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반란, 꿈이 생각납니다.
“어떤 여성이 네모난 블록 네 개를 움직여 십자형으로 맞추더니, 이것이 ‘의식의 반란’이라고 말한다.
습관적인 것, 그래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이 알아차린 것을 말하는 줄 내가 바로 이해한다.
이 여성은 어디에서 와서 나한테 이런 것을 알려줄까? 이것이 영혼의 자율적 움직임이구나 (꿈-부분)”
이 꿈을 꾸고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이 여성은, 이 영혼anima은 나의 일부인가? 아닌가?
자율적으로 나한테 오고, 또 자기 마음대로 떠나기도 하면, 과연 나한테 속했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꿈을 빚어 그런 여성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 자율적인 여성인데,
그래도 내 꿈 속에 있었는데, 그럼 나의 일부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럼 기생충은 나의 일부인가? 아닌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뱃 속을 움직이니 자율적 생물인데
한편, 내가 움직이는대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고,
내 몸이 제공하는 양분에 의존하니 나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여성이 이와 같구나.
있는 줄 모르고 같이 살다, 어느 때는 자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내게 말을 걸고, 내게 속해서 그래서 내가 변하는구나.
융이 꿈의 여성상을 아니마, 영혼soul이라 이름 붙인 것은 적절한 듯합니다.
동물이나 사물을 사람처럼 그린 것을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 할 때 그 아니마anima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숫한 영들이 예언을 하게 하고,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게 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바울은 염려하고 정리하려 했습니다.
기생충이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는 것처럼,
영혼 또한 현실에 드러날 때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해서,
아마 ‘의식의 반란’을 경험한 바울이 발달된 의식을 표명해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은 사실, 바울 이전에도, 바울 때도, 또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현대인도 ‘의식의 반란’을 내적으로 경험하며 기생충-영을 체험하는 일이 매일매일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의 현실태를 이 땅에 신이 아닌 인간으로 실현해 나가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내적 체험을 흔히 외적으로 성현의 말이나 모범적인 위인의 말에 빗대어 실행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준은 의식이 약하고 자라는 청년기에는 매우 도움이 되는데, 왜냐하면 영은 ‘악한 영’이 되든지, ‘성령’이 되든지는 또 다른 다음의 인간의 자율적 영역에서 드러난 결과이기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 시대에 한 일이 이러한 기준의 정립이고, 그것이 의식의 발달이기도 한데, 그래서 바울의 사랑은, 미운 정 고운 정의 총합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사랑은 실현된 행위를 구획짓는 기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저는 지금은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구체적 형체로 못 박으면, 사랑의 반대말이나, 사랑을 실현하는 구조 같은 것에 갇히게 되고, 그 때는 남이 말하는 사랑을 실현하려 애쓰게 되니까요. 그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한데, 그것은 하나님에게 종교에게 예속되는 것에 머무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율적인 영에게 새로 들은 말을 나 또한 자율적으로 발현할 책임이 있고, 그것이 성령과 동행하는, 내 속의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의 발현이 나와 주위의 삶과 생명을 영화롭게 하는지를 돌아보며 의식의 발달을 관조하는 것이 내 속에 계속 살아계시는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의 반란 속에서, 종파에 갇히지 않은 종교성, 기생충-영혼-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