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과 동토의 왕국, 사랑과 증오심
영화 ‘1984년’에 주인공 윈스톤 스미스(존 허트분)는 Big Brother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 제국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윈스톤은 사상범으로 몰려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세뇌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분명히 실패한다.” 고문하던 사람이 묻습니다. “왜 그렇지?” “당신이 이길 수 없는 어떤 정신, 인간의 정신이 있소.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오. 사랑은 증오보다 강합니다. 증오와 공포에는 생명력이 없어요.” 그는 공포의 힘을 믿는 이들을 가리켜 저급한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13일 오후 6시 북한의 2인자 였던 장성택 전 국방위 부위원장에 대한 사형 집행소식을 알렸습니다. 장성택은 처조카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동당 확대회의에서 끌려 나간 뒤 나흘 만에 국가전복 내란 음모죄를 적용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동토의 왕국입니다. 아무리 냉혹한 독재국가라고 한들 자신의 고모부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까요? 천주교의 정의평화위원회 이용훈 주교는 12월 9일 주보간지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공포정치를 그만 두고 대통령에서 물러나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김정은이 공포정치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용훈 주교에게 시범을 보인 것 같습니다. 이용훈 주교가 만약 북한과 같은 공포정치 하에서라면 감히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사랑보다 공포의 힘을 믿는 저급한 짐승 들입니다.
사랑의 힘을 믿기보다는 공포의 힘을 믿는 저급한 짐승들이 대한민국의 천주교회 내에도 존재합니다. 바로 공포정치를 펼치는 북한에 대하여는 찬양하고 민주정치를 펼치는 대한민국에 대하여 온갖 거짓으로 폄훼하는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현 정부가 공포정치를 펼친다고 하는데 자신의 고모부를 사형시킨 북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습니다.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면서 이들은 김일성에 대하여 ‘좀더 사시지 아쉽습니다.’ 고 말하는가 하면, ‘김일성주석의 영생을 빕니다’ 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안함 46용사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면서 북한 편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들이 바로 사랑의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보다 공포의 힘을 믿는 북한을 따르는 저급한 짐승의 무리들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야 할 강론대에서 거짓과 선동, 반도덕적이며 계급투쟁적인 증오의 감정을 신자들에게 쏟아 붓는 이들이야말로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처럼 증오가 사랑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는 빅 브라더의 하수인들입니다.
저는 이들의 정신상태(Mentality)를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한때 그랬었기 때문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은 저토록 가난한가? 왜 부자는 저토록 부자인가? 왜 가난한 사람은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고 부잣집 개는 사람도 못 먹는 갈비를 뜯는가? 만약 길을 삐끗하게 들었다면 운동권이 될 수도 있었던 멘탤리티(Mentality)를 제 자신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젊어서 사회주의 사상에 취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대학시절 데모 한 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저를 구원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성직자가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사랑보다 증오를 부추기고 화해보다는 갈등을 심어주며 평화보다는 분란을 조장한다면 그러한 종교는 이 땅위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자에 대하여 잘못된 증오심을 가지고 부자라고 하면 집에다 돈을 쌓아두고 남을 도울 줄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들은 제대에서 성체 성혈을 축성하는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로만 칼러를 벗어던지고 나서서 정치인의 길을 걷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한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양태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교회를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야만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미칩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하느님이 강생하셨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고 억지를 부리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강생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비주류 멘탤리티를 가졌던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올랐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을 신봉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비주류 멘탤리티의 화신인 정의구현사제단 (어떤 분들은 이들을 가리켜 ‘정의구현 사기단’이라고 칭합니다)이 골수 ‘친노’가 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친노와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신상태가 붕어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처럼 선거에 죽기살기로 개입하여 친노후보의 당선에 목을 매고 그 뜻이 좌절되자 정부의 온갖 정책에 어깃장을 놓고 그러다가 안 되니까 이제는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보고 내려오라고 발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편견이요 집착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지도 사실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고 하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거두어서 돌보고 있는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를 이들은 틈만 나면 흠집 내고 모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겉으로 내거는 명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 이들의 마음에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로막는 시기심과 증오심, 적개심만 가득합니다. 이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지금 어떤 평판을 받고 있는 지 잘 알고 있고 따라서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태에 분개한 신자들이 이들 성당에 가서 일인시위를 하면 이 성당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는 없다고 고함지르며 심지어는 신부가 폭력까지 행사하려고 듭니다. 이것이 어찌 로만 칼러를 쓰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신부가 할 수 있는 짓거리입니까? 자신들이 하는 일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맞는다고 생각하면 왜 떳떳이 사제단 명단을 공개하지 않습니까? 왜 그들의 종북 짓거리를 비난하는 일인 시위자를 그냥 두지 못합니까? 일인시위 형제를 환영하면서도 주임신부가 무서워 얼른 유인물 챙겨서 재빨리 호주머니나 핸드백안에 넣고 사라지면서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하십니다.’ 고 인사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이들 신부들은 미사 강론 중에 정치이야기하면서 절대 유인물 받지 말라고 하며 신자들이 받은 유인물도 도로 빼앗는 행동을 합니다. 고모부도 처형하면서 공포정치를 펼치는 김정은은 사랑의 대상이고 민주정부인 대한민국 정부는 타도의 대상입니까? 당신들의 양심이 올곧고 태양아래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다면 어찌하여 조용히 일인시위하는 애국교우를 핍박하고 협박합니까?
한경TV의 정규재 선생은 이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아주 사악한 무리들이요 쓰레기 잡범같은 인간들이라고 자신의 세상보기라는 프로에서 통렬히 비난하였습니다.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세속에서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던 그들은 차라리 애국이라는 높은 이상을 지녔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무리들은 한마디로 이들에게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쓰레기 잡범이라는 것이 정규재 선생의 일갈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할 말이 있다면 해보십시오! 성직자라고 한다면 자신의 옹졸한 마음의 벽을 타고 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1년 후 여의도 광장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놓고 ‘아직 시민혁명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칠 때 환호하던 어리석은 군중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유대인들, 아직도 자신의 옹졸한 비주류 멘탤리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친노 정치세력에게 환호하고 발광하는 정신적 미숙아인 사제들 이들 모두가 똑 같은 존재입니다. 왜 하느님의 사랑이 증오보다 강하다는 것을 로만 칼러를 걸친 언필칭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합니까?
이들은 밀양 송전탑, 쌍용차 사태 등에 개입하면서 소외된 사람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들이대지만 신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과 반정부 투쟁을 위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구분 못하는 바보는 우리 교회에 없습니다. 봉사와 희생을 통하여 낮은 곳으로 임하신 하느님을 본받고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한다면 이에 반대할 신자는 540만 평신도 가운데 단 한명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쥐뿔도 모르면서 4대강 사업, 해군기지, 송전탑 건설, 쌍용차 사태 등에 끼어들어 온갖 분탕질을 치면서 정부 사업을 어렵게 하고 경제를 어렵게 하고 나라를 어렵게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수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정치판의 극렬분자인 친노와 궤를 같이하면서 이판사판, 너죽고 나죽기식의 사회갈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한 때 비주류 멘탤리티를 가졌던 사람이었으며, 이러한 저를 구원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음은 고백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에 대한 질투심과 증오심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할 사제들이, 아니 평신도인 필자보다 백배, 천배 하느님의 평화와 화해에 헌신해야 할 하느님의 대리자 신부님들이 어찌하여 이처럼 신자들의 한숨과 탄식의 대상이 되었단 말입니까? 백번 생각하고 천번을 생각해도 필자는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스스로 가슴에 손대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속의 증오심을 신자들에게 내뱉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쓰레기 잡동사니를 신자들에게 내뱉고 있는가?
제 글이 읽기 불편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신부님께서 다음의 문제에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알고 계신다면 제 글에 대하여 조금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증오심보다 더 생명력이 있음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과 같이 하는 관상이 고독과 침묵 속에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길거리에 성체를 들고 나가서 분탕질 치는 속에서 가능하다고 믿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초등학생에서 80노인까지 입가진 사람은 한마디 씩 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사제가 입을 열지 않으면 사람들이 입도 벙긋할 수 없는 사회인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나라의 안보를 지키는 것인가? 평화의 섬 지키기 구호만 외치고 있으면 이 나라는 저절로 안전해지는가?
신부님, 영화 1984년에서 주인공이 했던 말을 다시 들려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증오보다 강합니다. 증오에는 어떠한 생명력도 없습니다.’ 증오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막고 형제들을 파멸시킵니다. 신부님!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 비주류 멘탤리티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승화시키시고 길거리에 나가서 분탕질 치는 짓거리를 멈추어주십시오.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날뛰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신자들의 온갖 비난을 초래하며 욕먹는 짓을 하면서 정의를 들먹이지 마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다고 나팔 불지 마십시오. 신자들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글이 ‘돼지 목걸이에 진주’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시겠다면 신부님께서는 애당초 길을 잘 못 드신 것입니다. 왜냐고요? 신부님은 처음부터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체 게바라처럼 혁명가의 길을 가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감동받았습니다..정구사 사제들도 꼭 읽어보기를 바래보네요..자주 글 올려주세요.
막달레나 자매님, 서투른 제 글에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시간날 때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