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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오늘날의 풍기(豊基)라는 지명이 있기까지
신라 때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라고 했다. 현종 9년(1018)에 길주(지금의 안동)에 예속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어 안동부에 소속된 현(縣)이 되었고 공양왕 때(1390) 은풍(殷豊)이 합쳐졌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했고, 문종의 태(胎)를 은풍(殷豊) 명봉산에 간직하고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基川)의 기(基)자를 따서 풍기라고 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풍기라는 이름은 사실상 이때 처음 생긴 것이다.
그 후, 세조3년(1458)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순흥부가 폐부(廢府)되면서 대부분 풍기에 예속되었다가, 숙종 9년(1683)에 순흥부가 회복되면서 그 땅은 다시 순흥부에 귀속된다. 고종32년(1895), 8도를 23관찰부로 개편함에 따라 풍기군은 안동관찰부에 예속되고, 이듬해에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비로소 경상북도 풍기군이 된다.
주세붕 선정비(周世鵬善政碑)
풍기읍사무소에는 주세붕 선정비 외에도 많은 비가 있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7개, 선정비(善政碑) 3개, 청덕비(淸德碑) 1개, 백비(白碑) 1개, 거사비(去思碑) 1개, 풍기읍 승격 기념비 1개 등>
그러나 주세붕이라고 하면 소수서원에 그 영정이 모셔져 있는 만큼 우리들에게 훨씬 친근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중종36년(1541)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1542)에 고려말의 학자인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그 다음해(1543)에는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서 백운동서원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다. 그는 청백리(靑白吏)로 일생을 보냈으며 조야(朝野)에 신망이 높았다.
군수주공선정비(郡守周公善政碑)는 公諱, 世鵬, 字景遊, 辛丑, 出守歲連大飢 …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축에 군수로 부임하자 연 2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는데 생명의 구함이 많았음으로 행정 실적이 가장 뛰어났다 하여 벼슬을 올려 받았고, 을사년 겨울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공은 천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학행이 순수하고 익숙하여 정치를 함에 노인을 공경하고 착한 일을 존대하며 가르침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하고 용서를 미루어 은혜를 베풀고 이(利)를 앞세우는 폐습을 개혁하니 군민들이 애경하며 추앙하여 지성에 감동해서 변화됨으로 백성들이 효제(孝悌)를 흥기(興起)하여 풍속이 순후(醇厚)해 졌으며 향교를 이건(移建)하고 문성공 사당을 세워서 교(敎)를 진흥시킨 공이 매우 많았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개국 이래로 군수로 온 사람이 이런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이는 지금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어 있다.
창락 주막
성급한 분들을 위해 미리 말해 둔다. 창락 주막이 지금은 없다. 경상도 동북 지역 여러 고을에서 서울로 통하는 이 길은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오르는 선비들, 공무를 띤 관원들, 부임, 귀성, 퇴임 길의 여러 고을 수령들, 해륙의 온갖 물화를 유통하는 장사꾼들, 그리고 숱하게 넘나들던 이름 모를 나그네들의 발길이 사시장철 줄을 잇던 대로(大路)였기에 굽이굽이에 길손들이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던 술집, 떡집, 짚신가게며 먹고 자고 하는 객점과 마방이 늘려있던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데가 지금 희방사역이 있는 마을 어귀에 자리잡은 '무쇠다리주막거리' 였고, 그 버금이 '고갯마루주막거리' 와 여기 '느티정주막거리'였다. 창락 주막은 바로 이것들을 말한다.
옛날에 죽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이를 죽령 옛길이라고 한다. 이 길의 시작은 풍기소방서 옆 골목길에서부터이다. 풍기읍성의 서쪽 성벽이 지금 경찰지서 서편 역전 통로 자리여서 그 서쪽 단양통로 골목을 '서문거리'라고 했다. 옛길은 이 서문거리에서 지금의 5번 국도로 뻗다가 지금의 소방서 조금 못미처 약간 남으로 틀면서 금계동에서 내려오는 냇물을 건너게 되는데 여기에 유(兪)다리가 있었다.
희방사 창건설화도 감은설화의 한 유형이다. 목에 가시가 걸려 다 죽어가던 호랑이가 자신을 살려준 두운 스님에게 시집 갈 날을 받아둔 처녀를 물어다주는데, 그 처녀는 서라벌 호장(戶長) 유석(兪碩)의 딸이었다. 유호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딸을 집까지 데려다 준 두운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희방사 건립은 물론이고, 무쇠다리(水鐵橋)와 유(兪)다리까지 설치해 주었다.
현재 화강석을 길게 잇대어 걸쳐놓은 이 유다리의 잔해가 아쉬운 대로 아직도 다리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문거리를 벗어나면 작은 길과 갈렸던 지난날의 큰길을 만날 수 있다. 남원천을 건너면 길 왼편에 그 유명한 죽령바람이 돌자갈을 날린다는 자갈모룽이다. 여기가 죽령옛길의 첫 주막거리였던 '자갈모래주막거리'이다.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지나 풍기교를 건너면 소백산 옥녀봉 자연휴양림이 4.7㎞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 팻말을 지나면 두산교가 나오는데, 이 두산천 양옆에 있는 작은 마을을 '지경터'라고 부른다. 두산천 냇물을 경계로 동쪽은 풍기, 서쪽은 순흥 땅이었다는 기록이 옛 '순흥지'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지경터인 것이다.
여기서 1㎞ 쯤 가면 등항성(登降城)이라고 전하는 마산(馬山)이 나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해 가던 때에 이 구릉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견훤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과수원으로 들어차 있는 이 일대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큰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우거졌기 때문에 대낮에도 어두웠다고 하는데, 여기를 '느티정(槐亭)주막거리' 라고 했다. 한편 '숫거리주막' 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옛날에 '숲'을 수(藪)라고 했고 그것이 경음화되어 '숫(쑤)거리' 가 된 것이라고 한다.
봉현 서부초등학교를 지나서 가다보면 무쇠다리를 1㎞ 쯤 남겨두고 원행교가 있다. 여기에도 1930년대 초반까지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주막도 두어 집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허허벌판이다. 원행교 동편 논 건너에 자리한 창락 마을은 옛 순흥도호부의 관역인 창락면의 중심지로 영남 11개 찰방역의 하나인 창락역이 있던 곳이다. 종6품 벼슬자리인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고 하는데 찰방은 관내의 소속된 역을 통괄했다. 순흥, 풍기, 영천, 세 고을을 통틀어 찰방역은 창락역 한 군데 뿐이었다고 하며, 이 창락역은 인근의 9개 역을 관할했다고 한다.
이 마을 큰길 옆에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광복 후에 모두 없어지고, 창락리 158번지 김진호 씨가 사과저장고 건축공사 중에 출토된 석물들을 영주시에서 창락리 160번지 창락초등학교 뜰 서편에 옮겨 세웠다.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던 창락역의 찰방이었던 안 모 씨의 선정비는 현종8년(1667)에 건립된 것인데, 이 '찰방 안공 선정비(察訪安公善政碑)'는 우람한 주춧돌에 거북머리 모양이 새겨져 있다.
수철동 무쇠다리
용바위 식당을 지나면 무쇠다리가 나온다. 희방사 역이 있는 이 마을은 원래 순흥부 창락면 수철촌이었는데 1914년 에 풍기 수철동으로 바뀌었다. 철도가 통과하면서 희방사 역이 마을 중앙을 차고 앉아 그 부지를 산처럼 높여 놓았기 때문에 마을 규모는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고, 그 모양도 볼폼이 없어져 버렸지만, 그전에는 마을 어귀에 고목 느티나무가 늘어서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원래는 큰길 좌우로 숙박업소, 음식점, 마방(馬房), 짚신 미투리 파는 가게 등이 있어서 죽령 옛길에서 가장 큰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하던 무쇠다리 주막거리도 지금은 그 터마저 희미해졌고, 동구의 고목들도 사라졌으며 다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새겨놓은 암벽의 각자(刻字)와 비석 두 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무쇠다리'로 불려왔다. 마을에 무쇠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희방사 계곡의 물과 죽령 쪽의 물이 바로 이 마을 윗편에서 합치는데 다리가 없으면 통행이 어렵게 되어있다. 영조 때 엮어진 옛 순흥지에 '옛날에는 무쇠를 부어 만든 다리였으나, 지금은 '판자다리'라고 했다. 무쇠다리의 후신은 통나무를 길게 걸쳐놓고 흙을 덮어놓은 둑다리였다
죽령오솔길
1999년 5월, 영주시에서는 소백산 철쭉제에 맞추어 희방사를 기점으로 죽령 옛길과 연화봉 직등(直登)길을 복원했다. 희방사 역 부지에 묻혀 잠시 끊어졌던 옛길의 자취는 무쇠다리 마을을 지나 죽령 기슭 산자락에 접어들면서 철도 터널 입구 오른편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 깊은 골짜기의 밭이 농로로 남아있다. 여기서부터 고갯길에 들게 된다. 중앙고속도로 공사 현장 사무실 및 인부들의 숙소와 식당으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의 길을 영주시가 복원해놓은 것이다. 과수원을 지나서 시냇물을 왼편에 끼고 산모퉁이를 돌아 오르면 길이 나무들의 터널을 이루어 햇볕이 내려 쪼이던 평지의 길과는 달리 시원한 길이 운치 있게 펼쳐진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갑자기 골짜기가 제법 넓게 열리는 곳이 나오는데 여기가 '느티쟁이(槐亭)주막거리'이다. 이미 없어진 지 오래지만 여기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여기에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두어 집 주막이 있었고, 6.25 뒤에도 서너 집 농가가 있었단다. 1969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화전민을 정리하면서 불을 지르면서 심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낙엽송 군락이 보인다.
느티쟁이에서 냇물을 끼고 돌길을 따라 오르며 두어 굽이 모퉁이를 돌면 양편 산언덕이 차츰 멀찍이로 물러서면서 골짜기가 훨씬 시원히 트인다. 이곳이 '고갯마루주막거리'이다. 고갯마루 턱밑에 주점이 꽤 넓은 영역을 차지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완만했던 경사가 주막터를 지나면서 갑자기 가팔라진다. 바로 오르기가 워낙 힘이 드니까 경사를 줄이기 위해 5번 국도는 이리저리 꼬부라지고 꺾이고 또 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죽령주막 앞 주차장으로 오르게 된다.
죽령주막
백두산을 출발하여 남으로 뻗은 중심 능선이 낭림과 태백산맥으로 내려와, 한 줄기가 소백을 거쳐 동으로 뻗어 비로봉(1,439m)을 비롯해서, 국망봉(1,420m), 연화봉(1,349m), 도솔봉(1,313m) 그 사이 소백산 줄기 죽령(竹嶺) 고개가 영남과 호서로 갈라놓았다.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소백산맥 허리, 죽령고개는 해발 689m로 문경의 새재(鳥嶺),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영남에서 서울로 나들이하는 삼대관문 중의 하나이다. 죽령은 새재보다 47m 더 높고, 추풍령보다 454m나 더 높다.
죽령은 동북으로는 강원도, 서북은 충청도, 남은 경북으로 삼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소백산의 허리이다. 이미 디젤기관차가 터널을 넘나들고 있으며 곧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바야흐로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가 완전히 사라져 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고개는 옛 조상들의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무수한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아흔아홉 구비마다 남긴 길손들의 한숨과 웃음, 영남의 선비가 청운의 꿈을 안고 넘었다가 과거에 낙방한 뒤 쓰라린 가슴을 안고 돌아오던 느린 걸음이 곳곳에 스며있다.
'죽령'이라는 글자 그대로라면 이곳에는 대나무가 많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대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아달왕 5년(158년)에 신라 사람 죽죽(竹竹)이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죽죽이 개설한 길이라 해서 죽령이라고 불렀다는 설을 믿는다면 이해가 간다. '흥주지'에 보면 그가 길을 닦다가 순사했기 때문에 고개 서편에 죽죽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고갯마루 절벽 밑에 있던 백룡사라는 암자도 6.25 직전 무쇠다리 뒤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 다른 풀이는 지리학과 생물학적으로 보아 죽령이 우리나라 대나무 자생의 북방한계선이라는 점을 보면, 옛날에는 이 죽령 계곡 일대에도 대나무 숲이 무성했을 것이므로 죽령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된다. 이 퇴계 선생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도 죽계천에 왕대가 무성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혀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대나무가 없어진 지는 무척 오래된 이야기인가 보다. 조선시대 월천 조목 선생이 죽령을 넘으면서 "장림에 숲이 자라지 않고 죽령도 대나무가 없는 고개인데, 실지로 없는 것들을 인간이 어찌하여 장림과 죽령이라 하였던고(長林無長林 竹嶺無竹嶺 大抵不存 人間幾林嶺)"라고 읊은 시를 보면 말이다.
용부원(龍夫院) 마을과 보국사지(輔國寺址)
보국사지는 문화유적총람에 죽령 중턱에서 연화봉으로 오르는 산기슭에 위치(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2리 산41번지)하는 절터(寺址)로 소개되어 있다. 죽령 마루턱에서 용부원리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가 우측산 기슭 약 200평 가량의 터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보국사지이다. 보국사는 신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고 영토를 확장할 때 치도위민(治道爲民)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설이 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주둔시켰던 최전방의 군사와 문물, 행정을 총괄하기 위하여 세웠던 사찰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 권2에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보면 술종공이 죽지랑이라는 거사를 위하여 돌미륵을 모셔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장육불입상(丈六佛立像)은 장대한 원각석불(圓刻石佛)인데 지금 남아있는 신라의 불상 가운데 최대의 석불로서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의 미륵불(彌勒佛)과 연결하여 볼 때, 보국사가 당시에는 교통과 관계되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연화문(蓮花紋), 대좌(對坐), 죽절문간석(竹節紋竿石)토막, 연화문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柱礎石), 기와조각(瓦片) 등을 볼 수 있다.
장육불상이 쓰러져 있는 일대는 잡초가 우거져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축대 일부도 남아있으나 그 주변이 경작지로 사용되어 훼손된 곳이 많다. 석불의 조각 수법이나 기와 조각의 문양, 또는 축대의 구조 상태로 보아 대체로 9세기경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장육불상은 몸체, 좌대, 지대석 등 3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몸 전체가 네 부분으로 파손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일으켜 세워 놓았다.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의 길이는 400㎝이고 머리(佛頭)까지 합하면 550㎝(16.6尺)정도로서 죽령 이북에는 유일한 장육불상이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펼친 여원인(輿願印), 왼손은 착의수인(着衣手印)하였다.
죽령폭포
죽령휴게소를 지나 5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단양을 17㎞쯤 남겨둔 지점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죽령폭포가 나온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똬리굴(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용부원리 쪽 죽령터널 입구 부근에 제2단양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이 곳은 청정계곡이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소백산에서 발원된 벽계수(碧溪水)가 죽령계곡을 휘감고 돌아 아홉 척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죽령폭포는 마치 은빛의 실로 수를 놓은 듯한 신비경을 자아낸다.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름없이 어딘가에 아름다운 제 모습을 숨기고 있는 이런 폭포를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보람이요, 묘미라 할 것이다. 죽령산신당에서는 지금도 그 옛날 도둑 잡던 다자구할머니의 "다자구야 들자구야" 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죽령산신 다자구할머니 설화
죽령산신의 도움으로 도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설화이다. 신이담(神異譚) 중 초인담(超人譚)에 속하며, '알고 모르기' 중 '알만해서 알기'로 분류할 수도 있다. 죽령산신당이 있는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마을에서 구전(口傳)되고 있다. 신라 때인가 죽령에 도적이 많아 행인이 다닐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이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나서서, 자기가 적굴에 가서 도적들이 잠이 들지 않았으면 '더자구야'라하고, 잠이 들었으면 '다자구야'라고 할테니, '다자구야'라는 소리가 들리면 쳐들어오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적굴에 들어가서 "더자구야, 더자구야" 하고 외치고 다녔다. 도적의 두목이 이상하게 여겨 잡아다 물어보니, 자기 아들들을 찾느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적 두목은 이 말을 의심하지 않아 할머니는 적굴에 머물 수가 있었다.
어느 날 도적들은 두목의 생일을 축하하느라 큰 잔치를 벌이다 취한 나머지 모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자구야"라고 소리쳤고, 그 말을 들은 관군은 일제히 습격하여 도적들을 모두 잡았다. 그런 다음 할머니를 찾았지만 할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 할머니가 죽령산신임을 깨닫고, 죽령산신을 '다자구야'라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대강주막
소백산 기슭에 위치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장림리는 바로 죽령 어귀에 위치한 마을로, 옛부터 나그네들이 높고 험준한 죽령을 넘기 전에 하룻밤을 쉬면서 짚신을 고쳐 신고 말을 갈아 타던 마방(馬房)이 있었다. 여기에 객고(客苦)를 달래주던 주막거리가 번창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 가면 '소백산 술도가'라는 양조장이 있다. 7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술도가이니 그 내력이 평범하지 않으며, 술맛이 또한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특히 이곳의 술은 지난 1994년 한국문화재단이 주최한 전통주류품평회에 충북 지방 대표로 초대되어 우수 민속주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 명인(名人)의 자취
유서깊은 이 고갯길에는 역사에 우뚝한 많은 명인들의 발자욱이 새겨져 있다. 삼국 시대 이래의 사신들,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 남정(南征)길의 고려 태조 왕건, 안향, 정몽주, 정도전, 옛 임금을 복위코자 목숨을 바친 금성대군, 왜적 박살에 몸바친 의병 대장 유인석(柳麟錫), 이강연(李康秊) 등…, 여기 두어 분의 자취만을 들기로 한다.
①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낙향(落鄕)길의 이현보(李賢輔)를 마중 나가다
중종 (中宗) 37년(서기 1542년) 7월 풍기 군수 주세붕이 나귀에 술을 싣고 죽령에 와서, 예안(안동의 禮安)으로 귀향(歸鄕)하는 선배 이현보(호 聲巖)를 마중했다.
명현(名賢) 이현보는 연달아 사직(辭職)을 간절히 원했으나 임금의 극진한 만류(挽留)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73세 되는 이 해에 드디어 병을 핑계로 말미를 얻어 은퇴 낙향하는 길이었다.
높은 학식과 행덕(行德)으로 사림(士林)의 우러름을 모은 이들은 30여 년 선후배였으나 뜻을 같이하는 자별한 사이로, 여기 고갯길에서 배반(盃盤)의 자리를 베풀어 회포를 나누었으니, 다음은 그 두 분이 읊은 시(詩)이다.
草草行裝白首郞(초초행장백수랑) 秋風匹馬嶺途長(추풍필마령도장) 莫言林下稀相見(막언림하희상견) 落葉歸根自是裳(낙엽귀근자족상)
초라한 행장에 흰 머리카락 휘날리는 사내가 가을 바람 부는데 한 필의 말로 멀리 고개를 넘어 수풀 아래에서 서로가 드물게 만난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우리 인간들이 낙엽과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스스로 늘 그러한 것이니라. -이현보(李賢輔)-
飄飄歸興 漁郞(표표귀흥진어랑) 直沂驪江玉帶長(직기려강옥대장) 今日竹領回首意(금일죽령회수의) 乾坤萬古是綱常(건곤만고시강상)
깃발을 나부끼면서 흥겨운 마음으로 돌아온 사내는 여강을 거슬러 긴 옥대를 찬 채 줏대 있게 똑바로 온 것이오. 오늘날 죽령으로 머리를 되돌린 것은 하늘과 땅(공간), 그리고 옛날과 지금(古今)에서(시간) 늘 이렇게 변함 없는 진리일 뿐이오. -주세붕(周世鵬)-
② 잔운대(棧雲臺). 촉령대(矗 臺)
명종 3∼4년(서기 1548∼1549년) 풍기 군수 이황(李滉, 호는 退溪)이 그 중형(仲兄) 해(瀣, 호는 溫溪)를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이다. 퇴계의 형 온계는 그 무렵 충청감사(忠淸監司)로 있으면서, 말미를 얻어 고향 마을 예안(禮安)에 다니는 길엔 매양 퇴계가 주효(酒肴)를 마련하여 여기 죽령에서 마중하고 배웅했다고 한다.
퇴계는 이 고갯길 경치 좋은 한 굽이를 다듬어 형제의 우애를 즐길 자리로 동-서 두 대(臺)를 쌓았으니, 동쪽을 잔운대(棧雲臺), 서쪽을 촉령대(矗 臺)라 했다. 잔운(棧雲)이라 함은 저 성종(成宗) 조의 학자(學者)이자 명신(名臣)인 유호인(兪好仁)의 시(詩) "竹領行百盤棧道浮雲 (죽령행백반잔도부운변: 서리서리 죽령길 굽이굽이 돌아 오르니, 가파른 사다릿길 구름에 닿네)" 에서 취함이요, 촉령(矗 )이라 함은 같은 때의 학자 김종직(金棕直)의 시(詩) "운근촉촉수냉냉(雲根矗矗水冷冷: 구름은 삐죽삐죽 물소리 시원)"에서 취한 것이다. 여기서 읊은 퇴계 형제의 시(詩)가 전한다.(지금 그 자리가 어느 굽이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추측되는 장소에 시비(詩碑)를 세웠을 뿐이다.)
오마이뉴스 2002.6.14 김우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