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8.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20)
요한복음 5장 1~18절
원조 오지라퍼
■ ‘오지랖’이라는 말을 아시죠?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것을 두고 오지랖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는 분 계신가요? 혹시 자신이 생각해도 오지랖이 넓은 것 같으신가요? 이런 분을 요즘 말로 ‘오지라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원조 오지라퍼가 계십니다. 누구실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원조 오지라퍼이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오지라퍼이십니다. 왜냐고요?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유대인들에게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드리고 명절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명절을 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분위기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베데스다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다섯 개의 베란다가 있는 멋진 연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늘 많은 환자들, 특히 당시 의학으로 불치병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그 다섯 개의 베란다에 누워 연못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4절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베데스다는 늘 환자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던 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예수님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거기 병자들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을 외면 못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특기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특별한 오지랖이시죠.
이런 예수님이 베데스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번에는 거기서 38년 된 병자를 보신 것입니다. 6~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역시 그냥 지나치실 분이 아니시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셔야겠다고 마음을 잡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은 통과의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오지라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통과의례라고 해도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니 형식적인 질문일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낫고 싶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면, 억지로 낫게 하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물론 주님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님의 뜻을 펼치시고, 우리를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소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소원은 하나님 나라의 지상 성취입니다. 그러나 늘 이렇게 주님의 뜻대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고 가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주님의 의지를 지연시키거나 잠정 폐지 상태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밀려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주님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면서도 우리의 의지에 의해 모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 사람은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낫고 싶다는 대답인데 그 대답의 내용이 참 처절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가는 도중에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를 쏟아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약자 중의 약자, 약자 중의 소외자, 약자 중에 아싸였습니다. 누구도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고,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비통한 삶입니까? 그런데 이 비통함에도 그는 여전히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번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지만, 아무리 애써도 먼저 들어가는 것은 기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매번 오가면서도 그는 또 기다림을 택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Pick up your mat and walk!)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이제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회는 더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엇일까요? 9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사람은 한 것이 무엇인가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동시에 나은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리고 나은 것입니다. 또한 움직이는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야 병이 낫는 곳에서, 이 사람은 못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병이 나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오지랖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역사’라고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를 지나치지 못하시는 예수님의 오지랖이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오지랖입니다. 혹시 9절 끝부분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눈여겨보셨습니까? “이 날은 안식일이니”(The day on which this happened was a Sabbath.) 요한복음의 저자는 매우 의도적으로 이 사람이 병에서 나아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설명하자마자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를 주목시킨 것입니다.
왜 이랬을까요? 예수님의 관심, 예수님의 오지랖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에 희망을 주는 것에 있지, 다른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직설(直說)하신 것입니다. 이 직설의 클라이맥스는 17절입니다. 안식일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이 오지라퍼이신 이유는 바로 현재의 규칙, 주변의 상황에 맞춰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일이라면, 예수님께 절대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현재의 규칙도, 주변의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중헌디?’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지랖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당부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오지랖을 만났는지 알게 됩니다. 무엇인가요? 우리가 죄 가운데서, 부족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의의 상태가 아닌 죄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오지랖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대가 없이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라는 선물이 아니면, 그 어떤 희망도 영원히 절망일 뿐입니다. 또한 절망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은혜라는 선물 때문입니다.
물론 부족하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하고, 죄지음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우리는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 속에서 예수님의 오지랖이 발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그냥 그대로 지나치시고, 하늘 높은 보좌에서 영광을 누리시면 될 것을 그 거룩하신 오지랖 때문에 인간이 되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대속의 죽음을 겪으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그 거룩한 오지랖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나눈 말씀 잘 이해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희망을 접으시겠습니까, 절망을 접으시겠습니까? 기회를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다림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날 구원하신 예수님의 오지랖은 희망을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오실 것입니다.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