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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2:21-24
요즘 세상을 보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도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는 엄마가 자식을 목 졸라 죽이더니 금주에는 아내가 남편 이름으로 보험 들어 놓고 내연 남으로 하여금 교통 사고 뺑소니로 죽인 사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때려죽인 사건 등 인면수심의 사건들이 이어 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 삶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작년 6월 경기도 안양에서는 흉기에 의해 가슴과 얼굴이 수십 차례나 찔려 무참히 살해된 40대 여인이 있었습니다.
깊은 원한에 의한 범행 같았는데 범인을 잡고 보니 보험금을 노린 아들이 친구와 공모해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 범죄' 였습니다. 대학 1년생인 김 모군은 어머니가 13개의 생명보험사에 총액 3억 2천여만원의 보험에 가입했고 수령자가 자신과 누나로 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2살 때부터 절친했던 조 모군과 범행을 공모한 것입니다.
두 살 때부터 이어진 우정이지만 이들의 친구 관계의 말로는 서로의 발목을 잡고만 원수 관계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친구란 여러분 무엇일까요? 친한 사이 그것이 친구일까요? 나이가 비슷한 또래를 친구라 할까요? 사전은 그렇게 정의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그늘 밑에 있다가 맨 먼저 눈을 뜨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친구관계를 역어 주기도합니다.
저희 도서관 사역에 하나도 바로 친구 역어 주기인 “ 품앗이” 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부터 3살 자녀를 둔 부모들 7,8명이 아이들과 함께 먹고 공부하고 놀아주며 사회성을 길러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친구는 대부분 함께 시간을 보내며 놀이를 통해 역어 진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국어 사전의 정의처럼 또래들의 관계, 친하게 지내는 사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친구일까요 ?
여러분은 몇 명의 친구가 있습니까 ? 얼마나 많은 친구들과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계십니까 ?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친구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귀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이제 철이 들 나이가 되었는데도 학문 연마에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일삼으며 허송세월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날도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놀다가 들어온 아들을 방으로 불러 세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 아들아 너에게 친구들이 소중하지 ? 그런데 왜 소중하지 ? ” 그랬더니 아들은 자랑스럽게 대답합니다.
“ 제 친구들은 제가 힘들 때 위로를 주고 무료할 때 기쁨을 주고 무엇보다도 제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믿어 줄 것예요. 이런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큰 힘이예요. 그래서 친구들은 소중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창자를 다 긁어내고는 송장을 싸듯 마포에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갑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절친한 친구 집 앞에서 아들은 담장 밖에 세워두고 아버지는 집 안으로 들어가 아들 친구에게 말하기를
“ 내 아들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는데 이 시체 좀 감춰주겠나 ? ” 그러자 그렇게 친하다는 친구는
“ 아이쿠 큰 일 날 소리하지마세요. 빨리 나가세요 나는 그런 친구 모릅니다. ” 하며 거절을 합니다.
그 많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 광경을 풀죽은 모습으로 지켜 본 아들에게 아버지는 송장을 가장한 돼지를 짊어주고는 자신의 친구 집에 보냅니다.
아들은 “ 저는 아무개의 아들 되는 사람인데요. 아버지가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서 이 송장 좀 감춰달라고 왔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소리를 낮추라고 하며 주위를 살피며 대문을 열고는 빨리 들어오라고 하더니 그 송장을 받아 방안 벽장 속에 넣고는 도배를 합니다. 벽장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에게 도리어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또 여기서 나가는 것을 아무도 봐서는 안 되니까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신신 당부까지 합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 너에게 과연 친구가 있더냐 ? ” 아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는 송장을 맡아 둔 친구의 집으로 갑니다.
누가 혹시라도 올까 마음 졸이고 있던 친구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가 이 부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사람아 빨리 들어오게 ” 하며 급히 친구를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그 친구에게 “ 고맙고 미안하네 실은 내 아들놈이 그저 밤낮 없이 친구들과 놀기만 하는데 이놈들은 친구가 뭔지도 모르면서 친구, 친구 하지 뭔가. 그래서 내가 친구가 뭔지 알려주길 위해서 자넬 시험했네. 용서하게나”
그러자 그 친구는 “ 아니 그러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 그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니 미리 말하면 진짜 친구가 가려지는가 ? ” 그리고는 벽장 속에 있던 돼지를 꺼내서 잔치를 베풀었답니다.
이제 친구가 무엇인 줄 아시겠습니까 ? 친구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내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길동무도 있고 말동무도 있고 술친구도 있지만 그런 것은 친구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친구 관계는 책임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깊은 것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 형제간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형제관계 여기에는 말로 표현 못할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사제관계 , 군신 관계 ,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 이 또한 천근 만근의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무게를 모르니 인생의 관계 속에서 책임은 없고 배신과 증오와 살인이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모와 자식은 있는데 부모의 책임감 있는 헌신이 모자라고 공양을 다하는 자식의 효도도 없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은 많은데 귀감 되는 스승은 별로 없고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진정한 제자도 없습니다.
결혼은 하는데 무게 있고 깊이 있는 사랑이 없으니 3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말 많은 정치인은 많은데 책임지는 충신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의리도 없고 신실함도 없는 것이지요. 너무나 쉽게 말하고 너무도 가볍게 행동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가벼워요? 그 가벼움이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존재의 가벼움 그것은 인생의 불행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부모가 자식에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머리 위에 손 올리고 하트 모양 그린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천근만근의 책임이 있는 말이지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그것이 인간을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 노래, 선물은 넘쳐 나는데 정말 우리의 내면은 사랑이 그립고 정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깊고 무게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 하나님이 만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92: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13: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시119:89)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만이 천근만근의 무게가 있고 그 천길 만 길의 깊이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 것 그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하나 살리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못박으셨습니다.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개념으로 아는 것에는 감동도 없고 힘도 없고 무게도 없고 깊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 깊이 나의 중심 가득히 그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그 사람은 인생이 뒤집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무게에 압도당해야 모든 갈등 , 모든 고민이 해결 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그럽니다. 이 말에 의미가 무엇입니까 ?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벗하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해서 한번도 친구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하나님만이 주권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주권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를 책임지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잠언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아들아 ” 부르십니다. 그 말씀을 대할 때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아야 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염려와 걱정이라는 것은 아들이 별의 별 짓을 다해도,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친구의 죄를 감추어주듯이 바로 자식의 죄는 이미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 내 아들아 ” 이 말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 내 아들아 ” 이 물음에는 아버지의 목숨을 아들을 향하여 다 내어 던지겠다는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 내 아들아 ” 하고 부르면 그 아들은 대답을 할 것이고, 그 때 아버지는 그 대답의 값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입니다. 법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조건없는 것입니다. 조건없이 무조건 생명까지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응답하지 않으면 책임이 없습니다.
책임지겠다고 “친구야 ” 부르는 그 분에게 대답하여야 할 의무 그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아 친구야’ 하고 부를 때는 당신의 책임을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지요.
그 때 대답을 해야만 하나님의 책임이 비로소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대답을 안 합니다. 부르면 겁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아’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아담이 숨었거든요.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아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매주 하나님은 이 목사를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책임지겠다고 부르십니다. 죄를 감추어 주겠다 부르십니다.
믿음으로 대답하라고 믿음으로 응답하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응답을 하지 않고 계속 숨습니다.
진정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22장 말씀의 설명이요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그 분의 지시는 너무도 놀랍고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 그것도 100세에 얻은 아들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는 억지였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죽일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아들까지도 죽일 수 있는 참된 순종이 있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시험에 대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어느 정도 믿었냐하면 히브리서 11장 19절 말씀을 보면 내가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은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부활을 믿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번 주신 자식은 죽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끝까지 축복하신다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은 행함이라고 하는 순종이 없이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억지같고 황당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벗이다.’ 그렇게 인정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십니다.
어느 정도 축복하시냐면 히브리서 6:14절을 보면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대답 그것은 순종이었고 그것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 되게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500원 짜리 마이쭈 같은 조그마한 군것질 거리 쥐어주면 움켜쥐고는 놓지 않으려 합니다.
손에서 빼앗으려 하면 울면서도 놓지를 않습니다. 왜냐면 아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것으로만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서 70년 , 80 년 사는 목숨이 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물 큰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신 명예나 지식도 큰 것이 아닙니다. 진짜 크고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생명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내가 책임지고 붙들어 주고 도와주겠다고 하나님은 믿음의 손을 펴라 하는데 우리는 안피는 겁니다. 손을 펴지 못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마이쭈가 더 소중해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 친구들이 더 좋습니다. 돈이 친구고 술이 친구고 인터넷이 친구고 텔레비전이 친구고 쾌락이 친구입니다.
내 인생 마지막 날 나를 향해 싸늘하게 등을 돌릴 것하고만 친구를 삼아 쓰레기 같이 시간을 보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강권적으로 불러 주실 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빼앗길까봐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친하게 지내십니까?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잖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는 벗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불러 주고 계십니까 ?
하나님이 주일날만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예요. 예배 때만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예요.
내 가정에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화낼 때도 부르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앞 길 막막할 때 여러분이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먼저 부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등지고 쾌락에 눈이 멀어 있는 그 시간 바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들아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빨리 듣고 믿음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친근해 져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다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 강압적으로 나를 부르신다면 아마도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친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숨지 마시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벗이 될 만한 믿음의 순종자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어려서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 저희 집 처마 밑 대들보에는 항상 제비집이 있었습니다.
항상 봄이 되면 강남 같던 제비가 돌아와서 새끼 낳고 한철을 보내다가 찬바람 날 때쯤이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듬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것을 보고 자라면서 제비에 대한 궁금증이 두 가지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제비 아닌 다른 모든 새들은 둥지를 나무 위나 벼랑 끝에 짓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이나 아니면 숲속 깊은 곳에 집을 짓습니다. 사람 손 닿는데 두면 다 잡아 먹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길조라고 하는 까치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장 높은 미류 나무 꼭대기에 짓습니다.
그런데 제비만은 사람 사는 집 안에 가장 잘 보이는 대들보에 짓습니다. 흙과 똥으로 마루를 더럽히기 까지 합니다.
미친 것 같에요. 나 잡아 먹으라는 것 하고 뭐가 달라요. 어떻게 대들보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 그게 궁금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제비가 알을 낳잖아요. 나중에 새끼들이 부화하면 서나 마리가 입을 쫙쫙 벌리고 있으면 어미가 계속해서 먹이를 물어다 입에 넣어 줍니다. 제비 새끼 주둥이 벌린 것 봤습니까 ? 얼굴 보다 입이 더커요 ?
저는 그 입 벌린 모습을 보면 탐욕 덩어리요 지옥의 문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어미가 그 큰 주둥이를 쫙 벌리면 얼굴은 안보이고 입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미 제비는 정확하게 배고픈 놈들을 알아보고 먹이를 넣어 주는 겁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오면 모든 놈들이 입을 쫙벌리는데, 얼굴도 안보이는데 어떻게 안먹은 놈과 먹은 놈을 알아보는지 궁금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이 안됩니다. 선생님께 물어봐요. 묻지 마세요 괜히 물으면 맞기만 합니다. 이런 것 대답 못하는 겁니다.
오직 신앙으로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신앙 안에서는 다 알게 되었습니다.
새들은 사람 가까이에 가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다 알아요. 그래서 멀리 도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제비만은 사람을 믿는 거예요. 모든 새들이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면 죽는다 해도 사람을 믿는 겁니다.
사람에게 가면 살길이 있고 오히려 사람에게 가면 구렁이에게서 새끼들을 보호 할 수 있다고 믿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흥부가 제비 다리 고쳐주고 복을 받은 것 아닙니까 ? 사람을 믿는 믿음 그것이 제비의 믿음인 것입니다.
완전히 사람에게 맡기니까 사람이 제비를 건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겁니다.
마루에다 똥을 싸도 사람들이 다 치워주고 제비집이 조금 부서지면 진흙으로 고쳐주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보리쌀도 주고 새끼 입에다가 지렁이도 잡아주면서 오히려 사랑해 주는 겁니다.
사람이 보금자리를 어디에 틀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집 처마 밑에 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밑에 집을 두고 사는 자 그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도 물리쳐 주시고 성전에서 떨어지는 은혜의 부스러기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면 십일조도 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됩니다. 믿음 없으면 이런 것은 물질도 빼앗기고 시간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식만 교회 보내는 부모님이 “적당히 믿으라” 그러는 거고 남편들도 아내들에게 미치지는 말라 그러는 겁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앙 생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진짜 신앙 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적당히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딴 주머니 차고 계산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겁니다. 이게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들어와 복을 받는 것을 마귀가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겁니다. 결국에는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다 새어 나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해서 결국 다 빼앗아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 내 영혼을 맡겼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띄고 생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여러분 어느 분야든지 성공한 사람들이 그 분야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요 ?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불광불급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습니다.
에디슨이 발명에 미쳤고 베토벤이 귀가 멀 쩡도로 음악에 미쳤고 윤석화가 연기에 미치니까 성공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미치지 않고 어떻게 구원을 받고 어떻게 생명을 얻고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인간의 제일 되는 계명은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 하라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미치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기에 미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적당히 하라고 하는 것은 다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마귀가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명교 장로님이 젊어서 자식 4명 데리고 샛방 살며 고생할 때 항상 교회 주변에만 집을 구했다고 합니다.
출근할 때 교회 가서 기도하고 퇴근 할 때 먼저 교회 와서 기도하고 집에 들어왔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
지금 이명교 장로님이 굶고 있나요? 집이 없나요 ? 하나님께서 책임주셨잖아요. 그래서 존경받고 있잖아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성전 밑에 우리의 보금자리가 들어갈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비의 어미가 배고픈 새끼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능력도 신앙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배고픈 놈의 입이 더 크게 벌려 지는 겁니다. 먼저 먹이를 먹은 놈의 입은 덜 벌어지는 겁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 입이 그 입 같지만 먹이를 먹은 놈과 굶은 놈의 입은 크기가 분명이 다릅니다.
이것은 과학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어려서 배고팠던 분들 있을 겁니다.
형제들이 똑같이 배고픈데 부모가 형에게만 밥 주어봐요. 그러면 여러분 입이 석자나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향해서 배가 고픈 사람 입을 크게 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잖아요 . 내 입을 크게 열라 네가 채우리라 . 성도라고 다 똑같은 성도가 아니예요.
배고픈 성도가 더 기도하게 되어 있고 배고픈 성도가 더 부르짖게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왜 채워지지 않습니까 ? 입을 닫고 있습니다.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그러잖아요.
간절해야 받습니다. 살려달라고 얼굴이 안보일정도로 울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데 안 주실 수 없습니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 다잖아요. 우리는 받을 권리가 있단 말이예요. 책임지시겠다고 기도하라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무가 있기에 우리는 받을 권리로 하나님께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야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는 겁니다. 언제까지 눈치만 보고 미적댈 것입니까?
이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을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 할 수 있습니까 ? 길어야 6,70년입니다.
친구 관계 몇 년 갑니까 ? 길어야 7,80년입니다. 여러분에게 돈 벌어다주는 직장 길어야 35년입니다.
여러분의 몸 뚱아리 몇 년이나 갑니까 ? 100 년도 안 되 흙으로 부서지고 맙니다.
여러분의 부부관계 금술 아무리 좋아도 그 또한 길어야 80 년입니다.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무얼 믿을 수 있어요? 어디에 나를 맡길 수 있습니까 ?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게 무엇입니까 ?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그 중요한 영혼을 여러분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70,80년 사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여러분은 이 교회에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사는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이 볼 수 없는 힘이 있고 긴장이 있고 싸움이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채찍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채찍을 은혜로 받아 들이십시오. 이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천근만근 무거운 관계, 천길 만길 깊은 진실한 신앙의 관계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진실한 친구하자고 이 목사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이상 멀리 피하지 마십시오. 달아나지 마십시오. 잘못하다간 죽습니다. 제비처럼 성전을 향해 더 가까이 오십시오.
살기가 고통스럽습니까 ? 앞이 막막합니까 ? 모자라십니까 ? 더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지게 하십시오
결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빗나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 시간 여러분을 친구로 부르고 계십니다.
아들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름에 순종으로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책임이 여러분 삶속에 나타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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