 힘”을 길어 올려 참담한 현 시대를 읽어내고 수집하며 대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벤야민을 읽는 것은, 그리고 벤야민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난쟁이 꼽추’가 되어 가는 과정을 돌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깨어낸 벤야민과 벤야민 강의는 글을 읽음에 따라 스스로의 가슴을 부끄럽게 돌아보는 과정이다. 누구나 그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한 지식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가 느낀 부끄러움의 감정에 동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 속으로
한 시대의 몰락은 많은 이들이 외치듯 그 몰락할 미래시간에의 비전이나 가능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비록 풍요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해도, 만일 그 시대가 과거의 시간을 망각한다면 그 시대의 미래는 몰락의 미래, 지배자들의 미래, 적들이 승리하는 미래일 뿐입니다. 그 미래는 지금의 승리자들이 여전히 그리고 더더욱 승리하는 그런 미래일 뿐입니다. 그 미래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은 고독한 시간, 버려진 시간일 뿐입니다. 벤야민에게는 당대의 시간이, 나아가 인류사의 시간 모두가 이 무상하고도 잔인한 헛된 시간, 승리자들만이 지속적으로 승리를 구가하는 그런 비역사의 시간, 비상사태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1강 중에서)
역사가는 시대의 절망의 시간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기술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겉보기에는 더 할 수 없이 화려한 발전의 시대상으로, 그러나 전쟁이라는 역사의 파국으로, 마치 비탈길을 구르는 공처럼 굴러가는 당대의 시대 앞에서, 역사가는 슬픔에 몰입하는 멜랑콜리커입니다. 벤야민은 당대 역사를 독일 비애극을 통해 멜랑콜리의 시선으로 응시하였습니다. 멜랑콜리커는 두 개의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무상성의 시간으로 응시하는 폐허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폐허를 새로운 역사의 시간으로 구명하고자 하는 천사의 시선입니다. … 벤야민은 파국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그 파국을 넘어서는 구원의 드라마인 독일 비애극을 통해 몰락이면서 구원인 이중 형식을 가지고 와서 알레고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알레고리의 시선으로 당대의 역사를 응시합니다. 그럴 때 당대의 역사는 파국이 예정된 몰락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그 파국을 넘어 또 다른 역사가 반복되는 반복의 시간입니다. 그 반복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도약(Sprung)’할 수 있는 희망, 희망 없는 것들 안에 존재하는 희망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횔덜린의 “위기가 가까우니 구원도 가까우리/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또한 자라나리”라는 정언처럼 위기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 즉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돌연한 ‘도약’을 통해서만 역사의 시간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1강 중에서)
벤야민에게 역사의 희망은 미래와 진보에 있지 않았습니다. 벤야민의 희망은 ‘희망 없는 것들 속의 희망’으로만 존재했습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두 근대적 미래와 진보의 목적지로 향할 때, 벤야민은 거꾸로 근대를 거슬러 19세기의 기원사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 지나간 과거’로 역행했습니다. 거기에 망각된 채로 남겨진 사라진 것과 옛 것들 사이를 주유하고 산책하면서 희망 없는 것 속의 희망을 수집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파사주(Passage)입니다.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된 『파사주작업(Passagenwerk)』(『아케이드 프로젝트』)은 그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1강 중에서)
문명은 진정한 역사로 건너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지만, 현재에서 그 결정의 순간을 되돌아보면 완전히 잘못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리고 역사는 어리석기 그지없는데, 항상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나쁜 것으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그 결정의 순간, 문지방 영역에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건너갈 수도, 가장 나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항상 잘못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데, 우리는 이 선택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변증법적 이미지의 상태, 정지 상태, 변증법적 상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안정되지 않은 상태, 문지방 상태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가 결정적 시기여서, 비록 역사가의 일은 끝난다 할지라도 이 상태 속으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이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순간 이미지일 뿐입니다. 역사가는 메시아를 도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에게 메시아는 하루 늦게 옵니다. 그런데 그 하루 늦게 오는 사이에 역사가는 죽습니다. 벤야민은 그것이 바로 역사가의 임무이자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10강 중에서)
피지배 계급이야말로 역사적 주체입니다. 이 계급은 역사 속에서 패배를 당해온 이들이지만, 그들 안에는 “복수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역사 속에 향일성이 있듯이 역사적 상속권을 탈취당한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들도 깨닫고 있지 못하는 복수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 복수의 정신이 바로 증오와 희생의 정신입니다. 증오란 정당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미워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당하게 미워할 수 있는 정신이며, 동시에 전통을 탈취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그 무엇인가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수의 에너지가 나오려면 그 원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잘 살게 해달라는 자식들의 얼굴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떠올린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미래주의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원천은 바로 지난 날 짓밟히면서 살아왔던 우리의 아버지들의 얼굴일 것입니다. 과거의 아버지가 어떻게 짓밟히면서 살아왔는가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약속된 우리의 아이들의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의 빼앗긴 전통을 회복할 때에만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새로운 미래 속에서만 나의 아이들이 행복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빼앗겨버린 전통을 되찾지 않고 지금의 전통에 그대로 의존한다면 우리의 아버지들이 실수를 했듯이 우리 자신의 실수에 의해 나의 아이들도 나와 같은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미래의 내 자식들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의 아버지들의 얼굴, 어머니들의 얼굴입니다.
(10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