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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어 |
글자 구성 |
의 미 |
각설이 (覺說爾) |
깨달을 각 + 말씀 설 + 너(사람)이 |
삶의 의미(이치)를 깨달아 설법(이야기)을 전하는 사람, 거지가 될 정도로 모진풍파와 어려움을 겪어보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되지 말도록 설법을 전하는 사람 |
각설이 (却說爾) |
사이 각 + 말씀 설 + 너(사람)이 |
창극 등에서 막간에 나와 이야기(재담)등으로 관중을 웃기는 사람, 즉 연극의 재담꾼을 말함 |
각설이 (脚舌爾) |
다리 각 + 혀 설 + 너(이)이 |
다리사이에 있는 혀와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부분 |
‘각설이’는 조선 후기 유민(流民)의 일종이며, 일명 ‘장타령(場打令)꾼’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지방 장터를 찾아다니며 구걸(求乞)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조직은 규율(規律)과 서열이 엄격했으며, 소리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노래 솜씨도 뛰어났다.
각설이
이들의 생태와 그 노랫말은 신재효(申在孝)의 ‘박타령’과 ‘변강쇠타령’에 전하는데, "뚤울 뚤울 돌아왔소. 각설이라 멱서리라, 동서리를 짊어지고 뚤뚤 몰아 장타령"으로 시작되며, 그 뒤로는 각 고장의 장(場)의 이름과 그 지방의 내력·특징·고사 따위로 엮어나간다.
노래의 사설(辭說)에는 천대받던 유랑집단(流浪集團)의 애환이 배어 있으며, 사회비판도 담겨 있다. 지금도 거지들은 있으나 예전의 집단적 유랑연예인(流浪演藝人)으로서의 ‘각설이패’는 사라졌다.
대개 ‘각설이’를 거지 또는 ‘덕출이패’로 알고 있지만, 엄격히 말해 이는 틀린 말이다. ‘각설이’ 또는 ‘각설이패’란 위에서 말한 유랑연예인(流浪演藝人) 집단으로서 단지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나, 밥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구걸(求乞)만을 하는 집단은 아니었다.
가진 것이 없고, ‘각설이’행위 자체가 무슨 영업행위(營業行爲)가 아니었기 때문에 타령의 대가로 동냥을 요구하고, 비오는 날이나 장날이 아닌 날은 거지와 같이 마을을 돌며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하기도 했지만, 순수한 거지들과는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순수한 거지 ‘덕출이’
그들은 소리를 통해 내세의 사상과 윤회설(輪回說)을 퍼뜨리는 거리의 연예인이었고, 그들의 구수한 소리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感化)시키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승(傳乘)되는 각설이타령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며, 2음 1박자 4·4조로 부른다.
'각설이'와 비슷한 것으로 서양에는 'Gypsy', 'Beggar'가 있다. 이중 거지(Beggar)는 '큰소리로 말한다'는 뜻이고, '집시(Gypsy)'는 '이상하다'는 뜻이다. 이 집시도 유목형(遊牧形)과 거주형 두 부류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각설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각설이'의 유래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만들어 백제(百濟)를 쳐서 무너뜨릴 때 당시 백제의 지식인들은 신분을 숨기고 걸인(乞人)이나 광인(狂人)처럼 숨어 살았는데, 여기에서 ‘각설이’가 유래했다고 한다.
‘각설이’는 우선 ‘창(唱)’을 잘했다. 오래 전부터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 부근 사람들은 소리에 능했고, 경상도(慶尙道)와 충청남도 부근 사람들은 춤을 잘 추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근대의 ‘각설이’는 일제시대(日帝時代)에 전라남도 목포(木浦) 부근의 무안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무안(武安)은 전쟁이 나도 안전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일제의 압박 속에 무안에 숨어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각설이’가 되었다고 한다.
각설이 패
여기에서 ‘각설이타령’의 개요(槪要)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의 ‘각설이타령’은 지방(地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전국 공통 각설이타령’이라는 게 있었다. 사설(辭說)을 살펴본다
전국 공통 각설이 타령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요놈의 소리가 요래도오 천양을 주고 배운 소리
네 선생이 누군지 남보다도 잘이한다. 술은 수리수리 잘 넘어간다.
앉은 고리는 등고리 선 고리는 문고리 한발 가진 깍귀 두발 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통노귀 네 발 가진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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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辭說) 중 첫 소절(小節)의 “얼씨구씨구 들어간다”는 “얼의 씨가 몸 안에 들어간다”라는 뜻이고,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는 “네 얼의 씨도 몸 안에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는 “전생에 깨달았던 영(靈)은 죽지 않고 이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난해 구걸을 도와 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감사(感謝)의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각설이타령’은 ‘각설이패’가 부르던 타령으로 '장타령(場打令)' 혹은 '품바타령'이라고도 한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각설이’는 앞서 소개한 대로 조선 후기 유민(流民)의 일종이며, 일명 ‘장타령(場打令)꾼’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지방 장터를 찾아다니며 구걸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각설이’ 공연
‘각설이’들의 조직(組織)은 규율과 서열(序列)이 엄격했으며, 소리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노래 솜씨도 뛰어났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허리·손·발 등을 크게 흔들며 사설(辭說)을 읊는 모습은 옛 시골 장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애환 어린 광경이었다.
앞서 소개한 ‘각설이타령’의 가사(歌辭) 중에는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을까봐 못 먹고, 떡은 떫어서 못 먹고, 술만 수리수리 넘어간다”는 부분이 있다. ‘각설이’들이 뭐 바쁠 게 있다고 바빠서 밥을 못 먹겠는가.
이 부분은 언어유희(言語遊戱)를 통해 말장난을 하는 내용이다. 그래도 그 속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역시 민중(民衆)들에게 술은 때론 밥이나 떡보다 더 좋은 음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술은 영양가(營養價)도 있고, 건강도 해치지 않는 토종(土種) 막걸리였다.
풍자와 해학(諧謔)으로 선과 지혜를 표출하며 비애(悲哀)와 한을 사랑으로 포옹하면서, 한 시대를 살다간 ‘각설이패’,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요놈의 소리가 요래도 천냥 주고 배운 소리, 한 푼 벌기가 땀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까만 손으로 찌그러진 깡통을 내밀던 ‘각설이패’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각설이패’를 위해 일부러 찬밥을 챙겨놓으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아련히 떠오른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필자가 목격(目擊)해 온 ‘각설이패’는 비록 ‘각설이타령’을 읊었어도 거의가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거지들이었을 뿐 진짜배기 ‘각설이’들은 아니었다.
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돌아갈 고향조차 없는 피난민(避難民)들의 일부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깡통을 들고 나서면서 조금이라도 효과적(效果的)인 구걸을 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장에서 들은 타령을 대충 긁어모아 읊조리고 다니던 그냥 거지들이었다.
‘덕출이 부대’
그래서 당시 외동읍(外東邑) 지역에 떠돌아다니던 ‘각설이타령’도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사설의 내용이 구구각색(九九各色)이었다. 북한지역 타령에다 서울지역 타령이 주종(主種)을 이루었고, 여기에다 외동읍 지역에 전래(傳來)되어오던 사투리타령이 배합(配合)되는 등 해적판(海賊版) 사설이 출현하기도 했었다. 전문적인 ‘각설이’가 아닌 뜨내기 거지들이 제 맘대로 부른 것이라 곡조도 박자도 엉망이었다.
당시의 거지들이 ‘각설이’도 아니면서 ‘각설이타령’을 한 것은 추운 겨울의 경우 타령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립문에 와있다는 것을 주인(主人)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고, 계속 타령을 하지 않으면 꼭꼭 문을 닫고 있는 방안에서 밥을 주려다가도 타령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돌아간 것으로 착각(錯覺)하여 그만 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6.25때의 어린거지
필자의 향리 괘릉리(掛陵里) ‘샛말’의 경우 추운 겨울 아침 영지저수지(影池貯水池) ‘문디골짜기’에서 나온 거지들이 인근 동네 자연부락(自然部落)을 하나씩 맡아 걸식(乞食)을 할 때는 타령의 절반이상이 욕설(辱說)로 채워지기도 했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 턱을 덜덜 떨면서 사립문에서 아무리 타령을 해도 부엌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고, 방문조차 열리지 않으면 응얼응얼하면서 욕설과 저주(詛呪)를 담은 사설(辭說)을 섞어 넣는 것이다. 욕설(辱說)의 주된 내용은 “이노무 집꾸석 년넘들 배락마저 디져라”든지, “훼양년의 지집년 빙판에 미끄러져 가랑이나 째져라”는 것 들이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면 귀찮기도 했지만,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행여나 얼어 죽거나 굶어죽은 게 아닐까하고 걱정까지 했던 그 시절 사이비(似而非) ‘각설이’ 거지들은 전쟁(戰爭)이 끝나자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구걸행각(求乞行脚)으로 여비가 마련되면 고향을 찾아 떠났고, 서울 등지의 대도시(大都市)로 옮겨 새로운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얼어 죽고, 굶어죽고, 질병으로 죽은 거지들도 부지기수였다. 앞쪽 파일에서 소개한 ‘덕출이’와 ‘덕순이’의 경우는 정신이상(精神異常)이란 질병 때문에 잡혀가거나, 스스로 행방(行方)을 감춤으로서 역시 향리에서 떠나버렸다.
지루하신 향우님들께서는 여기까지만 보셔도 됩니다. 이후 기사는 ‘각설이타령’ 사설의 해설정도에 불과합니다. |
다시 ‘각설이타령’ 얘기로 돌아간다. 먼저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을 비롯한 경상도(慶尙道) 지역에서 불리어지던 ‘각설이타령’ 중 ‘숫자뒤풀이’사설을 소개한다. 사설(辭說)의 내용은 우리들 고향사투리가 아니고, 표준어(標準語)로 게재한다.
일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일편단심 먹은 마음 죽으면 죽었지 못 잊겠네.
둘에 이자나 들고나 보니 수중 백로 백구 떼가 벌을 찾아서 날아든다.
삼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삼월이라 삼짇날에 제비 한 쌍이 날아든다.
넷에 사자나 들고나 보니 사월이라 초파일에 관등불도 밝혔구나.
다섯에 오자나 들고나 보니 오월이라 단옷날에 처녀 총각 한데 모아 추천 놀이가 좋을 씨고
여섯에 육자나 들고나 보니 유월이라 유두날에 탁주 놀이가 좋을 씨고
칠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칠월이라 칠석날에 견우직녀가 좋을 씨고
여덟에 팔자나 들고나 보니 팔월이라 한가위에 보름달이 좋을 씨고
구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구월이라 구일 날에 국화주가 좋을 씨고
남았네 남았네 십 자 한 장이 남았구나 십 리 백 리 가는 길에 정든 님을 만났구나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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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각설이타령’은 옛적부터 경상도(慶尙道) 지방 타령으로 지목되어 있었으나, 지난 1950-60년대에 걸쳐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듣던 타령과는 그 사설에 다소 차이가 있다. 앞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당시의 ‘각설이패들’은 이른바 ‘장타령꾼’이 아니었고, 윗녘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避難民)들이 구걸을 하기 위해 변신한 사이비(似而非) 타령꾼들인데 다가 타령도 이곳저곳 고장의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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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들은 진짜든 가짜든 대문(大門)에 들어서면서 ‘각설이타령’을 시작한다. 남의 집으로 느닷없이 들어가는 데서 비롯되는 충격(衝擊)을 줄이기 위해 타령을 통해 집 주인에게 자신들의 출현(出現)을 알리는 것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는 것은 강한 생명력(生命力)을 나타내는 동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계속되는 인연(因緣)과 감사의 뜻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통지와 인사가 끝나면 이어서 자기소개(自己紹介)로 들어간다.
응허나 요놈이 요래도 정승의 판서나 자제로 팔도나 감사는 마다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구걸신세 괄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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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설은 자신들이 지금 비록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하고 다니지만, 과거의 신분은 상당했다는 것을 과장(誇張)해서 하는 말이다. 과도한 긍지(矜持)와 자존심이 깔려 있어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설이타령’이 과장과 풍자(諷刺)의 양식을 띠고 있다는 특성(特性)을 인정한다면 용납이 되는 대목이다.
‘각설이’ 부부
자신들이 비록 구걸(求乞)을 하고 다니지만, 사람의 신분은 누구나 다 고귀하므로 걸인이라 하여 사람 괄시(恝視)는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동냥은 안주더라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요구가 은유(隱喩)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도지사(道知事)급인 감사(監司 ; 관찰사) 자리도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 나왔다는 것은, 지체나 벼슬보다 돈이 더 낫다는 사상으로 봉건적(封建的) 신분제에서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로 넘어가는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하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
우리부모 날 길러 좋은 영화를 볼라다가 병신이가 되었소. 병신이 팔자가 기막혀 문전마다 다니면서 어른의 덕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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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거들먹거림과는 달리 위의 사설(辭說)은 팔자가 기박하여 신체불구자(身體不具者)가 되는 바람에 좋은 영화(榮華)를 보지 못하고 ‘각설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앞의 사설이 과장법(誇張法)에 의한 풍자라면, 이 사설은 매우 현실적(現實的)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각설이’는 의도적(意圖的)으로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한쪽 팔이 없는 몸짓을 하며 시각적(視覺的) 효과를 연출한다. 자기 처지를 소개한 다음 타령 재주를 과시하는 것이다.
막걸리 동이나 먹었는가 걸찌걸찌 잘 헌다. 기름 동이나 먹었는지 매끌매끌 잘 헌다. 시전 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 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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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설은 ‘각설이타령’을 흥에 겨워 걸쭉하게 풀어나가는가 하면, 막힘없이 매끄럽게 이어나가고 유식(有識)한 문자도 써가면서 대목대목 잘하는 상황(狀況)을, 음식이나 경전의 상징성(象徵性)에 비추어 재미있게 나타내고 있다.
지금부터 노래하게 될 타령 솜씨를 그럴듯하게 드러냄으로써 주인의 관심을 끌고, 따뜻한 배려(配慮)를 기대하는 것이다. 한낱 걸인(乞人)이 아니라 전문적인 타령꾼으로서 역량(力量)을 과시하고 자신의 소리와 춤에 대한 보상(報償)을 받고자 하는 까닭이다.
무대에서의 ‘각설이’ 공연
따라서 ‘각설이’는 단순한 동정(同情)이나 자선을 기대하는 예사 거지와는 달리 자신의 예능(藝能)을 파는 일종의 뜨내기 연예인이라 할 수 있다. 몇 사람이서 무리를 이루어 타령가락을 익히고, 바가지나 깡통 장단에 맞추어 해학적(諧謔的)인 몸짓까지 터득해야 ‘각설이타령’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설이패’는 ‘솟대쟁이패’와 ‘사당패’, ‘풍각쟁이’들과 함께 유랑연예인(流浪演藝人)들로 인정받는다.
한 대문만 빠주만 지집 자석을 굶기고 섣달대목을 빠주만 사대봉제사 굶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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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찾아가 구걸(求乞)을 할 때에는 한 집도 빠뜨릴 수 없다. 계집과 자식들을 굶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문(大門)마다 집집마다 차례로 훑어나가면서 ‘각설이타령’ ‘품바’를 공연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 ‘각설이’의 직업정신(職業精神)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자신들의 소개와 ‘각설이’가 된 연유(緣由)를 읊고 난 뒤에는 본격적(本格的)인 ‘숫자뒤풀이’가 시작된다. 각설이타령의 본론(本論)이라 할 수 있는 ‘숫자뒤풀이’ 속에는 그들의 역사의식(歷史意識)이 포함되어 타령의 진수(眞髓)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흔한 것이 앞에서 소개한 경상도지역 타령으로 "일자나 한잔 들고나 보니"로 시작되는 ‘숫자뒤풀이’인데, 여기에는 정규의 사설을 개사(改辭)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기도 했다. "일자나 한잔 들고나 보니"의 대목을 받아서 "일선에 갔던 우리낭군, 고대 나오도록 기다린다"고 하는가 하면, 일자 다음에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를 받아서 "이승만이 대통령, 부통령은 아주사"라고 한다.
이 사설은 당시의 이승만이 대통령(大統領)이라면 자신은 부통령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당시의 이승만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문제가 있다 는 것을 지적(指摘)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쨌든 숫자뒤풀이는 이러한 넘나들기를 계속하면서 삼, 사, 오의 차례로 받는다.
사설의 골격(骨格)은 앞서 소개한 경상도(慶尙道)지역 타령과 같으나, 지방에 따라 구구각색이다. ‘숫자뒤풀이’ 가사에는 일제(日帝) 이후의 민족사(民族史)를 숫자에 맞추어 노래한 것도 있다.
삼천만의 우리 동포 해방이 오도록 기다린다. 오십만 명 유엔군이 한국나라를 도착했네. 육이오 사변에 집 태우고 천막살이가 웬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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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숫자뒤풀이’에서 흔히 숫자 십(10)은 '장'자로 가늠하여 "장하도다 우리 국군, 고맙도다 유엔군"으로 받기도 한다. ‘각설이타령’이 한갓 구걸의 노래가 아니라 일종의 구술사(口述史)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역사적(歷史的) 상황을 ‘숫자뒤풀이’ 형식으로 적절히 그려냄으로써 민중들의 역사의식(歷史意識)을 일깨워 주기도 했었다.
일월이 송송 야밤중 밤중새별이 완연하고 우리형제 이형제 한 서당에 글로 일러 천자도 한 권 몬 띠어냈네 품하고도 각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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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숫자에 맞추어 재미있는 말로 뒤를 풀어가며 생활사(生活史)를 노래하기도 하고, "구자나 한 장 들고 봐, 구십에 나는 늙은 중, 먹장삼을 떨쳐입고, 목화동냥을 내려간다"와 같이 한 폭의 풍속화(風俗畵)를 그리기도 한다.
혼자 가면은 심심질 둘이 가면은 수작질 서이 가면은 가래질 너이 가면은 노름질 노름 끝에는 싸움질 싸움 끝에는 주먹질 주먹 끝에는 발길질 발길 끝에는 동댕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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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뒤풀이’가 발전(發展)하여 사람들의 모임에 따른 행위를 재미있게 묘사(描寫)하기도 한다. 일종의 ‘짓타령’이다. 여기에서 ‘짓’은 곧 ‘몸짓’으로서 행위를 나타낸다. 이어서 ‘바지타령’으로 넘어가는데, 마치 역순사전(歷巡辭典)을 보듯이 온갖 바지들이 차례로 제시된다.
여름 바지는 홑바지 가을바지는 졉바지 겨울바지는 솜바지 건너 집에는 개바지 들어 가면은 막바지 진짜바지는 울아부지 바지 딸아 바지는 가랑바지 머슴아 바지는 통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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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설(辭說)들은 다소 이 방면의 ‘연수과정(硏修過程)’을 거친 ‘거리의 연예인’들이 시장터에서 공연(公演)할 때 들어볼 수 있는 것이고, 문전걸식을 하는 일시적 거지들에게서는 웬만해서는 들어볼 수 없는 사설이었다. 전문적으로 배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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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각설이의 역사적 거찰을 통해 이 민족의 설음을 뼈로 느낍니다 좋은 자료 수집하시느리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은 자료, 멋있는 생활이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