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제안과 안내로 시작된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샵'의 1주를 끝내고 2주차에 접어든 오늘, 워크샵을 안내하는 이 책에서 눈길이 머무는 부분을 옮겨 본다. 아직은 전반부에 불과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 아주 평범하고 식상한 멘토질이라고 치부해버렸음직한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문장의 표현 너머까지도 느껴진다. 지금 나는 어떤 벽 앞에 서 있다. 나는 이 벽을 알아차리고, 탐험해야만 한다. 문이 있다. 오래 열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는 오래된 창고의 문, 그 문을 막 열려고 한다.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고 쓸고, 조명을 넣고, 환기를 시키고, 버릴 것과 보존할 것을 골라서 닦고, 수선하고, 제 자리에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빈 자리도 마련해 두고 창도 내야 한다. 그리고 오래 앉아 묻고 들어야 한다. 그 때가 왔다.
퇴직 후, 한가해진 지난 6개월 동안...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이전부터 무언가가 내 속에서 죽어간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몇 년을 그저 버티고 견디다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어 스르르 트랙에서 내려 버렸다. 그 몇 년 동안 단 한 줄의 일기도 쓰지 못했다.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힘이 없었다. 지난 삶에서의 내 모든 배움과 경험과 성과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증발해 버린 것처럼, 아니 나는 큰 투명한 공에 갖혀 진공을 떠다니면서 내가 살아냈던 시간의 빛과 소리들과 차단된 것 같은 느낌...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마비가 진행되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더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의미도 상실했다. 푹 쉬고 놀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이완도 불가능했다. 마음에 품었던 기획들을 재빨리 속도감 있게 실행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다그치고 야단쳤다. 눈을 뜰 때면 여전히 먼 출근길 정체되는 도로 위에서 지각할까 동동거리는 초조감과 가장 먼저 대면하곤 했다.
지금은 되돌아보고 있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죽어간다는 걸 알아차린 그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렇게 시작된 여정이 어찌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번은 지나가야 할 길이다. 친구 덕에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수 있어서 끙~~~ 일어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울지말라, 화내지 말라, 이해하라 - 스피노자.
-그림자 아티스트에게 삶이란 잃어버린 목적과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가득 찬 불만스러운 경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영역에서 눈부신 창조성의 빛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그림자 아티스트가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드럽고 세심하게 내면의 아티스트 아이를 길러야 한다. 창조는 놀이다. 그러나 그림자 아티스트에게는 자신을 놀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부드럽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너무 높게 뛰어서는 안된다. 실수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고, 비틀거리는 것이 정상이다. 이런 것들은 아기의 걸음마와 같다. 자신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티스트로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형편없는 아티스트가 될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이 초보자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형편없는 아티스트가 됨으로써 진정한 아티스트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창조성 회복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여는 연습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의 마음을 문이 살짝 열린 방이라고 상상해보라. 문을 조금 더 여는 것은 마음을 조금 더 여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른 정신을 갖는 것이고, 바른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관심을 쏟는 것이다. 삶의 진실은 그 삶의 성공 여부와 상관 없다. 삶의 질은 기쁨을 맛보는 능력과 비례하고, 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작가 메이 사틴은 삶의 중심이었던 아름답고 오랜 연애가 덧없이 끝난 즈음에 <고독 일기>를 썼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연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텅 빈 집에 들어서서 "서재 문을 여는 순간 국화꽃의 눈부신 광채에 걸음을 멈췄다. 스포트라이트처럼 겹겹의 진분홍 꽃잎 속에서 노란색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가을빛을 수혈 받은 기분이었다."
메이 사틴이 수혈이란 말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 상처받았던 사틴은 국화꽃을 보고 감흥을 느끼고 관심을 기울이면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관심을 쏟으면 헤어진 연인, 아픈 아이, 깨진 꿈 등으로 인한 일상적인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치유된다. 릴케의 말을 빌리면 우리 모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다." 관심이란 무엇보다도 서로가 통하려는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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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에 관해 쓰다보니 고통에 대해 많이 언급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 관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동안,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과거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안전했다. 홀로 남겨진 매순간이 언제나 견딜 만했다.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괜찮다. 과거의 결혼은 끝났다. 내일 그 고양이는 죽을지 모른다. 연인의 전화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모든 것이 괜찮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매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시인 윌리엄 메러디스는 "그 사람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 가장 큰 욕이라고 했다.
- 어떤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핵심임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