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중인 정영선의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를 다녀왔다.
이미 '땅에 쓰는 시' 다큐멘터리를 보고, 올들어 붐이 확인되는 터라 기대감이 컸다.
41년생이니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
우리나라 1호 여성조경기술사로 서울대 조경학과를 나오고, <서양조경사>라는 교재용 책을 저술하고,
서안이라는 조경회사를 차려 300여개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그 중 60여개의 프로젝트를 전시하였다고 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86년 아세안 게임을 전후로 한국에서 벌어진 거대 조경사업들과
그녀가 차리 조경회사 서안의 작업들이다.
근대화가 완성되고 한국의 자본축적과 국력이 강해진 시점에서 아세안 게임과 올림픽이 열렸다.
바야흐로 자본의 축적 뒤 개인과 도시의 문화에 대한 욕구와 투자가 확대되는 무렵이었다.
굵직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면서 그녀가 지닌 공공조경의 꿈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공공 조경의 특징은 인위적 굴곡을 조성한 뒤, 환경에 맞는 식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경관적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휴식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물과 바위가 필요했다. 바위가 생각보다 많이 사용되고, 물도 그렇다.
물과 바위의 배치는 토목사업에 해당하는 일이라 자본이 좀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물과 바위를 통한 굴곡과 다양한 생태공간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깃들어 다시 수풀이 조성되면서
미기후대와 미시생태계가 열리니 빼놓기 어려운 요소일 것이다. 덕분에 윤선도의 오우가에 나오는 한국식 정원의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찾아들 수 있었다. 공공조경의 사명에 다양한 토착 식물의 사용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굴곡과 동선을 만들어 자연 속 조화로운 생태정원을 점치 추구하는 흐름이 읽혔다.
그 과정에서 차경하는 한국정원의 자의식이 발현되어 현지의 지리적 생태적 특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보였다.
정원을 활용한 근대건축의 공원화 프로젝트로서 '선유도공원' '경춘선 숲길'은 역사를 간직한 시민공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에게 차경은 단지 지리적 자연 뿐 아니라 도시의 공공정원이 역사적 흔적을 대하는 방식에 현대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근대화의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가지 역사적 시점을 아우르며 그녀의 정원은 시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근대화의 정점에서 그녀가 가진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행운이다.
물론 그녀의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거대 프로젝트에 의한 서안의 공공정원이 아닌 그녀의 개인 정원을 보면 훨씬 생태적이고 자연스러운 정원이었다.
그녀의 자연주의자 다운 면모를 잘 보여준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가슴에 품은 정원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킬 줄 아는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정원이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의 성과는 충분히 평가받을만하다.
하지만 정원의 시대에 정원이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좀더 필요한듯 보였다.
현대정원은 아무래도 식민시대에 보급되고 확장된 정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의 효용과 한계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개인정원과 공공정원의 다른 목적도 살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정원 프로젝트들을 보며 자본과 분리 할 수 없는 정원의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서안의 작업은 국가와 자본의 문화적 욕구에 잘 부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이 없는, 혹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정원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나라는 지금 국가는 물론 지자체 단위로도 또 개인으로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거대 사설정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본 축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테마정원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정원 구경이 관광의 한 테마가 되기도 했다.
시골에도 소박한 개인의 정원들이 많아지고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아마도 정원문화는 개인들이 일상에서 돌보는 다양한 작은 정원들에 의해 점차 완성되어 갈 것이다.
자본의 시각에서는 개인의 정원들은 반려동물 산업처럼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잃어버린 에덴동산과 지구라트의 공중정원은 물론 산림의 은둔자인 죽림칠현을 떠올리고
그들과 비교를 해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정원이 분명 자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원과 자연을 애써 구분하는 이유는 인위적 자연으로서의 정원이 가진
노동집약적이고 자본집약적인 특성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개인 정원은 사치적 만족의 공간이다.
우린 소박하고 자연스럽길 꿈꾸지만 그것이 점차 소유에 가까워질수록 정원은 사치적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영선 선생의 관심도 그렇지만 국토와 지구를 가꾸는 시각도 중요할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기후위기 기후재난의 시대에 자본의 탐욕과 폭력에 의해 망가지는 지구를 도외시하고 정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그녀의 정원에서 찾아보기는 물론 어렵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녀의 전시를 보며 내가 느낀 불편함의 일부는 자본의 트로피로서 정원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공공정원이라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지구라트의 공중정원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서안이라는 조경회사를 통해 활동했으니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공을 인정함과 동시에 한계도 인정하며, 현 시점에서 정원운동은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을 파괴한 상태에서 정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인간화된 지구에서 우리는 지구정원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