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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1
올해 5, 6월경에 5만원권 지폐가 새로 나온다. 이를 앞두고 현재 마무리 디자인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국내의 최고액권인 5만원권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은 알려진대로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어머니이자 여류 서화가인 신사임당(申師任堂)으로
결정되었다. 앞면에는 신사임당 초상과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포도도(葡萄圖)>,
뒷면에는 16 세기 화가인 어몽룡(魚夢龍)의 매화그림 <월매도(月梅圖)>가 들어간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이 등장함으로써 국내 화폐에 역사적 인물 모자가 함께 등장한다는
이례적인 기록이 만들어지게 됐다.
신사임당의 아들인 이 율곡이 이미 5000원권의 등장 모델이기 때문이다.
화폐 디자인과 문화재를 둘러싼 논란
1972년 국내 최초로 최고액권인 1만원권을 만들 때였다.
한국은행은 고심 끝에 한국 최고의 문화재인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모습을 디자인해 넣기로 결정했다. 그리곤 시쇄품을 만들어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발행 공고까지 마쳤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계에서“불교 문화재인 석굴암과 불국사를 1만원권에 표현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일”이라고 반발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결국 발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우리 문화재를 특정 종교의 산물로 보는 좁은 시각이었으나,
국내 최초의 1만원권 발행은 이렇게 어이없이 무산돼 버렸다.
결국 이듬해인 1973년 세종대왕(世宗大王) 초상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도안을 바꾸어 새로운 1만원권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가 있는 시쇄품은 현재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새 화폐가 발행되면 대통령이 기념 사인을 하고 이를 박물관에 보관한다.
2008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고액권발행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5만원권과 10만원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10만원권은 앞면에 항일독립운동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초상과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의 단체사진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뒷면에는 19세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대동여지도>와
선사시대 암각화 (바위그림)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도안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를 놓고 한 바탕 ‘독도 논란’이 일었다.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이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자
“우리의 10만원권 지폐에 우리나라 지도를 넣으면서 독도가 빠진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동여지도> 원본에 독도가 없더라도 10만원권에는 특별히 독도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그래야 세계 사람들이 우리 화폐를 사용하면서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 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러자“<대동여지도>에 없는 독도를 추가한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재 훼손이다.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넣지 않는다고 해서 독도가 일본 땅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화폐에 <대동여지도>를 넣고자 한다면 원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재에 대한 예의다”라는 반론도 나왔다.
이 논란은 정부와 한국은행이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왜 역사적 인물과 문화재인가
위에서 소개한 두 논란은 화폐 디자인의 상징성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화폐 자체의 상징성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화폐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 문화재의 상징성이다.
그렇다면 우리 화폐에는 왜 역사적 인물과 문화재를 디자인해 넣는 것일까.
화폐 속 인물과 문화재 가운데 사람들의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역시 인물이다.
화폐에 역사적 인물을 넣는 것은 그 인물을 통해 화폐의 권위와 신뢰감을 표현할 수 있고
동시에 한국의 정체성을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인물이 만들었거나 사용했던 문화재, 혹은 그 인물과 관련된 문화재를 함께 디자인해 넣는다면
그 인물과 그 시대를 좀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과 문화재를 선호하는 것이다.
화폐 속 문화재의 역사
우리나라 화폐 디자인의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문화재가 등장한 것은 국권을 상실한 직후인 1910년 12월.
당시 한국은행(훗날 조선은행으로 개칭)은 1원짜리 지폐를 발행하면서 경기 수원화성의 화홍문을 디자인 해 넣었다.
이어 1911년 발행된 5원 권엔 경복궁 광화문이,
10원 권엔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가 모습을 보였다.
문화재는 그 후 오랫동안 화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49년 조선은행이 발행한 신 5원권, 신 10원권에 독립문이 들어가면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이어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문화재는 화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 해 8월 발행한 100원 권에 광화문이 등장하더니
1952년엔 탑골공원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신 1000원권, 500원권),
1953년 거북선(1환권, 5환권, 10환권, 100환권, 1000환권)과 숭례문(신 10환권)으로 이어지면서
화폐 속 문화재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숭례문, 거북선,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탑골공원은 1960년의 화폐에도 계속 들어갔다.
또한 1962년엔 첨성대(10원권)와 경회루(100원권)가, 1966년엔 다보탑(10원짜리 주화)이 추가되었다.
화폐 디자인과 인물
우리의 화폐 디자인사에 있어 처음부터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발행한 조선 은행권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수호하는 신인 대흑천(大黑天),
수명을 관장한다고 하는 수노인(壽老人)과 같이 상상 또는 가상의 인물이 그려졌다.
수노인을 놓고 조선말기의 문인이자 관료인 김윤식(金允植)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근거나 사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광복 이후 1950년 한국은행이 출범하고 나서 화폐에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화폐에 나오는 세종대왕이나 이율곡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50년 8월 발행한 1000원권에 처음 모습을
보인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지폐를 독점하면서
등장했다.
1956년 한국은행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을 디자인해 넣은 500환권을 발행했을 때였다.
한국은행은 대통령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지폐 한가운데에 얼굴을 배치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지폐를 반으로 접다보니
대통령의 얼굴에 금이 가 훼손되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재자 이승만을 욕보이기 위해 일부러
가운데에 배치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좋지 않은 소문이 확산되자 경무대는
즉시 도안을 바꾸라고 한국은행에 엄명을 내렸다. 이듬해 대통령의 초상은 지폐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100환권엔 특이하게도 일반인 모자상(母子像)이 등장했다.
저축통장을 함께 들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통장에 모자상을 등장시킨 것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축 심리를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100환권은 제3차 화폐개혁으로 인해 6월 10일 발행이 중단됐다.
불과 25일 만에 수명을 다했으니, 한국 화폐 역사상 가장 단명한 인물 모델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 인물의 등장
우리 화폐 디자인에 있어 역사적 위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부터였다.
당시 500환권, 1000환권에 세종대왕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1970년대 들어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00원짜리 주화와 500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퇴계 이황(1000원권)이 화폐 디자인 모델로 가세했다.
1972, 1973년 5000원권과 1만원권을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국내의 화폐제작 기술이 부족해 영국의 전문업체인 토머스 델라루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한국인 얼굴의 특징을 잘 모르는 영국 업체는
세종대왕과 이율곡을 갸름하게, 코를 오똑하게 묘사해 서구적인 얼굴로 표현하고 말았다.
이를 놓고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위인들이 어떻게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우리의 기술이 부족해 외국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국은행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정부는 곧바로 역사적인 인물의 표준 영정을 정해 이것을 화폐 디자인에 적용하도록 했다.
화폐 속의 문화재
우리 화폐 디자인은 1983년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현충사가 등장하는 500원권이 사라지고
1000원, 5000원, 1만원권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꾼 이래 20여 년 넘게 그대로 유지해왔다.
이어 2006, 2007년 다시 디자인이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000원권엔 조선 성리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초상과 투호(投壺)도구, 창호 무늬, 성균관 명륜당,
퇴계의 집필 모습을 그린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계사정거도(溪舍靜居圖)가 그려져 있다.
5000원권에는 율곡 이이의 초상과 전통 조각보,
신사임당 작품으로 알려진 초충도(草蟲圖)가 디자인되어 있다.
그리고 1만원권엔 세종대왕 초상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 혼천의(渾天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천체 망원경이 표현되어 있다.
올해 5, 6월 발행을 앞두고 있는 5만원권은 앞뒷면이 모두 그림 문화재로 디자인된다.
앞면의 <포도도>는 우선 포도 이미지 그대로 상큼하고 싱그럽다.
하나하나 농담의 변화가 두드러진 포도알, 포도알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포도나뭇잎과 줄기들, 포도송이를 클로즈업해 포착한 듯 포도 그림이 화면을 꽉 채운 것도 매력적이다.
뒷면에 들어가는 어몽룡의 <월매도> 역시 조선시대 전통 매화 그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다.
밑둥을 과감하게 생략한 채 위로 쭉 뻗어 올라간 굵직하고 곧은 매화 줄기,
그 뒤로 가늘고 길죽한 잔가지의 대비가 먼저 눈에 뜨인다. 특히 굵직한 줄기를 보면,
오랜 세월 차가움을 견디며 늘 앞서서 봄을 맞았던 매화의 품격이 그대로 전해온다.
여기에 화면 위 왼쪽으로는 보일 듯 말듯 은은한 달. 깊이 있는 서정이 화면에 가득하다.
1만원권 문화재와 과학정신
지금까지 최고액권의 지위를 누려온 1만원권의 상징성도 크다.
1만원권은 1973년 세종대왕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디자인이 바뀌어 발행되었고
1983년 디자인이 바뀌면서 세종대왕 초상과 자격루, 경회루가 디자인되었다.
1983년에 도안해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옛 1만원권은
세종대왕 초상과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최첨단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가
앞면에, 경복궁 경회루가 뒷면에 등장한다.
세종 당시의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덕수궁 광명문 안에 보관 전시중인 것은 16세기에 다시 만든 자격루 중
물항아리와 시보장치기구 등의 일부 부품뿐이다.
이것이 옛 1만원권 지폐에 들어 있던 물시계의 모습이다.
이 자격루는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 실제로 작동되면서 전시 중이다.
그런데 경회루는 왜 들어갔을까. 그것은 자격루가 원래 경회루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통용되는 새 1만원권 속의 문화재는 많이 바뀌었다.
앞면에 용비어천가, 일월오봉병, 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체 망원경이 표현되어 있다.
일월오봉병은 조선시대 왕의 자리 용상(龍床) 뒷면에 세워두었던 병풍 그림을 말한다.
여기서 일월(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는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한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때 정인지 등이 지은 서사시로, 조선 왕조의 창업과 번영을 노래한 작품.
여기서 고구려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더욱 정교하게 제작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17세기 천문학자 송이영(宋以潁)이 만든 첨단시계 혼천시계에 설치됐던 혼천의를 주목해야 한다.
특히 혼천의가 들어 있는 혼천시계는 우리나라 과학 문화재 가운데 세계에 가정 널리 알려진 존재다.
1980년대 영국의 유명 과학사학자인 조셉 니덤이
“세계의 유명 과학박물관에 전시해야할 인류의 과학문화유산”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이처럼 1만원권 지폐엔 과학 문화재가 많이 디자인되어 들어가 있다.
1만원권을 사용하면서 우리 과학의 위대한 전통과 정신을 되새겨 볼 일이다.
- 글·사진, 이광표 동아일보 기자
- 2009년 3월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