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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년 이른봄
봄눈이 녹기전에 잠실 모래 벌판에
상권이 이뤄 지지 않은 외진 주택에다. 상호를 대흥타이루와 유리 로 간판을 걸었다..
각구목는 헌것을 얻어다 못을 뽑고 구멍난 헌 양철판을 구해서 간판제작을 하였다. 힌색 검정 청색 삼색을 구입해서 내가 직접 글씨를 써 넣었다.
자본이 너무적어 쌤플 정도 진열 하고 . 초라하게 시작 하였다. 가게가 좁지만 허전해 빈상자를 수북히 쌓아 놓았다.
날씨가 눅눅하면 상자들이 한쪽으로 기웃둥 기울어진다. 처음엔 고객이 없어 현장에 가서 판촉을 햇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을지로 큰 가계 보다 조금 싸게 판매로 고객을 유치 하는 작전을 짯다.
을지로에서 구입해서 용달로 수송해서 자전거로 배달하고 얼마를 싸게 팔자니 마음이 편치 않은 거래다. 10%정도는 미찌는 장사다.
거기다 사채 비용 까지 더 하면 비용이 더 늘어난다.
적자 나는 장사지만 늘 감사하다 하고 거기다 외상으로 거래 하였다.
수송은 낡은 짐차 자전거로 혼자 배달 하였다.
그때 전화는 잠실 주택 한채 값이 여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남에 전화 를 연결해서 이용 하였다.
지성 [至誠] 이면감천 [感天] 이라고...
노력에 대가는 은근이 축적 되여 많은 고객울 유치 하게 되였다.
그때쯤 일차 유류파동 부동산 경기 붐을 타고 건자재 값이 폭동해서 최고에 호황을 누렸다. 그때는 대부분 수입 이 없어 국내 생산량이 너무 부족해 달리는데 자본이 많은 자본가는 매점 [買占] 매석 [賣惜] 하는경우가 많아 우리같은 영세 상인은 고통이 더해갔다.건자재 라면 모두가 보통 100%이상인상 되였다.
자본은 전부 사채며 계조직으로 나는 자금을 구하기 위해 늘 남보다 높은 이자를 써넣어 계를 낙찰하여 충당 하였다.
부동산 거래는 무법 천지 이엿다. 어떤이는 처음 판집을 다섯번 남에게 넘어 갔다 다시 자기가 판 집을 구입 하고서도 큰 이익을 남기는 비 현실적인 사례도 많았었다. 등기는 하지않고 문서로만 거래 되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세상 이였으니까...
그래서 그때 졸부증후군(SWS)이 많이 생겨났다. 이런 저런일로 사업이 번창 해와 하기 좋은 말로 권혁진이 잠실돈 다 긁는 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1986년
이럴쯤 422 8310 422 5993 (청색) 422 0015 (백색)전화 3대도 구입하고 봉고화물차1 덤브 트럭도 승용차도 구입하고 운전기사 2명 경리 1 도우미 2 직원이 늘어 났다.
이제 빈상자 쌍아 놓을 것이 아니고 물동량이 많아 200여평 야적 창고에 물건을 가득 쌓아 놓았다.
11톤 대형 트럭에 4일간격으로 마산 창원 진영 부산에서 물건이 직송 되였다 그땐 모두 수작업으로 하차 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저녁때 까지 한 차를 내렸다.
타 업체 에서는 어음 아니면 외상 거래 였는데 나는 모두 현금으로 선불 이라 공장에서 우리 업체에 매력을 느께 늘 우대해 주었다.
이렇게되니 자동으로 도매업이 활성화 되여 물동량 物動量 이 늘어 났다. 격세지감 [隔世之感] 에 나 자신도 놀랐다.
전에는 사장이란 칭호가 쑥스러웠는데 이제 당당히 사장 위치에 부끄럽지 않았다.
우리 를 속한 30 여명이 상생하는 식구도 늘어 났고 그때 협력대표는 이남기 김용호 이동원 정방욱 오명선 등 아래 조역자들이 수십명 있었다.
건설 경기 호황이라 나는 새벽 4시부터 건재자를 날랐다.
아침 출근 시간이면 전화 3 대 벨이 연속으로 울려와 감당키 어려웠다. 우리집 사람 과 경리는 전화 받고 나는 물량 조절 리스트를 짜 총 지휘 했다.
매일 온식구가 팡팡 튀 기는 전쟁 일터다.
여세를 몰아 대 확장 하여 타일 위생기 세멘트 모래 자갈 PVC 철관 등 종합건재로 도 ,소매 를 겸하고 시공업 까지 손을 댔다. 그로 3년후에는 잠실벌에 금산타일 남부타일 유성타일 등등 30여개이상으로 동 업종이 늘어 났다.
신생 타일가계는 모두 나를 겨냥한 경쟁으로 돌입했다.
나는 자신했다.
늘 감사 한것은 우리 고객은 몇 을 빼고는 타 업체에 유혹에 절대 넘어 가지 않아 안정 되였지만 저가 가격과 써비스 접대로 우리 업체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열번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 없다고들 하지만...
이제것 쌓아놓은 고객관리 비상이다.
궁리끝에 우수고객 집중 접대 관리에 들어갔다.
대포집에도 가고 스텐드빠도 방석집도 캬바라도 ... 고객은 왕이니까 왕이 원하는 대로라면 100% 따라 모셧다. 낮에는 바쁜일정에 저녁엔 고객 접대에 밤을 넘기는 때도 많았다.
접대 끝을보았다.
그땐 음주단속이 없는때라 내 승용차로 고객을 이동 접대 하고 집에 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했다. 술잔을 나눈 고객은 당장 편하고 이무러워 지고 식사만 나눈 고객은 10년이돼도 속내는 알수없어서 조심스레 대하게 된다. 나는 늦게 배운 술이지만 그때 접대용 술을 배워 긴 술자리가 습관 되였나 보다.
비오는 날이면 고객이 주욱 몰려와 접대를 원하는 진풍경이 시작 되였다.
에그
스텐드빠 네온에 분위기이도 좋더만
점점 단수가 높아저 카바레를 가기를 원하는 고객이 많아 졌다.
살아 남기 위해선 남보다 뒤지면 안되지...
그들은 조명불빛 아래 아련이 어떤대는 흥겹게 어떤때는 정열 情熱 적인 음악이 무드에 젖어 황홀경에 그들은 취해 있었다.
그들은 춤추고 나는 춤맹이라 처져 주석( 酒席 )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괜한 자존심 [自尊心] 에 자리를 피해 애꿎은 화장실만 드나들다 그들이 앉을때 합석 하려 하니
어색함이 있어 그걸 배울가 유혹이 자주간다.
우리 친구 이상돈 (목재상운영) 이남기 등 믿을만한 일급 동지를 구해 용기내여 엄두를 냈다.천호동 시장 지하바 에 선생을 지인 을 통해 소개받고 접수하고
오후 4시부터 6시 까지로 교습시간을 정했다.
남은일은 집사람 한데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뭐라 말할가 ? 고민 되였다.
셋중 누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땐 운전면허 소지자가 드물었는데 ... 운전교습소 다닌다고 하고 그러면 되지않겟어?
집에가 그리 했더니 무리없이 승락하여 4시 정시만 되면 아내가 학원 가기를 챙겨 주었는데 속으론 미안함에 마음은 편치 못햇다.
어찌보면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요건 이긴 한데...
에그
내가 사업이라 하면고 어느곳에 빠지지는 않는건지 우려 [憂慮] 반 걱정도 되었다. 사업 성공을 위해 격을 높이는 것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지르박 [←jitterbug] 4/4박자 트로트 [trot] 엔카 가요 왈츠 [waltz] 3박자 블루스 [blues] 두박자 또는 네박자
이런 춤들을 10일 안에 선을 보았다.
선생이 리드 하는대로 하니까 자신이 생긴다..
우리 셋이 큰맘 먹고 천호동 강동카바레를 찿았다. 전에는 테불 에서나 잠시 앉다만 일이지만 이번은 전과 다르다 실전 하는날 이니까...
왜 이리 내가 작아지는 것일가? 초조와 긴장에 연속 이여 내마음을 감당키 어려웠다. 자신이 전혀 서질 안는다.
대형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굉음이 귀를 찟는듯 조명은 사람들에 옷에 비추어 황홀경에
본연에 일을 해야 하는데 전혀 자신이 서질 안는다.
외이터 들은 연실 찿아와 파트너를 안내 하겠다는거야...
뒤문으로 슬며시 도망 갈가도 잠시 궁리가 들기도했다.
우리셋은 서로 미루기만 하고 눈치만 보며 뒤를 뺀다.
에그
용기내여 미쩌야 본전이다 라며 내가 먼저 용기내여 자원했다.
외이터에게 주문은
허름하고 못생긴 파트너를 구해달라고 하고...
그래야 내가 퇴자 맞아도 조금 편할것 같아서. 드디어 결전에 시간이 ... 굉음에 미끄러운 후로링 바닥은 미끄러워 손을 올리려 는데 발과 손이 영키여 혼란하다. 두말할것 없이 내손에 잡힌 그 여인이 손을 홱 뿌리 치면서 나를 호데게 나무란다. 이런 춤으로 어딜와요 라고.......
그에손은 굳은살이 박인 일 많이 하는 손 같다. 모처럼 기분 전환 하러 왔다가 재수 없게시리 나같은 무지랭이 한데 당했구먼...
미안함이 꽉차 올라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돈 이남기 그들도 시작 했지만 별수없이 나같은 처지가 되여 돌아 왔다.
셋은 패잔병 처럼 풀들이 죽어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원래 남자가 리드 할려면 잘 하는 사람도 3개월 이상 교습 이고 몇달을 실습이 따라야 하는거라든데 ...
거기 더 있기가 민망해 술도 남겨 두고 계산만 하고 오다가 대포집에서 한대포 하고 쓸쓸히 셋이 헤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혼자 웃는다.
그날부터 자극 [刺戟] 이 되여 더 열심히 시도 때도 없이 열심히 연습 했다.
춤맹 탈출이 제일 과제 [課題]가 되였다.
우선 박자 익히기를 위해 S O N Y 카셛트 를 거금 [巨金] 에 구입해 시간만 나면 틀고 스텝 [step] 을 밟앗다. 버스를 타도 음악이 나오면 거기서도 앉는채로 발이 자동으로 스텝 [step] 자세로 쿵 자자 짝짝 쿵자 작 짝짝 거기 자동으로 빠저 들었다.
어느날 사무실 에서 카섣트 틀어 놓고 발을 맞추고 잇는데 집사람 한데 들킨거야 모르고 연습 하는데 갑자기 나타나 ...
당신 뭐하는거야.
나는 깜작 놀랐다.
아플사!!
뭐라 변명을 해야하나 한참동안 멍해저 생각이 전무 하다
에그
별거 아냐 했지만 변명은 통하지 않을것 같아 즉시 이실직고 [以實直告] 했다.
어찌 보면은 미안해서 자진 신고는 할수 없었는데 전화위복 [轉禍爲福] 으로 잘 된것 같다.
그후 우리 세남자들 긴급회의 하여 모두 자수하고 광명 찿기로 하고 날잡아 영동에 크라운카바레 에 세쌍부부가 구경갔다. 그 세계를 보여주고 다음 수순을 밟아야지...
아내들 한데 맥주도 여러잔 들게 유도하고 모두 기분좋게 취하고 있을 즈음 부루스가 간장을녹이듯 아련한 무드로 흘러 나와 부부끼리 짝지어 앞으로 갔다 밀고갔다 떙겨왔다 옆프로갔다 하면서 그냥 기분 좋았다.
그리고 나오면서 우리 세집 부부 독선생 불러 배웁시다 했더니 쉽게 승락하여
쇠뿔도 당정에 빼라고 지인인 윤여사 한데 전화해 선생을 구해 다음날 부터 집에서 합동으로 터놓고 그걸 배우게 되였다.
그땐 웬일인지 온통 가는곳 마다 아는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한때 유행 인가보다.
1950년대 사교춤 으로 불륜과 패망이 많았다는데...
그후 90년대 와서 보편화 되고 노인들은 건강 유지 차원 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겼다.
그로 불상사는 전혀 없었으며 접대 사교에 많은 도움이 되여 후회하지 않는다.
어쩜 이성 만남으로 예의와 즐거움이 라고 믿고 싶다.
나에 내성적인 성품이 개방되고 원활한 활동으로 대인 관계가 잘 이뤄지고 유지된다 믿고 싶다.
살사 스포츠댄스 막춤 밸리땐스 어지러이 춤도 많은데 그냥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건전한 스포츠로 모두 좋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에 사업체는 안정 되여 나에동생 권혁중 에게 그리고 그간 수심년간 나를도와 공을 세운 강성회 에게 저렴하게 두사람에게 사업을 넘겨 대성 하여 보기 좋다.
상호리에 와서는 1997~1998년 이장 업무를 보면서 우리나라 최초 농촌관광 발상지 로 자리 매김하여 선구적인 일에 권혁진 위상을 높였다.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추억을 들추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언제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 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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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회장님이 춤의 세계까지 정복하신지는 몰랐는데요... 대단 하셔요~^^ 항상 건강하셔요~~
남자가 해볼건 다해 봤다고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아름다위 살다가기를 희망함니다. 부끄러운일도 있지만 진솔하게 적어봄니다. 과거를 얘기 하려 하니...
생로병사의비밀보다 아름다운 삶의 비밀를 경험과 연륜으로 전해주는 글이 넘 아름답습니다
가난 했지만 전적은 화려하고 꿈을 이루고 즐기며 살아온 지난날 이 대견함니다. 사랑 군샐활얘기 사업 모임 모두 얘기거리가 무진함니다. 진솔히 적어 책을 만들고싶슴니다. 늘 관심주시는 여러분이 고맙구요.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