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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10월 경북교육삼락 문화 탐방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팀 장 남 무 열 드림
◈ 10월 문화 힐링 탐방 행사 일정 : 2018. 10. 19(금)
☞ 출발장소 : (07:40 범어동 어린이대공원, 07:50 대구은행 본점 건너편, 08:00 반월당 동아백화점)
2018년 10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 힐링 탐방
- 합천 허굴산 자락에 위치한 천불 천탑 -
“조용한 수행터 찾던중 우연히 산 중앙서 관세음 마애석불 발견”
경남 합천 허굴산 자락에 위치한 천불천 탑, 용탑 스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탑을 홀 로 쌓고 있다. 스님은 이곳과 인연 맺기 전 에는 선방 및 토굴수행을 하면서 산하를 대 지 삼아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제 는 한곳에서 정착하여 혼자서 조용하게 수 행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착할 곳을 찾 던 중 합천 허굴산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산을 구입하고 가꾸기 시작했다.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던 중 우 연히 산 중앙에 자연마애석불 관세음보살 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법당 삼아 홀로 기도를 하며 정진 수행 하였 다. 또한 허굴산을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길을 내던 중 우연하게 커다란 바위를 발견 하게 되었다. 용의 머리를 닮아 이름도 용 바위로 짓는 등 도량과 연관되는 일들이 하 나씩 나타나게 되었다. 스님은 당시 상황을“ 마애석불부처님께 서 오른쪽으로 편안하게 앉으셔서 용바위 를 보시고 계십니다. 마애석불관세음보살 님은 원래 허굴산에 수행처로 삼았을때부 터 계셨어요. 마애석불 밑에 있는 용바위도 처음부터 있었고 형상이 용이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계시는 형상입니다. 소승도 처 음 보았을 때도 신기하였습니다.”라고 말 한다. 또한 자주 기도하러 오시는 한 보살 님은“ 용바위 우측에 관세음보살님이 자연 마애불로 나타나심으로 증명됩니다. 자연 마애불은 사람의 손길로 조성된 것이 아니 라 자연 그대로 관세음보살님의 불력으로 조성 된 것입니다. 정말 희유하지 않습니 까” 하면서 허굴산의 신비에 대하여 감탄 하였다. 또한 남쪽에서 본 허굴산(허불산) 정상은 부처님께서 누워계시는 와불 형상 을 하고 있다.
소재지 경남 합천군 가회면 월계리 산 88
- 합천 영암사 쌍사자 석등 -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준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陜川 靈岩寺址 雙獅子 石燈)은 남북국 시대 9세기 신라의 석등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5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1984년에 절터 일부의 발굴조사를 통해, 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과 서금당(西金堂), 회랑(回廊)과 부속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의 절에는 탑, 석등, 금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었고, 금당의 동서에 각각 1기의 비석이 있었던 것과, 금당이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2]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치는 각종의 기와와 함께, 8세기경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출토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고 있다.[2]
영암사라는 이름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정확한 기록에서 확인된 것은 아니어서, 절의 정확한 이름과 내력은 알 수 없다. 소재지 055-932-9681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 637-136
- 숲길 따라 합천 황계폭포 -
가슴이 뻥 뚫릴만한 시원한 물줄기와 폭포소리. 한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 폭포와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험준한 암벽. 황계폭포는 ‘수(水)려한 합천’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자 한여름의 더위를 잊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구장산 계류, 황강의 가장 상류부에 위치한 이곳은 폭포를 비롯 어우러진 계곡이 절경으로, 옛 선비들이 중국의 ‘여산폭포’에 비유하기도 한 명소이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입구에서부터 들리던 폭포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곧 황계폭포가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 20m, 폭 6m의 2단 폭포인 황계폭포는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한 몸체에서 시원한 폭포수를 내리고 있다. 폭포의 밑소는 그 깊이가 명주실 한꾸리가 다 들어가도 닿지 않을 만큼 깊다하여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합천의 대학자 ‘남명 조식’이 지은 ‘달아맨 듯 한 줄기 물 은하수처럼 쏟아지는구나’ 등의 시가 전해진다. 영화 ‘도리화가’에서의 명장면이 연출된 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폭포와 주변 경관 조망은 물론 녹음이 짙은 산속에서 시원한 폭포수를 맞으며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걸어도 보고, 한적한 그늘과 정자에 잠시 앉아 바위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 산을 울리는 폭포소리를 즐기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일석삼조의 여유로운 한때. 황계폭포에서는 가을의 정취의 망중한을 즐겨볼 수 있다. 소재지 경남 합천군 용주면 황계2길 30
- 낙동강 물길 따라 창녕 고찰 관룡사 -
* 신라시대 8대 사찰, 관룡사 *
관룡사는 화왕산 군립공원 구룡산 병풍바위 아래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을 이루었다.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1749년(영조 25)에 보수하였다.
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찰로서 〈사기 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 영운이 재건했다.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이 유실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대웅전과 다른 당우들을 재건했다. 1749년 다시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대웅전
보물 제212호.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 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에 의지해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관룡사석불좌상
보물 제519호. 상높이 110cm. 삼단의 8각연화대좌 위에 앉은 좌상으로 광배는 전하지 않는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편안히 내려놓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놓여 있는데 무엇인가를 받쳐든 듯한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얼굴과 몸에 부드러운 양감표현이 두드러지며 옷주름의 표현도 유연하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이목구비가 얼굴 가운데에 몰려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전기의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목에는 굵은 2줄의 선이 있으며, 목이 밭아 전체적으로 약간 위축된 느낌을 준다. 법의는 통견으로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가 보인다.
8각연화대좌가 불상에 비해 폭이 좁아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단순한 형태의 연꽃이 저부조로 묘사되어 생략적인 의장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조각양식상 고려초 불상들과의 연관도 보이지만 실제 수인의 표현이 불분명하다든가 또는 생략적인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약사전
보물 제146호. 앞면 1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주심포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이 건물의 특색은 집채와 지붕의 구성비례에 있는데, 기둥 사이의 간격에 비해 지붕의 폭이 약 2배나 된다. 이러한 예는 거의 없으며 곧고 단정한 외목도리들이 뻗어 나오면서 큰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당초무늬가 새겨진 창방의 뺄목이 소로를 받아 외목도리의 행공첨차를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의 구성은 15세기 건축기법에서 보이는 것이므로 15세기경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천장은 연등이고 바닥은 맨바닥으로 민무늬의 네모난 전을 깔았다. 단칸 법당 안에는 석조불좌상이 있으며 좌우 벽체에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약사전 앞마당에는 큼직한 대좌 위에 3층석탑이 있다.
관룡사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95호. 상높이 188cm, 대좌높이 136cm.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으로 광배는 없어졌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좌상과 달리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상이다.
관룡사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나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가 있으며 양감이 적당히 표현된 각이 진 얼굴은 단정한 인상을 준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썹과 눈, 오똑한 코의 표현 등에서 신라불상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불신은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어깨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가 경직되게 표현되어 석굴암 본존상에서 보이던 당당함이 많이 감소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평행한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조성시기가 다소 내려감을 알 수 있다.
대좌는 3단으로 반구형의 상대에는 연꽃잎 안에 꽃무늬[花紋]가 있는 중판 연꽃무늬가 앙련으로 새겨져 있다. 중대는 8각이고, 하대는 4각형의 받침 위에 복련의 중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후반 대좌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9세기로 추정된다.
- 창녕 안옥정 공원 -
작지만 볼거리가 풍성한 공원, 만옥정공원
창녕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공원이다. 면적 1만㎡의 작은 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의 벚꽃 장관으로 유명하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名唱)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다.
공원 뒤쪽 언덕 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가 있는데, 561년(진흥왕 2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인 창녕객사(경남유형문화재 제231호),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퇴천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제 10호), 창녕척화비(경남문화재자료 제218호) 등의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창녕 만옥정공원 제일 안쪽에 자리잡은 국보 제33호로 지정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점령하고 이지역을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적혀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 문화 경제에 대한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진흥황순수비라고 불렸던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신라 진흥왕 시절 화왕산 자락에 세워졌다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다가 일제강점기 화왕산으로 소풍을 갔던 학생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화왕산에서 발견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1914년 2월 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가 학계에 보고하였고 일제강점기에 편의에 의해 1924년 현재의 자리인 만옥정으로 옮겨졌다
비사벌가야를 정벌하고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자연암석에 글자간격 4㎝ 해서체로 27행으로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진흥왕 22년인 신사년 2월에 세워졌다는 기록과 사적 그리고 진흥왕을 수행했던 사람들의 속부 인명 직관 직위가 표기되어 있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 단양적성, 창녕 화왕산 등 다섯군에 세워진것이 전해지는데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진흥왕이 가야를 정벌하고 세워서 순수비중에서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만옥정공원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가 자리잡고 있는 왼편에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었던 창녕지구 전승비인 UN전적비가 세워져 있어서 천년의 시공을 지나 창녕이 역사의 한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알게 해준다. 만옥정 공원 입구쪽에는 창녕관아의 부속건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나 외국 사신들이 묵는 숙소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231호로 지정된 창녕객사와 유형문화제 제10호로 지정된 퇴천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 창녕 석리 아름다운 한옥 성씨 고가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55호, 1929년에 지어진 이 집은 창녕지역에 처음으로 양파를 보급한 성씨 문중의 주택으로서 안채 사랑채 곳간채 2동 대문채 변소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은 한옥의 전통적 요소, 부농주택의 실용적 요소와 더불어 근대기 외래 건축의 영향이 절충되어 있는 근대 한옥이다. 전통한옥에 비해 기둥과 도리, 들보가 가늘게 된 반면 장식요소가 풍부하며 벽장 반침 등 수장 공간이 많이 구비되어 있다. 안마당의 곳간채는 부농주택의 영향이며 안채와 사랑채의 유리문, 실내 화장실,서양식 도어, 철제 까치발, 장마루로 된 응접실 등은 외래 주거문화의 영향과 함께 건축주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성씨 고가는 남부지방 근대한옥의 발전과정에 있어 독특한 구조기법과 입면구성, 세부장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 이다.
아무리 근대한옥이지만 내가 그동안 둘러본 한옥 중에 제일 아름답고 규모가 큰 한옥이다.
* 근대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는 곳, 창녕 석리 성씨고가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있는 성씨의 오래된 가옥입니다.
성씨 고가는 대지 내에 안채, 사랑채, 창고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총 6동의 건물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앞에 사랑채와 중문채를 두고, 안마당 좌우에 토담집 구조의 곳간 2동을 배치했습니다.
이 건물의 안채와 사랑채는 공히 일제강점기 중반(1929년)에 건축 또는 이건하여 해온 것으로, 가구수법과 공간구성, 입면형식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 가옥의 구조와 배치에 대하여 *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집입니다.
창건 후 계속적으로 배면의 쪽간을 확장하여 內室化하여 평면상으로 겹집을 연상하게 합니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안방 1칸, 대청 2칸, 건너방 1칸, 마루와 화장실(1칸)이 연접된 형태입니다.
건축양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로 수장한 장혀수장집입니다.
상부가구는 5량가에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이며, 건축형식은 안채와 마친가지로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 가이며,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중문채는 사랑채 정면 우측에 연결되어 건축되어 있어 평면상으로 마치한 건물처럼 보이긴 하나, 입면상으로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누마루와 중문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입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입니다.
평면은 좌측부터 대문칸 1칸, 문간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장대석 외별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운 형태로, 건축형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장혀 수장집입니다.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가 이며,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 지붕입니다.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동1길 11
- 대한민국 양파 시배지의 유래 -
양파는 1908년 원예모범장에서 시험재배되었다는 문헌기록이 있다. 이듬해인 1909년, 이곳 대지면 석리 아석가에서 우석 성재경 선생의 조부 성찬영선생께서 처음으로 양파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채종을 하기도 안 성재경선생이 한국전쟁 직후, 농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보리 대신 환금작물로 양파를 재배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또한 1963년 김성수, 하재호, 성재경 선생등이 창립한 경화회가 양파 재배를 확대하는 일에 주축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에는 6천여 농가에서 재배하여 그 면적이 1천여 핵타르로 급격하게 늘어나 창녕이 전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양파 주산지가 되었다.
첫댓글 임흥준 교장선생님께서 작성하신 문화탐방 계획을 저가 올렸습니다.
선배님들 문화탐방에 많이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총장님
가을을 먹으러 떠나야지요

임교장님 계획 잘 읽고
보고
또
보러 갑니다요
안본곳도 있고요
덕분에
님들도 보고요
성씨고택은 주인장과 잘 알기에
집안에안 들여주면
전화통화하면 들려 줄꺼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