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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05 : 17 - 22
제목: 요셉이 팔린 이유는
일시: 2010. 10. 1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1961년에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날씨 예측에 어려움을 말하는 나비효과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그 보고서의 요지는 무수히 작은 변수들이 날씨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아마존의 나비가 날개 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 강력한 토네이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존 정글의 나비 한마리의 날개 짓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무엇이 원인인가? 권목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때 수많은 원인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지금 이 시간을 없을 수 있다. 제가 이곳 라이프찌히에 오게 된 것이 베를린의 장세균목사님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원래 내가 여기 올 자리가 아니었다. 원래 아버님을 초청했었는데 아버님이 시간이 없으신 것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어느 강의가 있었는데, 그것을 빼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논문 재료를 구하고자 한국에 나와 마침 한국에 있었던 것이 이유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내 논문을 그렇게 방향 잡아준 지도교수가 원인일 수 있다. 혹은 아버님이 아들 목사 유럽에 한 달간 다녀오지 라고 했을 때 마음에 에펠탑의 감동이 있었던 것이 문제일 수 있다. 과연 원인은 무엇인가?
II. 요셉이 추락한 이유는?
요셉의 인생은 초기 17세까지는 부모님의 온갖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 후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는데, 애굽의 총리가 되는 30세 전까지 13년 동안 크게 두 번의 추락이 있게 된다.
첫 번째 요셉의 추락은 형들이 그를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에게 몸값을 받고 팔았을 때이다. 요셉이 아비 야곱의 분부로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갔지만, 도단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던 형들은 멀리서 자기들에게 오는 요셉을 발견하고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고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창37:20). 하지만 형들 중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을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에게 몸값으로 은 20을 받고 팔아넘기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난의 인생이었다. 이 추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왜 그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요셉이 팔린 원인은 분석하면, 그가 형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자질해서 일 수 있다 (창37:2). 혹은 야곱이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기에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편애했기 때문일 수 있다(창37:3). 다른 자식들은 대충 입혔어도 요셉에게는 채색옷을 입혔다(창37:3). 이런 것들이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리는 이유가 되기는 했지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셉의 꿈 이야기였다. 미워하는 형님들에게 철없이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라고 한다 (창37:5). 두개의 꿈을 꾸는데 하나는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을 향하여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꿈꾸는 자라를 별명을 얻고 형들에게 완전 왕따를 당했다.
이렇게 요셉은 추락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그렇게 팔린 요셉은 다시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리워졌다. 비록 요셉은 몸값을 받고 사고 파는 종으로 전락했지만,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이 있어 보디발이 그를 집안의 모든 것을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이 있을 때 쯤 그는 그의 주인인 시위대장 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두 번째 추락이다. 그가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쾌락과 탐욕에 젖은 안주인이 동침을 요구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요셉이 안주인의 요구에 거절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깨끗한 성격 때문에 말이다. 혹은 요셉이 너무 잘생기고 몸배도 잘 빠졌기 때문일 수 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Now Joseph was handsome in form and appearance). 혹은 보디발이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추락의 원인을 분석하자면 모든 것들이 추락의 그룬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이 추락하는 진정한 이유가 되겠는가?
III. 눈앞에 보이는 것을 원인으로 삼지 말라.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원인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원인을 보아야 한다. 눈 앞에 보인다고 정확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이 파야 한다.
어릴 때 큰 아이와 둘째가 종종 싸우고 울기도 한다. 언제나 큰 소리 나는 것은 둘째로부터이다. 엄마 아빠에게 쫓아와서 “엄마 언니가 때려”라고 한다. 그때 뭐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큰 아이에게 왜 동생을 때리냐고 야단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언니 성격에 참고 참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동생을 한대 쥐어 박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둘째가 심술이 있어서 아침에 바쁜데 언니가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언제나 잽싸게 뛰어가서 먼저 확 들어가 문을 잠근다. 그러니 언니는 화가 나고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은 언니 없어 심심하다고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눈 앞에 보이고 드러난 것만으로 사물과 일을 판단하면 원인분석을 잘못한 것이다. 요셉이 팔린 이유는 무엇인가? 야곱의 편애, 요셉의 철없는 모습, 동생을 감싸지 못하는 형들의 옹졸한 생각, 그리고 동생을 죽일 생각까지 한 형제들의 여론일 수 있다. 요셉이 주인집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타협 없는 성실성, 보디발 아내의 탐욕, 보디발의 불신 등이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원인으로 삼고 판단 근거로 삼게 되면 실수와 오판을 하게 된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좀 잘된다고 흥분하거나 떠벌려서도 안 된다. 성급하게 교만해서도 안 된다. 나는 감기한번 안 걸리고 살았어라고 말하면 바로 다음날 기침하고 난리난다. 역으로 일이 좀 안되고 꼬이는 것처럼 보여도 성급하게 좌절하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드라마를 쓰시는 분이시다.
목회자들은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해서 교회성장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성장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에 적응시킬까 연구한다. 그래서 성장시킨 교회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특강도 갖는다. 강사들 가운데 자신들 교회의 프로그램을 말하는 강사도 있다. 제자반으로 성장했다. 알파코스로 성장했다. 이슬비전도로 성장했다. 꿀벌전도를 했다. 그러면 모든 교회들이 다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어떤 강사는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렇게 교회가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목회자가 한 두명인가? 모두 그렇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을 잘 해서? 그런 교회가 한 둘이냐? 지역사회를 연구하고 전도 전략과 교육이 좋아서? 목회자의 리더쉽이 좋아서? 맞을 수는 있지만, 그게 아니다.
요즘은 대입 수시 면접과 학력고사시험이 있는 시기이다. 우리 때 예비고사를 치르고 나면 전국수석이 나와서 꼭 아주 속상한 소리를 한다. “학교 수업시간에 듣는 교과목에 충실히 했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 그저 잠도 깨운하게 충분히 잤습니다”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는 수석하고 나는 못했다.
오래전 어버이의 날에 어느 방송사가 아주 연세 드신 90 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인터뷰를 한다. 할아버지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게 사셨어요? 장수의 비결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심하게 살살 살았지요. 누군 조심해서 잘 안 살았냐! 어떤 할머니는 말씀한다. 그냥 식사 제때하고 소식하니 이렇게 오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 그렇게 안하냐! 어떤 이는 늘 산에 오르고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누군 안하냐! 눈에 보이는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원인 삼으려고 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IV. 믿음의 사람은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요셉의 인생에 있어 두 번의 추락, 종으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과 보디발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것에는 인간적으로 원인분석을 할 수 있다. 물론 그도 추락할 때마다 절망하고 하나님께 항의했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 가운데서도 13년 동안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러기에 그는 원망하려다가도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일의 원인을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에 있음을 서서히 삶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할 길을 주셨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했을 때에도 장남 루우벤이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져 놓자고 제안하여 목숨을 건졌다. “우리가 그 생명을 상하지 말자”라는 루우벤의 말은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다가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욕이니라”고 제안했을 때 더욱 생명의 가능성은 늘어났다. 팔려간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형통케 하셨다. 비록 안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으나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꿈으로 시작한 요셉이 꿈으로 애굽의 바로에게 신임을 얻고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총리가 된 다음에 그는 자신의 돌아온 인생을 뒤돌아 보았을 것이다. 인생의 필림을 거꾸로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분명히 인생은 내리막길로 막 내려가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일이 되고 있다. 이렇게 애굽의 2인자가 되었는데 총리가 되기 위해 감옥에 갔어야 했지 않았는가! 감옥에 가기 위해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어야 하지 않았는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기 위해서는 보디발의 집으로 팔리어 가기를 잘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기 위해서는 형님들이 나를 그렇게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기를 잘 할 것이 아닌가!
만일 요셉이 눈앞에 보이는 이유와 원인만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면 총리가 된 다음에 손을 봐줄 사람이 몇 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자신을 억울하게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를 혼내주고 다음에는 자신을 믿지 못한 보디발을 혼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형들을 사그리 잡아 들여 고생 좀 시켰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총리가 되기까지 뒤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은 그는 오히려 모든 순간들이 감사의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를 고생시킨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포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때가 온다. 그의 인생의 수수께끼가 풀릴 때가 왔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을 때이다. 자신을 숨기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을 때 형들은 혼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 그때 요셉이 무슨 말을 하는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45: 5)라고 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8). 형님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면서 양식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가 꾸웠던 꿈이 생각이 났다. 하늘의 별과 달이 그에게 절하는 꿈 말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는 그의 인생의 모든 원인이 하나님이었음을 안다. 그러기에 그는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원수를 갚지 아니하고 용서와 이해와 수용을 하게 된다. 믿음의 사람은 원인은 다 하나님께로 돌리면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V. 요셉의 스토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의 호 불호를 알기가 어렵다. 인생의 바닥을 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에게 영양충만일 수 있고 인생의 평안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도 그것이 축복인지는 성급히 판단할 수 없다. 우리 인생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의문스러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지금 내가 겪는 시련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원망스러운 것이 많고 불만스러운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잠시 원망과 불평을 보류해야 한다. 우리가 원인을 분석하지만, 그것에 시선을 두지 말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가 그분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셔야 한다. 그 분이 모든 것의 원인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인자이기에 그분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바로 그날 모든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자로 삼는 사람은 지금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도무지 어쩌시려고! 원망이 없다. 한번 봅시다! 물론 불평과 원망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인자로 삼기에 포지티브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벼른다. 드라마를 보여주세요라고. 그래서 원망도 불평도 일단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관리하시는 하나님께로 즉각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