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철저한 타자성을 의식했다. 분명한 경계를 두고 저 편에 서 있는 대상, 모든 것은 분명하게 선을 그은 대상을 의식하고 바라보면서 시작된다. 그 말은, 내 자아 역시 분명한 경계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관계는 서로의 분명한 정체성에서 시작된다.
사랑과 관계가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았다. 관계란 상대의 견고한 정체성 안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나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지라도, 깊은 공감과 연결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그렇다. 몸 안의 화학적 반응에 의한 격렬한 감정의 분사가 아닌 관계로서의 사랑은, 경계를 깨뜨리고 들어가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사랑과 관계의 그런 격렬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풍성함과 모든 편리함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의 깊이는 점점 옅여진다. 피상적 수준의 이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와 너를 규정하는 정체성은 깊이를 만들지 못하고, 그로 인해 경계는 희미해진다. 자본은 우리를 이미 그러한 상태를 만들었고, 이제 우리는 자본에 의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태가 되었다. 경쟁과 쟁취의 레이스에서 성공을 위한 자기채찍질.. 옅어지고 희미해진 상태에서 자본이 제시하는 긍정성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이 지친 상태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결국 사랑과 관계의 본연, 즉 격렬함에서 나타나는 고통의 긍정성을 망각하게 했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벼운 유흥이나 즐거운 감정의 흐름만으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사랑은 그렇게 자주 이해되곤 하지만, 결국 어설픈 자기정체성을 깨달은 채 아프기만 한 상처를 남기고 끝나버린다. 또는, 자본의 흐름 안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나 인식없이 육체의 유흥게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사랑을 모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관계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착취하고 세상에 노출시키는 것을 사랑과 관계의 방식으로 오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한병철을 읽을 때마다 자기정체성과 타자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 분명함은 피로사회에서 말했던 면역성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때로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느낌도 든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무언가를 서서히 망각해가고 있고, 점점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오인하며 살아가는 우리 앞에 제시된 ‘또 다른 세상’이라는 테제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단순히 좀 더 공평하고 나은 세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에의 회복을 통해 관계와 사랑의 깊고 치열함을 다시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근원이다.
읽는 내내 철저한 타자성을 의식했다. 분명한 경계를 두고 저 편에 서 있는 대상, 모든 것은 분명하게 선을 그은 대상을 의식하고 바라보면서 시작된다. 그 말은, 내 자아 역시 분명한 경계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관계는 서로의 분명한 정체성에서 시작된다.
사랑과 관계가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았다. 관계란 상대의 견고한 정체성 안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나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지라도, 깊은 공감과 연결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그렇다. 몸 안의 화학적 반응에 의한 격렬한 감정의 분사가 아닌 관계로서의 사랑은, 경계를 깨뜨리고 들어가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사랑과 관계의 그런 격렬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풍성함과 모든 편리함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의 깊이는 점점 옅여진다. 피상적 수준의 이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와 너를 규정하는 정체성은 깊이를 만들지 못하고, 그로 인해 경계는 희미해진다. 자본은 우리를 이미 그러한 상태를 만들었고, 이제 우리는 자본에 의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태가 되었다. 경쟁과 쟁취의 레이스에서 성공을 위한 자기채찍질.. 옅어지고 희미해진 상태에서 자본이 제시하는 긍정성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이 지친 상태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결국 사랑과 관계의 본연, 즉 격렬함에서 나타나는 고통의 긍정성을 망각하게 했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벼운 유흥이나 즐거운 감정의 흐름만으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사랑은 그렇게 자주 이해되곤 하지만, 결국 어설픈 자기정체성을 깨달은 채 아프기만 한 상처를 남기고 끝나버린다. 또는, 자본의 흐름 안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나 인식없이 육체의 유흥게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사랑을 모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관계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착취하고 세상에 노출시키는 것을 사랑과 관계의 방식으로 오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한병철을 읽을 때마다 자기정체성과 타자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 분명함은 피로사회에서 말했던 면역성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때로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느낌도 든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무언가를 서서히 망각해가고 있고, 점점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오인하며 살아가는 우리 앞에 제시된 ‘또 다른 세상’이라는 테제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단순히 좀 더 공평하고 나은 세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에의 회복을 통해 관계와 사랑의 깊고 치열함을 다시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