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기맥 1~5구간

[손변]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변입니다.
이번에 한강기맥 졸업해서 1~5구간 한꺼번에 올립니다.

▱ 계방산의 이른 가을

- 한강기맥 1구간(상원사-두로봉-오대산비로봉-호령봉-계방산-운두령, 32㎞, 2018.9.16.)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빗물을 흘려보내는 계곡 물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임도를 따라 두로령으로 올라갔다. 언제부터인지 물소리는 끊기고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두로령에 배낭을 모아 두고 두로봉으로 올라갔다. 백두대간 두로봉에서 시작되는 한강기맥은 계방산, 보래봉, 덕고산, 운무산, 대학산, 덕구산, 응곡산, 만대산, 오음산, 금물산, 갈기산, 소리산, 용문산, 청계산을 거쳐 양평 두물머리에서 끝을 맺는 169㎞의 산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며 뻗어 내리는 한강기맥의 북쪽으로 소양강과 홍천강이 북한강과 합류하고, 남쪽으로 평창강과 섬강이 남한강과 합류하여 두물머리에서 한데 섞여 한강을 이룬다.

기존의 J3 정맥6차팀 대원들에 몇 분이 추가로 합류하여 기, 지맥산행을 함께하기로 했다. 상왕봉, 오대산 비로봉까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비로봉에 도착하여 배낭커버를 깔고 간식을 먹으려는데 사진을 찍자마자 벌써 출발할 채비들을 하고 있다. 비가 계속 내려 몸이 으스스 추워졌다. 주섬주섬 비옷을 꺼내 입고 호령봉으로 향했다. 비로봉부터 계방산까지 14㎞는 비탐방구간으로 돌길은 미끄러웠고, 잡목이 우거져 헤치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빗속에서 자줏빛 금강초롱이 배시시 웃고 있다.

날이 밝아지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계방산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의 야간산행에다 쉬지 않고 달리는 선두조를 따라잡느라 숨이 턱에 차올랐다. 예전에 눈꽃산행으로 쉽게 올랐던 계방산이었는데 산밑에서부터 오르자니 그 높이만큼 쉽지 않다. 비탈은 가파르고 봉우리들은 끊임없이 앞을 가로막았다. 산속 여기저기 마과목이 빨갛게 익어 간다. 대장이 술을 담근다고 보이는 나무마다 몇 움큼이나 땄다. 소계방산 갈림길에서 잠시 쉬어 간식을 먹었다. 거의 다 온 줄 알았는데 계방산은 한참이나 더 걸어야 했다.

비가 그친 산길에 저 혼자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파르르 떨던 근육이 풀어지고 며칠 말미도 없이 결기는 사뭇 누그러졌다.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산밑과 발길 드문 산정 사이에 바람처럼 한 계절이 흐른다. 수줍은 가을을 빠져나가는 사이 걸음은 느려지고 맨들맨들해진 슬픔들이 발부리에 차였다. 수색해 봐야 지닌 것 없으니 지난여름 달뜬 기억만 들킬 것이다. 누렇고 붉은 울음을 토해내는 단풍 너머로 계방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방산의 이른 가을을 보기는 처음이다. 멀리 산들 위로 파도가 밀려가듯 비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풍차가 서 있는 한강기맥 쪽의 능선들은 흰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운두령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벌개미취,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었다. 밤새 빗길을 걸었더니 발바닥이 부르텄다. 운두령 주막에서 쓸데없이 부풀어져 술을 마셨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길을 걷는 것인가, 길이 나를 걷는 것인가.

▱ 저 혼자 울다 가는 것들

-한강기맥 2구간(운두령-보래봉-회령봉-청량봉-구목령-덕고산-운무산-먼드래재, 41㎞, 2018.10.7.)

계방산 자락의 운두령에서 9㎞쯤 올라가면 보래봉, 회령봉이 나오는데,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으로 유명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다. 산길에는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오래된 달빛처럼 널브러져 있다. 제때에 내려앉은 잎들과 태풍 콩레이에 억지로 목을 꺾은 잎들은 위아래 없이 포개져 뒹굴었다. 봉평시장 성서방네 처녀를 찾아 떠돌던 장돌뱅이 허생원이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 살까’ 꿈꾸던 메밀꽃 핀 달밤의 산길도 이 근처 어디쯤일 것이다. 그믐께라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는 간 데 없고, 젖은 숲우듬지 너머로 멱을 감은 별빛만 뽀얗게 번졌다.

덕고산에서 운무산까지는 산죽길을 지나 6㎞쯤 걸어야 한다. 가도 가도 흐릿하던 운무산이 나무들 사이로 점점 또렷해지는데, 우뚝 솟은 형상이 듣던 대로 범상치 않았다. 오르락내리락을 대여섯 차례 하고 나서야 겨우 산을 마주했는데, 워낙 가팔라서 로프에 의지해 정상에 올랐다. 버석버석한 바위구간이 많아 겨울철에는 위험할 것 같았다.

운무산(980m)은 홍천군 서석면 청량리와 횡성군 청일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항상 구름과 안개가 끼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 먼드래재로 내려가는 구간도 군데군데 위험하다. 조금 내려가자 탁 트인 전망바위가 나온다. 계방산은 운무산에 가려 보이지 않고, 앞으로 넘어야 할 기맥의 산들이 두루마리처럼 길게 펼쳐졌다.

잡풀들은 서둘러 누울 자리를 찾고 신갈나무 이파리들은 노을처럼 오그라드는데, 저멀리 첩첩한 산들의 볏은 아직 꼿꼿한 오뉴월이다. 봉우리들 징검다리 사이로 여름보다 깊고 시푸른 강이 흐른다. 작년 여름 9정맥이 끝나고 다시는 이런 고단한 산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무엇이 다시 이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일까. 철마다 바뀌는 초야 같은 숲의 냄새와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 땀에 범벅이 된 희열, 그리고 문득 저만치 산줄기 따라 출렁이는 허무였을까.

16시간의 산행 끝에 먼드래재에 도착했다. 움푹 팬 도로의 괸 물에 발을 씻었다. 아무도 모르게 절로 피었다 물드는 오지의 산들, 며칠만 지나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산길들. 이렇게 가을은 울다 가는 것인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저 혼자 울다 가는구나.

▱ 유년처럼 노란 가을이 있었네

- 한강기맥 3구간(먼드래재-수리봉-대학산-화방고개-덕구산-응곡산-만대산-작은삼마치-오음산-삼마치-상창고개, 38.3㎞, 2018.11.4.)

밤 12시 30분 먼드래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가파른 산길이 이어지고 수북이 쌓인 낙엽에 발길은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길섶의 애먼 나뭇가지를 붙잡아 보지만 겨릅대처럼 툭툭 부러진다. 낙엽들은 촛불 아래 흥건한 촛농처럼 널브러졌다. 녹아내린 가을이 한들거리며 밤길을 따라 흘렀다.

여우재, 수리봉 오르는 길은 듣던 대로 공포스러웠다. 기,지맥꾼들 외에는 찾는 이도 없는지 위험한 구간인데도 변변한 밧줄 하나 없다. 누군가 매 놓은 얇은 끈을 붙잡고 후들후들 바위를 넘었다. 까딱 중심을 잃었다간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질 판이다.

벼랑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다 네발로 기어서 오르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정신이 없다. 아직 열기가 빠지지 않은 낙엽이 길을 지우고, 발걸음은 눈길처럼 허방을 짚었다. 초봄 같은 날씨에다 바람이 불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리봉에서 잠시 멈춰 턱에 닿는 숨을 골랐다. 시커먼 산봉우리 어깨 위로 그믐달이 앙칼지게 돌아앉았고, 잔별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나뭇가지 끝에서 졸고 있다.

수리봉에서 대학산까지도 험한 급경사가 계속 이어졌다. 대학산은 홍천군 동면과 서석면에 걸쳐 있는 오지의 산으로 공작산과 발교산 사이에 있다. 대학산을 지날 무렵 휘우듬한 나무들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저멀리 숲에서부터 부유스름하게 여명이 트기 시작했다. 아침 7시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화방고개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화방고개에서 먼드래재 14.5㎞ 구간이 공룡능선보다 10배는 어렵다고 했다는데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니었다. 급경사가 많아 힘들기도 하지만 군데군데 위험구간이 있어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오지의 산길이다. 빵조각으로 아침을 대충 해결하고 버스에서 5분 정도 눈을 붙였다.

덕구산, 응곡산을 넘을 때까지도 조망 하나 없더니 만대산을 지나자 처음으로 풍경이 열렸다. 줄지어 늘어선 홍천과 횡성의 산줄기에는 나이 든 농부의 목주름 같은 음영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무들 여윈 팔뚝에는 붉은 혈흔이 낭자하다. 울긋불긋했을 시간들을 떨군 자리에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움푹 파인 엽흔에서 여름내 웅성거리던 환청이 들린다. 산새 한 마리 깃들 곳 없이 숲은 다시 황량해졌다.

저만치 억새풀이 은빛으로 흔들리고 그 너머로 악명 높은 오음산이 보였다. 뾰족한 산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주군의 기세다. 깊이 파인 산들의 해자를 몇 번이나 넘어야 저 산에 닿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바로 앞처럼 보이던 오음산은 작은삼마치를 지나 한참을 가도 가까워지지 않더니 3시간을 굽이굽이 심산유곡을 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정상 주위로 군부대가 들어서 있는 바람에 철책에 매달려 겨우 오음산에 도착했다. 오음산(五音山, 930m)은 홍천군 홍천읍과 횡성군 공근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6·25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다섯 장수와 다섯 가지 울음소리의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도 쉽지가 않다. 급경사 길을 밧줄에 매달려 미끄러져 내려왔다. 삼마치를 지나 3㎞쯤 더 걸으면 횡성군 공근면의 상창고개가 나온다. 오후 5시 25분, 17시간에 걸친 산행이 끝이 났다. 40㎞ 급 무박산행 중에서는 설악산 한계령에서 진부령까지의 코스에 버금가는 최고 난도의 산길이다.

산정을 내려온 단풍은 고갯마루에서 끝물처럼 흐느적거렸다. 유년처럼 노랗던 가을도 그대를 향해 붉게 물들었다. 자발없이 찾아왔다 황망히 떠나간다.

▱ 산속의 무법자들

- 한강기맥 4구간(상창고개-금물산-갈기산-신당고개-송이재봉-소리산-비솔고개, 38㎞, 2018.12.2.)

밤 12시 횡성군 공근면의 상창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양지봉 오르는 길, 듬성해진 떡갈나무 우듬지 위로 총총한 별들이 얼음 조각처럼 반짝였다. 숲이 끝나가는 저 멀리서 그믐달은 무뎌진 환도같이 껌벅거린다. 양지봉부터 금물산까지는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도둑눈은 흔적만 남고 애먼 낙엽만 수북했다.

금물산(今勿山, 776m)은 홍천군 남면 유치리와 횡성군 공근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옛날에 금과 은을 캤다고도 하고, 모양이 그물을 친 것 같다고도 했다. 기맥길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갈림길에 배낭을 벗어 놓고 성지봉까지 왕복 3.4킬로를 다녀왔다. 가파른데다 낙엽까지 깊어 미끄러웠는데, 갑자기 허기가 져서 어지러웠다. 시루봉을 지나 기맥길을 놓쳤다. 억새인지 모를 키 큰 풀들이 무성한 임도를 따라가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잠기는 눈을 뜨기 위해 별수를 다 써 봐도 소용이 없다.

갈기산 정상까지는 네댓 개의 만만찮은 봉우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번 구간은 좀 쉽다 해서 어제 새벽에 잠을 설치고 운동을 다녀왔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갈기산 바로 밑 절벽바위, 부부바위를 지나칠 무렵 날이 밝았다. 서쪽으로 양평군 청운면의 마을들이 희부연 아침안개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겹의 무채색 산줄기 너머에서 금빛 햇무리가 폭발하듯 번지고 있었다. 길고 습윤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아침은 핼쑥한 들판에 낮게 엎드렸다. 매일 끌어당기는 저 백지의 새벽에 오늘도 새로운 맹서 하나 적을 수 없다. 구름이야 바람이야 제 몸 닳고 닳아 이 세상 적시고 말리지만, 낙엽이나 쓸고 가는 이들은 흩어지는 허깨비처럼 흔적 하나 없구나.

능선 곳곳에 바위가 튀어나와 있는 갈기산(葛基山, 685m)은 양평군 청운면에서 홍천군 남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 동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부동산(不動産)이라는 옛 정상석이 함께 서 있다. 신당고개 쪽으로 향하는데 속옷이 젖어 빨리 걷는데도 춥다. 다가올 삭풍의 전조인지 바람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신당고개 폐휴게소에서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데,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44번 국도를 넘어 가파르게 오르면 얼마간은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통골고개, 밭배고개를 지나는데 오늘따라 산악오토바이족들을 많이 만났다. 오토바이 십여 대가 대오를 이루며 산길을 누비는데, 굉음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풀풀거리고 거대한 바퀴는 산길을 깊게 할퀴고 지나갔다. 참다못해 대장일 법한 사람한테 허가 없이 이렇게 산을 훼손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으나 무슨 상관이냐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훼손된 산길은 여름 장마철이면 붉은 토사가 흘러내려 더 깊이 파이고, 등산객들은 그 옆으로 새로운 길을 내면서 산은 어지러워져 종내 산사태가 날 것이었다. 자신만의 취미에 심취해 나무와 동물들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이 산속의 무법자들에 대한 단속이 반드시 필요하다.

송이재봉까지는 다시 가파른 길이 계속되었다. 졸음은 가셨으나 아직도 속도가 나지 않는다. 35㎞ 지점인 송이재봉부터 몸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푸르게 휘날리다가 가을날 붉디붉게 소곤거렸을 잎들이 산길에 낭자하다. 잎이 떠난 가지에 바람은 대개 머물지 못했다. 비척대는 바람 몇 올 걸치고 겨울을 걸어가는 나무들, 그 아래 버석거리는 낙엽은 걸음인가 길인가. 그 위로 곧 눈이 한 길 쌓일 텐데 푹푹 빠져드는 올겨울의 출렁거림이 어지럽겠다.

소리산에서 비솔고개로 낙엽을 타고 활강했다. 비솔고개는 양평군 단월면에서 홍천군 서면으로 이어지는 345번 도로에 있다. 버스를 타고 양평의 <뉘뫼주>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흥에 겨웠는지 평소 술을 안 마시는 사인암님이 대취했다. 한강기맥도 이제 막바지다.

▱ 인연들은 합쳐지고

-한강기맥 5구간(비솔고개-싸리봉-단월봉-천사봉-용문산 가섭봉-유명산-소구니산-농다치고개-옥산-말머리봉-청계산-갑산공원-두물머리, 41㎞, 2018.12.16.)

사당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밤 11시 40분경 비솔고개에 도착했다. 그믐께가 아닌데도 달빛은 희미해 산길에 먹물 같은 어둠뿐이다. 오늘 구간이 만만치 않겠지만 한강기맥을 졸업하는 날이라 조금은 설렌다. 싸리봉, 단월봉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천사봉이 나온다. 이 길을 올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6㎞ 남짓하는 거리에 오르내림이 심해 녹록지 않은 구간이다. 두터운 낙엽도 미끄러운데다 그 위에 눈이 쌓여 급경사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얼마나 땀이 쏟아지는지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산행 초반인데도 천사봉에 도착할 무렵 벌써 지쳐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천사봉(1004m, 폭산 또는 문례봉)은 용문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3km 거리에 위치한 산인데, `용계조계(龍溪鳥溪)'로 많이 알려진 용계골과 조계골을 거느리고 있다. 눈길을 1시간 10분쯤 더 걸어 용문산에 도착했다. 용문산 가섭봉(1,157m)은 양평군에 있는 산으로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에 이어 네 번째로 높다. 처음에는 미지산이었는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용문산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고 한다. 아래쪽 멀리 양평군의 마을들이 반딧불처럼 점점이 반득거렸다. 한강기맥은 워낙 오지의 산길이라 마을의 야경을 볼 일이 거의 없다.

정상에서 내려와 얼마간 걷다가 새벽 4시쯤 길가에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길 위에 쓰러진 나무에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이미 잠은 멀리 달아났다. 배너미고개에서 유명산까지는 평이한 길이 이어진다. 활공장을 지나 새벽 6시 20분경 유명산에 도착했다. 유명산(有明山, 862m)은 산 정상에서 말을 길렀다고 해서 마유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지금의 이름은 어느 산악회가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산을 발견하고 진유명이라는 여성대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대부산을 다니러 간 대원들을 기다리는데 정상의 밤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그곳에서 1㎞쯤 걸으면 소구니산(801m)이 나오는데, 선어치고개를 사이로 유명산과 연결되어 있다. 신선이 남한강에서 고기를 낚아 고개를 넘던 중 갑자기 고기가 살아나 선어(鮮魚)가 되어 소구니산을 넘고 유명산 뒤의 산으로 날아가 내려앉았는데, 그 후 고기가 내려앉은 산을 어비산(魚飛山)이라 했다던가.

아침 7시 반쯤 농다치고개에 도착했다. 결혼한 새색시가 장롱을 짊어진 짐꾼들을 앞세우고 넘어 올 때면 좁은 길에 장롱이 길옆의 바위에 부딪힐까 봐 '농 다칠라 농 다칠라' 조바심쳤다고 해서 농다치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설에서 이들 고개와 산을 넘나들었을 옛사람들의 신산함과 익살이 묻어난다. 고갯길에 있는 포장마차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해피맨님이 끓여준 라면에 도사님이 담근 마가목주 몇 잔을 마셨더니 피곤이 좀 풀린다.

옥산(580m), 말머리봉을 지나 쉽지 않은 봉우리를 또 몇 개 넘으면 된고개가 나온다. 산행을 하다 보면 큰 산보다는 이름 없는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더 힘들 때가 있다. 다시 대여섯 개의 무명봉을 넘어 오전 11시 40분 청계산(658m)에 도착했다.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청계산은 한강기맥의 마지막 큰 산이다. 정상 바로 밑에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이 단체사진을 찍어 주었다. 막걸리나 한 잔 들이켜고 싶었지만 날이 추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멀리 남한강이 희미하게 보였다.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의 산줄기를 걸었는데도 강을 본 것은 처음이다. 산맥들은 기운을 다하고 끝에 다다를 즈음이면 이렇게 저무는 강을 만난다.

이제 다 왔겠거니 했는데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이 몇 번인가 계속되었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벗고개 터널 위 풀밭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무거워진 몸을 끌고 4㎞쯤 더 걸어가자 최진실 씨 묘가 있는 갑산공원묘원이 나왔다.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사진 밑에 캔커피가 놓여 있다. “만인의 연인! 사랑스러운 그녀, 이곳에 잠들다”

한강기맥의 울그락불그락한 산줄기는 여기서부터 맥을 놓고 양수리의 한강을 향해 낮게 풀어졌다. 16시간의 산행 끝에 양수역을 지나 오후 4시 양평 두물머리에 도착했다. 멀리서 달려온 생면부지의 북한강과 남한강은 이곳에서 합쳐져 한강으로 흐른다. 오대산 두로봉에서 시작된 한강기맥 190㎞는 계방산, 운무산, 대학산, 오음산, 갈기산, 용문산, 청계산을 거쳐 이곳 양평 두물머리에서 끝이 났다. 늦은 오후의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강기슭을 따라 젊은 연인들은 두 인연을 포갠 채 강물보다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솔별대장님 이하 기지맥팀원님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대대로]

5구간 한번에 정리하셨네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손변]

대장님이 기맥하랴 정맥하랴 더 고생하셨지요. 함께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세이(尹美連)]

한강기맥 1구간 신나서 룰루 랄라 산행하고 2구간부터 멍멍고생ㅜㅜ 3구간 더심함4 구간이젠 포기상태 적응해갈무렵 5구간다시 룰루랄라~
기맥이 뭔지도 모르고 까불까불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네요 그래서 기맥가기전 체력훈련 열심히 해서 가니 정말 기맥길이 넘잼나네요
열심히 체력단련해 담구간도 잼나게 쫏아다녀볼랍니다 홧팅!손변님 후기 넘 잘 쓰셔서 작가하셔도 되겠어요 멋지심^^*복습 잘하고 갑니다 사진도 잘 찍으시고 함께해 감사~~

[손변]

세이님 덕분에 기맥길이 재미났어유. 이제 날아다니셔서 꽁무니 쫓기도 겁나 힘들더만유. ㅎ 메리 성탄~~~

[페가소스(안정미)]

한강기맥길은 어떤길일까 궁금했는데..
손변님 기품있는 산행기와 글로 잘보고 갑니다.. 다음기맥길은 어디로 갈지도 궁금하네요.
기맥길도 즐기는걸음하세요.수고하셨습니다.

[손변]

그쪽에서는 좀 먼 길이겠네요. ㅎ다음 길이 어딘지 솔별대장이 통 말을 안해줘요. 행복한 성탄 되시구요~~~

[새벽누리]

이거 다 기억허구 쓰는규?
아니면 쬐끔씩 써놨다 합쳤는지~~

[손변]

잘 지내시는가? 써 놓은 거 합친 거쥬 ㅎㅎ

[바랭이(한종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산행기록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산행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축하드립니다.

[손변]

아이고, 감사합니다. 총대장님. 즐거운 성탄 되십시오~~~

[추산(박노군)]

유명산 이름이 그렇게도 만들어 지는 군요 ㅎㅎ
옛 동지들과 함께한 산행 수고하셨습니다.

[손변]

ㅎ 그러게요. 대장님,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시죠? 예전에 무더운 낙동정맥 어느 고개에서 수박 지원해 주신 일이 생각나네요~~~

[happy man]

난 이제서야 후기를 ㅋㅋㅋ
좀 늦었지만 힘들게 걸은길이 이젠 웃으면서 되새겨봅니다.
아찔했던구간 쒼나게 달리던 구간 풍경이 아름다운구간 흐린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수있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영산기맥도 함께 즐겨보자구요~~~

[손변]

ㅋㅋ 어째 숙제하는 느낌이유. 암튼 영산기맥도 중탈 없이 쭈욱 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