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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위대한 사랑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코 9,30-37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 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살펴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 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반영억 라파엘신부님 「눈 높이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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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걷다(신광철)」
걷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한 팔이 앞으로 가면 다른 팔은 뒤로 간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면
다른 발은 뒤에 남는다
두 팔의 어긋남과 두 발의 어긋남의
연속이 걷는 모습이다
그래, 어긋남의 반복이 삶이었구나
흔들리면서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구나
이 시를 읽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걷는 것을 우리의 삶과 연관 짓는 모습에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특히 어긋남의 연속이라는 표현이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두 팔, 두 발의 어긋남처럼 어긋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한 방향으로 똑바로 가면 되는데 말이지요.
어긋났다고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어쩌면 어긋나야 똑바로 된 삶이 아닐까요? 두 팔이 어긋나야 중심을 잡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으며, 두 발이 어긋나야 깡충깡충 뛰지 않고 제대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긋나 보이는 삶,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삶인가 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나는 자신을 돌아본다. 해야 할 일은 충실히 실행하였는지, 또 친구들에게 신의를 잃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또 내가 배운 것을 몸소 실행에 옮겼는지 말이다(공자)>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0-37)
「いちばん先になりたい者は、
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
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
「わたしの名のためにこのような
子供の一人を受け入れる者は、
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わたし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ではなくて、
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方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マルコ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Whoever receives one child such as this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
(Mark 9:30-37)
年間第7火曜日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ヌグドンジ チョッチェガ デリョミョン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モドン イエ コルチガ デ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モドン イエ チョンイ デオヤ ハン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0-37)
「いちばん先になりたい者は、
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
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
「わたしの名のためにこのような
와타시노 나노 타메니 코노요오나
子供の一人を受け入れる者は、
코도모노 히토리오 우케이레루 모노와
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와타시오 우케이레루노데 아루
わたし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ではなくて、
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方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マルコ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Whoever receives one child such as this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
(Mark 9:30-37)
Tuesday of the Seventh Week in Ordinary Time
Mark 9:30-37
Jesus and his disciples left from there and began a journey through Galilee,
but he did not wish anyone to know about it.
He was teaching his disciples and telling them,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and they will kill him,
and three days after his death the Son of Man will rise."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aying,
and they were afraid to question him.
They came to Capernaum and, once inside the house,
he began to ask them,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way?"
But they remained silent.
For they had been discussing among themselves on the way
who was the greatest.
Then he sat down, called the Twelve, and said to them,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Taking a child, he placed it in their midst,
and putting his arms around it, he said to them,
"Whoever receives one child such as this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
2025-02-25「人の子は、人々の手に引き渡され、殺される。」
+神をたたえよう。神は偉大、すべては神を造られた。
今日は年間第7火曜日です。
われらの罪のあがないなるイエズスの聖心とあがむべき聖母マリア、そして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に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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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ルコによる福音
<「いちばん先になりたい者は、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なさい。」>
そのとき、イエスと弟子たちは9・30そこを去って、ガリラヤを通って行った。しかし、イエスは人に気づかれるのを好まれなかった。31それは弟子たちに、「人の子は、人々の手に引き渡され、殺される。殺されて三日の後に復活する」と言っ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32弟子たちはこの言葉が分からなかったが、怖くて尋ねられなかった。
33一行はカファルナウムに来た。家に着いて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途中で何を議論していたのか」とお尋ねになった。34彼らは黙っていた。途中でだれがいちばん偉いかと議論し合っていたからである。35イエスが座り、十二人を呼び寄せて言われた。「いちばん先になりたい者は、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36そして、一人の子供の手を取って彼らの真ん中に立たせ、抱き上げて言われた。37「わたしの名のためにこのような子供の一人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わたし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ではなくて、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方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マルコ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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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ン・ヨンオクラファエル神父様の黙想文「目線の愛」です。
互いの考えが異なることを認めるのは当然のことですが、共に喜びも苦しみも分かち合いながらも、お互いの心を読み取れないときには、もどかしさを感じるものです。同じ寝床にいながらも異なる夢を見るという言葉のように、イエス様と弟子たちはまさに「同床異夢」でした。
イエス様は御父の御心のもと、私たちを救うために受難と死の道を歩まれました。ですから、弟子たちも当然、その道を歩むべきでした。しかし、弟子たちの考えは全く違っていました。彼らの関心は、イエス様の受難と死ではなく、師であるイエス様が殺される前に高い地位を得て、認められることでした。
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途中で何を議論していたのか」とお尋ねになりました。しかし、弟子たちは口を開こうとしませんでした。「彼らは、だれがいちばん偉いかと議論し合っていたからである。」(マルコ9・34)。
この問いは、創世記3章9節の「アダムよ、お前はどこにいるのか」や、カインへの「お前の弟アベルはどこにいるのか」という問いと同じものだと言えるでしょう。
イエス様は知らずに尋ねられたのではなく、「お前自身の心の内をよく見つめなさい」ということを伝えようとされたのです。あなたの心の中心はどこにあるのか、という意味なのです。
実際に「偉大な人」とは、単に高い地位にある人ではなく、心が広い人のことを言います。しかし、弟子たちは高い地位を望んでいたため、沈黙す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どうすればイエス様の言葉をよく理解できるのか」「どうすれば福音的な生き方ができるのか」といったことを論じることができたなら、どんなに良かったことでしょうか。
そんな弟子たちに向かって、イエス様は「誰でもいちばん先になりたい者は、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マルコ9・35)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この御言葉は、愛をもって仕え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しかし、「仕える」ということがどれほど難しいことでしょうか。もてなされることは容易ですが、相手に最も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はとても難しいものです。
自分中心ではなく、相手を中心にして、自分のものを譲るということは、誰にでも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イエス様は私たちを愛されたがゆえに、「キリストは、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 かえって自分を無にして、僕の身分になり、人間と同じ者になられました。」(フィリピ2・6-7)のです。
自らを低くし、相手に合わせる謙遜こそ、私たちが従うべき模範です。愛とは、最も良いものを相手に与えることです。私たちには「目の高さに合わせた愛」が必要です。
もし私たちがイエス様を信じることで、この世において心の平安や慰めを得ようとしているのなら、それは主の望まれることとは異なります。私たちは今すぐに見える平和を求めますが、主は私たちの究極的な救いを望んでおられます。
だからこそ、ここでの一時的な労苦や汗、犠牲の捧げものを新たにしてくださるのです。
もし主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なら、僕であろうと最も低い者であろうと何の問題があるでしょうか?
結局、すべてを得ることになるのです。
私たちのための主の愛は、限りないものです。その御心を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今日であることを願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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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の福音を通して私たちの目線に合わせた愛を教えてくださり、わたしたちが真の愛を実践し真のキリスト者となれますように聖霊き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