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歲月
노산군 부인의 친가에서는 사랑채 송현수도 일체 두무불출을 하고 찾는 사
람도 없는 방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앉아만 있었다.
마치 실신한 사람 같았다. 안채에 있는 송현수 부인도 보기에 너무나 애절
하였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딸과 함께 자리 보존하고 누운지
며칠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이 이러하니 아랫사람인 비복들
도 기력이 없고 우울해졌다.
왕년의 중전이던 노산군 부인이 거처하는 후원 별당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
하였다.
그러나 자연은 어김이 없었다. 화사하기만 하던 함박꽃이 지고 흰 나리꽃
이 별당에 거처하는 노산군 부인의 마음은 아랑곳도 없이 그 은은한 향기
를 자랑하고 있는 황혼 짙은 시간에 월선이만이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
다.
오늘도 진종일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누웠다 앉았다 하는 노산군 부인이 너
무나 딱해 보였다. 눈물이 말랐는지, 아니면 중전의 체모를 생각함에서
인지 그녀는 아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월선이는 도대체 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
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백발이 성성한 대감 내외분을
보기가 송구스럽고 후원 자기 거처로 오면 중전마마의 침통과 세상을 외면
한 듯한 모습을 차마 같은 여자로서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아까 들여온 잣죽은 식어서 엉켜버린 채다. 몇 번이나 잡수시라고 종용은
했건만 노산군 부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허공을 올려다본 채 눈빛 하
나 변하지 않았다.
월선은 또 한 번 안채 부엌에 나가 다시 죽을 데워서 갖다 달라고 이르고
곧 들어왔다. 대방마님이 잠시라도 마마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기 때문이다. 잣죽이 다시 따끈하게 데워져 들어왔
다.
"중전마마.. 기력을 차리시고 한 수저라도 드셔야 안채 마님들도 진지를
잡숫지 않으시겠사옵니까? 쇤네는 너무나 답답해요. 안으로들면 대방마님
께서 자리 보존하신 채 식음을 전폐하시고 사랑에서는 대감마님께서 아예
출입도 안하시고 하루종일 앉아만 계신다 하오니..."
"오냐, 내가 참으로 불효자식이구나. 이 몸은 죽는 길도 맘대로 할 수 없
는 몸, 어쩌면 좋단 말이냐."
몰아 쉬는 한숨에 너무나 큰 한이 맺혀 있었다.
"중전마마, 쇤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사람에 지나지 않는 몸입니다마는
들은 풍월로는 양친님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 불효가 된다고
들었사옵니다."
"네 말이 옳다. 너에게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월선아, 너는
누구보다도 내게 힘이 된다. 네 은혜를 한시라도 잊지 못하겠구나."
"마마께서는 늘 그런 말씀만 하시네요. 쇤네는 마마님이 웃으시면 따라 웃
고 마마님께서 찡그리시면 저도 찡그리는 거울 같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겠사와요?"
"넌 곧잘 문장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아무튼 기특도 하다."
"중전마마, 어서 한 수저만이라도 드시어요. 그리고 기력을 차리시고 안방
대방마님께 납시어서 음식도 권하시고 위로도 하시어야 중전마마의 체모가
서지 않을까 소녀는 생각되옵니다."
"그래 이리 가지고 오너라.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마시자. 네 말이 과연
옳다."
중전은 반 사발이나 되게 마시고는 풀린 머리를 얹은 후 월선이를 앞장 세
우고 나섰다. 몇날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므로 어지러웠
다.
"어머님, 들어가도 좋습니까?"
"오, 중전, 어서 오시오.."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는 어머니는 딸을 반겼다.
"어머님, 소녀는 지금 잣죽도 먹고 이렇게 소세도 하고 머리도 빗고 정신
차리고 나왔습니다."
"오, 어디 보오. 암! 그래야 하오. 그래야하구 말구요. 그래야 상감의 억
울하신 영혼을 위로해 올리고 나라 꼴이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게 아니오. 나도 오래오래 살아서 반역한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 싶구료."
"어머님, 부디 소저와 같이 오래 사셔서 어머님 말씀같이 세상 돼가는 것
을 보셔야 하지 않아요?"
"중전의 말이 과연 옳소. 월선아, 게 있느냐? 가서 무어 먹을 것 좀 가
지고 오너라. 마마께서 이렇게 기력을 차리시고 듭시었는데 난들 이렇게
있을 수야 있겠니?"
송부사 부인은 지금 이 시간이 진정으로 기뻤다. 효심이 극진한 딸이 어머
니를 생각하여 그 사무치는 슬픔을 지탱하고 올라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
니 더욱 그랬다.
"중전, 사랑 아버님께 가 뵈야겠소. 나도 한술뜨고 같이 나갑시다."
송부사 부인은 언제 알아도 알게 될 노산군 참변을 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예, 그러세요. 저도 아버님 뵙고 싶습니다."
아직은 노산군의 최후를 모르고 있는 부인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가자는 애
기를 단순히 들었다. 비틀거리는 대방마님을 몸종이 붙들고 월선이는 노산
군 부인 뒤를 따라 사랑으로 갔다.
"아버님, 아직 침소에 안 드셨어요?"
"웬일이요. 어서 들어오시오."
쉰 목소리는 가라앉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을 말하는 듯했
다.
"부인도 같이. 무엇 드셨소? 중전도..."
"예,.. 대감께서는?"
"나야 먹었지. 암, 먹어야지. 안 먹으면 죽는 법."
그것은 남에게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소리였다.
"중전도 정신을 처리오. 이보다 더 무서운 박해가 와도 정신을 차려야 사
는 법이요. 그리고 오래 살아야 마지막을 보는 것, 알겠소?"
"예, 아버님, 저는 오래 살아서 상감의 진혼도 뫼시고 아버님 어머님에게
효도도 실컷 하고 싶사옵니다."
"오, 과연 내 딸이로고!"
"아버님, 이미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조금도 구애 마시고 제게 얘기해 주
십시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누가 말해 주어서 안 것이 아니라 궁중생활
의 경험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지아비되는 노산군이 이 세상에 생존해 있
다면 오히려 거짓이라고 규정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전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오기를 우리 두 늙은이는 기다린 셈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주오."
송부사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한 미미한 서생놈에게 화살의 시위로 목
을 졸리워 마지막을 고한 상감의 참변을 띠엄띠엄 얘기했다. 노산군 부인
은 아무 표정도 없이 얘기를 들었다. 차돌같이 차고 굳은 표정이었다. 아
니 오히려 새파랗게 맺힌 얼굴이었다.
말을 마친 늙은 아버지는 차마 딸의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머니 역
시 그러했고...
장지 밖에서 엿듣고 있던 월선이는 치마끈으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자꾸
만 자꾸만 닦았다. 노산군 부인은 이제는 아버지 처소를 일어서야 되겠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발에다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일어서지지를 않았고 입도 꿰
매 놓은 것같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자기 넓적다리에 가져다가 꽉 꼬집어 보았다. 분명히
따끔하게 아픔이 왔다.
'정신을 차리자. 이래서는 안 되는 몸, 너무나 할 일이 많구나.'
중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도사렸다.
"아버님, 물러가겠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심려가 안 되도록 굳건히 살
면서 이 눈으로 똑똑히 세상 되어가는 형편을 보겠습니다."
"갸륵도 하오. 중전이 그런 훌륭한 태도를 갖게 되니 우리 두 늙은이의
마음 한결 놓이는 것 같소."
노산군 부인은 극한에 오른 슬픔과 억울함으로 마치 신경이 마비된 듯한
무감각의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옆에 직접 모시고 있는 월선이만이 가장
뻐저리도록 슬픈 심정을 느꼈다.
소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노산군 부인의 자태는 청초를 지나 애절하게까지
보였다. 풀어버린 머리는 더욱 윤기를 입어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는 듯
싶었다. 옆에 모시는 월선도 소복으로 어질던 상감을 추모했다.
상감의 참변을 아버지에게 들은 그 시간부터 노산군 부인은 얼음처럼 동작
과 표정이 차게 바뀌었다. 분명 얼음이었다. 찬바람이 휙휙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전에 없던 일, 즉 아침 저녁으로 양친에게 문안 드리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잣죽이나 깨죽을 물리친 노산군 부인은 새로 명하여
조미음을 쑤어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기는 조미음을 먹으면서 부모의
조석을 꼭 직접 참견하고 권하는 것이 일과였다.
상감의 시체를 뫼시지 못한 것은 노산군 부인이 품은 한 중의 한이었다.
그녀는 신위(神位)를 소박하게 자기 방 바로 옆에 붙은 마루방에 모셨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삼배를 올렸다.
살림은 하루 하루 영락해 갔다. 많은 종들도 다 내보내고 밥짓는 사람 하
나와 청지기 그리고 월선이 셋만 남았다. 조석 삭망에 올릴 음식을 따로
차리기도 힘겨웠다. 그리하여 점심도 없이 아침 저녁 들여오는 조미음을
정성껏 바치기로 그녀는 각오했다.
상감도 굽어 살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저녁에도 조미음이 나무 쟁
반에 올려지자 그녀는 손수 받아 곧 상청이 있는 마루방으로 갔다. 조용히
쟁반에서 미음 그릇을 꺼내 올리고 삼배를 하였다. 아무도 옆에는 없었다.
월선이 참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방에서 월선이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조용히 삼배를 하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정해 놓고 하는 일이다. 노산군 부인은 두 손을 합
장하고 부처가 되신 상감을 조용히 눈 앞에 그려보며 명복을 빌었다.
"상감마마, 신첩 여기 사바세계에 살아 있사옵니다. 억울하신 영혼을 위로
드릴 수 있는 몸은 단지 이몸밖에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첩이
상감을 따라가지 못하는 심중을 상감만은 헤아려 주실 줄로 믿사옵니다.
상감이 무서운 세상에서 어느 안식하는 처소로 옮기셨는지 이몸 알길이 없
사오나 아직도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몸, 이 이상의 불효가 없도록
보살펴 주시옵기 비옵니다. 상감마마 오늘도 낙원에 계시면서 이 사바세계
를 잊으시고 영원한 복락만이 깃드시기를 바라옵니다."
늘 외우는 정해진 기원(祈願)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잠자는 시
간 외에는 그 머리속에, 그 가슴 속에 상감을 그리지 않는 시간이 없었다.
조석으로 드리는 배례(拜禮)만이 그녀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상감 앞에서 하던 그대로 뒷걸음을 세 걸음 걷고 조용
히 물러나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월선이는 기도하는 동안 다
식어버린 조미음을 가져다가 주인 아씨에게 주었다. 그러면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부인은 그 조미음을 입에 갖다 대고 마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안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니가 무엇을 잡수셨는지 안녕
하신지 문안 드리고 아버지가 여전하신지 알고 싶어서였다. 잠시 안채하고
드나들다가는 다시 자기 처소로 들어오면 이제부터는 그녀 시간이었다.
중전은 뜰로 내려가 후원 큰 매화나무가 서 있는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영월 쪽인 동쪽을 바라보고 상감을 그리는 것이다. 상감의 생존시 꿈 속에
서 보던 그 강물이 가까운 동헌으로 마음은 달렸다.
요즈음은 꿈도 없다. 아니 꿈에 뵈도 먼 먼 피안의 사람으로 보일 뿐 닿을
락말락하게 상감은 보였다. 말 한마디로 건네지 못하고 곧 따라 뛰어 쫓아
가면 그 자리에는 없고 또 저 멀리 가서 있다. 따라가면 또 그 모양이다.
중전은 기진맥진해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잠을 깨고는 했다.
상감이 세상에 있을 때는 멀리 떨어진 영월땅이지만 밤마다 꿈 속에서 즐
겁기만했다. 그러나 세상을 무참히 떠난 후에는 꿈 속에서라도 즐거울 수
가 없었다.
'죽은 사람은 여기 세상 사람과는 인연이 먼것인가? 아직 따라가지 못한
이몸이 죄라면 죄겠지...'
그녀가 그 자리에서 서 있는 시각이 얼마인지는 월선이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중전마마, 안으로 듭시어요. 밤 바람이 아니 좋사옵니다."
번번이 월선의 이 소리에 자기 정신으로 돌아가는 중전은
"그래, 들어가자. 네게 미안하기 이를데 없구나. 제발 너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먼저 쉬고 하래두 말을 안 듣는구나!"
하고 거의 짜증 섞인 말투로 하였으나 그 소리도 월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마께서 안 듭시는데 제가 어떻게..".
"제발, 너, 그 중전마마 소리 좀 빼놓고 말할 수 없을까? 아씨라고 불러
다오. 소원이다. 이 나라에 중전이 엄연히 계신데 외람되게끔..."
"쇤네에게는 하늘 밑 땅 위에서는 마마 한분만이 중전이십니다. 누가 뭐래
도 제게는..."
그녀는 입을 채로 자리가 깔린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합장하고
입 속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말을 못해 봐도 좋사옵고 옆에 뫼시지 않아도 좋사옵니다. 이 시간부터
상감이 계신 곳으로 더듬어 갈 수 있게하여 주십시오."
천지신명과 부처님에게 드리는 소원이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어떤 힘에게
비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리속으로 몸을 묻었다. 조금도 흐트러
짐이 없는 마음가짐을 간직하고서. 지존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는 가슴은
한 오리의 흐름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채찍질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 눕다가
보면 날이 밝는다. 아침 삭망을 마친 그녀는 안으로 어머니를 보로 올라간
다.
세조의 왕조가 이 쇠락해 하는 송부사 집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것은 다행
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눈여겨 보지 않는 집. 뜻있는 사람이 있어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집을 찾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종친들이나 벼슬아치
들이 마음을 써서 노산군 부인에게 문안도 드릴겸 송부사를 위로할 생각으
로 드나들었지만 그들에게 어느덧 화가 미쳐 귀양을 갔고 혹은 행방이 묘
연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 같은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후원에 있는 여러 가지 수목과 꽃들이
피고 지는 속에서 계절을 느낄 따름이었다. 송씨는 치자꽃이 향기롭게 피
어나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외로운 때에 너그럽고 인자한 양친이 안 계셨다면. 그리고 진정으
로 세심한 위로를 해주는 월선이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살
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전마마, 사랑에 부원군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오.. 그래, 언제나 변함없는 후의구나."
"대방마님께서도 고마우신 양반이라고 오늘도 몇번 말씀하시던데요. 그리
고 또 쌀도 보내오시고 필육도 보내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신세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리고 마마님 잡수시라고 녹용 든 보약도 가지고 오셨다 하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보약을 먹겠니?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달여 드려야
지."
"아니어요. 대방마님께서 마마님 옥체 걱정을 얼마나 하시는지 아셔요? 그
래서 당장 내일부터라도 달여 올리라고 아까 말씀하시던걸요."
"아니다. 내가 나가서 어머님께 여쭈어야 하겠구나. 나야 젊은 몸, 아무것
을 먹으면 어떻겠느냐."
그것은 조금도 숨김 없는 진심이었다. 잠시 후에 청지기다 들어와서 아뢰
었다.
"부원군 대감께서 이리로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
부원군 대감이라는 사람은 단종의 생질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
(鄭眉壽)를 말함이다. 그도 야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조정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으로 큰 화는 면하고 있었다. 가지 재산으로 그럭저럭 지내
는 사람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태도는 중전을 알현하는 예의를 조금도
결한 데가 없었다.
"중전마마! 정미수 문안 아뢰러 왔사옵니다. 옥체균안하시온지..."
"그 동안도 별고 없으셨소? 댁내도 모두 안녕하시고요?"
"예, 덕분에... 중전마마 기체 여전 하시온걸 뵈오니 마음 든든하옵니
다."
"부디 오래 사셔서 서로 의지하고 나라 되는 꼴 구경도 하고... 그리고
항상 베풀어 주시는 후의를 무엇으로 사례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어찌하여 심려를 하시오니까?"
"고맙소,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서 사례를 드리오."
"황공하신 말씀 어찌 이 마음 다해서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전은 감격에 넘쳐 얼굴도 들지 못하고 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중전마마, 보약을 좀 가지고 왔사오니 잡수시고 기력을 차리셔서 만수무
강하셔야 되겠사옵니다."
"너무나 고맙구료. 온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시고 내 약까지 걱정을 해주
시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무 심려 마시고 꼭 잡수시어 이 다음에 와 뵈올 때는 좋으신 얼굴을 보
게 해주십시오."
"그 정성 잊지 않고 먹으리다."
그들의 대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전과 신하의 알현이었으며 감정이 서로
통하는 인간과 인간의 대면이었다.
23- 형극(荊棘)을 넘어서
왕년의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일찍이 아들이 없어 딸 하나를
예절과 절도를 다해 기를 보람이 있어 부원군이 되었으나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단종인 노산군을 영월 정배지에서 참살하고 난 세조는 얼마 안 되어 송현
수를 귀양 보냈다. 괴로운 세파 속에서도 노산군 부인이 기력을 잃지 않고
살아나간 것은 너그러운 아버지를 가진 힘이었다. 그러나 어버지가 귀양을
가고 난 이제, 유일한 사랑은 어머니 하나 뿐이었다.
넓고 퇴락한 집 속에 식구라고는 안방에 어머니 하나와 밥짓는 종이 하나
있고 후원 별당에 두 여인이 침식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것과
땔감을 죽지 않을 만큼 보내주는 단종의 생질 정미수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까닭이나 힘은 오로지 한길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
었다. 목숨이 아까와서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가 견제하면서 살아가
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견제하고 딸은 어머니를 견제하면서 그어가는
평행선의 생명이었다.
삶이라기보다 고문 같은 세월이었다. 노산군 부인은 아버지마저 없는 절간
같이 고요한 별당에서 오늘도 과거를 추억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철이 들었을 때는 어머니 품을 떠나서 후원 별당에 옮겨와 있었다.
동갑짜리 월선이가
"아기씨! 대방마님께서 급히 올라 오시래요."
로 시작하는 일과는 어머니가 가르치는 양반집 규수로서 필요한 모든 법도
를 배우는 것이었다.
여덟살짜리에게는 지나친 요구가 허다했지만 바탕이 총명한 그녀는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아는 혜지(慧智)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선생을 놓고
배우는 글도 주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진도가 빠르고 이해를
쉽게 해서 송부사의 기쁨을 부풀게 만들기도 했다. 바느질을 배우는 솜씨
도 놀랍도록 날렵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어버지의 훈육은 각기 예절과 바느질, 글과 글씨 쓰는
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느 일에나 성의를 갖지 않고 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의 일과는 양친을 즐거움으로 이끌
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으젓하고 조숙한 그녀였지만 어른 눈에서 벗어나면 본연의
진정한 아기씨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월선아. 아까 어머니께서 드시던 약과와 다식 이리 가지고 와."
"예, 아기씨.. 우리 또 소꼽장난 해요?"
"그래, 어디서 할까? 그냥 방에서 놀까! 마당에 자리 펴고 할까?
"아기씨, 얼마나 꽃이 예쁘고 새소리가 고운데요. 뭣 때문에 방구석에서
해요?"
이건 월선이의 제의였다. 아기씨도 재미있고 월선이는 다시 없이 즐거웠
다. 월선이는 아기씨와 더불어 소꼽장난하는 시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
미있는 시간이었다.
아기씨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규수로 하루 하루 자라났다. 그녀를 먼발치
라도 보고 간 양반집 어른들 아니 부인들은 한 번씩 침을 안 흘리는 사람
이 없었다. 모두들 내 며느리 소리 내 손주며느리감으로 생각해 보기 때문
이었다.
그녀가 열세살 되던 봄에는 궁중에서 간택설이 떠돌았다. 양반집 규수 중
에서 동궁빈을 고르는 일이었다. 숱한 규수들의 열에 끼어 그녀가 간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부터 그녀의 주변은 온통 세자빈마마 대접이었다. 양친을 비롯하여 드
나드는 일가 친척 종들까지 배풀던 그 융숭한 대접은 지금도 그녀가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였다. 모두들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느냐고 기뻐했다. 그
리고 아침 저녁 온갖 사람들의 출입으로 송부사 집의 대문이 메이다시피
했다.
정작 그녀는 멍멍한 속에서 이제부터는 궁중예법, 아니 앞으로 중전이 될
몸으로서의 법도를 배우는데 전심을 다해야 했다.
선생이 많이 있었다. 간택 받기 전에 양반집 아가씨로서 배운 예절과는 또
다른 예법을 많이 배워야 했다. 몸가짐, 옷입는 법, 언어 등 세밀한 교육
을 받아야 했다. 그전같이 자유의 시간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다
못해 식사를 하거나 걸음걸이의 예절까지 달리 배워야 했다. 그녀는 이렇
게도 세자빈의 자리가 무섭고 어려운 것인가를 어린 가슴이나마 막연히 느
끼면서 지냈다.
그래도 친가에서 있을 때는 자유로왔다. 어머니에게 의논도 드릴 수 있었
고 얼마간 짜증 비슷한 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를 회상
하며 가슴 속에 젖어오는 추억이 있다면 친가의 마지막 날인 궁으로 들어
가던 날이었다.
그날도 꼭 지금같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 전부
터 어머니께 들은 교훈을 마음 속으로 되씹고 있었다.
'양반집 딸은 한 번 양반끼리 한 결혼에도 친가 출입을 못하는 법이어
늘...'
항차 궁으로 들어가 장차 중전이 될 그녀가 가는 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길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집안은 잔치집인지 난가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들떠 있어 그
녀의 가슴은 진정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라도 더 어머니 곁에서 어
머니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
다. 양친의 얼굴은 도시 볼 수가 없었다.
차려입고 앉아 있는 그녀를 수모가 양쪽에서 부축해서 일으켰다.
'시간이 되었는가? 지금 이렇게 걸어서 앞마당으로 나가면 궁으로 들어가
는 가마를 타야만 하는가?'
착잡한 가슴이었다. 그대로 동궁빈은 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는 것인가? 그녀는 끄느 대로 끌려서 신켜 주는 신을 신고 후
원으로 나섰다. 수모들은 그녀를 사랑채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구나!'
지각없이 가슴이 젖어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
지로 참고 머리를 바로 잡았다. 며칠을 두고 하던 어머니 말이 귓속을 울
리고 지나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날, 궁 뿐이 아니라 누구든지 규수들이 시집을 가는 날
눈물을 흘리는 일을 기(忌)하는 일중에서도 제일로 기하는 일이니라."
아버지의 표정도 굳어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처절할 정도로 엄숙한 빛
을 띠고 있었다. 수모가 시키는 대로 아버니와 어머니에게 절을 올렸다.
중후한 아버지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나라의 세자비! 앞으로는 중전이 될 막중한 몸이다. 항상 네 몸
은 송아무개의 훌륭한 집에서 태어난 여인이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되느니
라."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었다.
궁중에서의 잔치도 그녀로서는 잊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상감이던 시아버
지 문종의 기쁨과 문종왕후의 즐거움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항상 병약하
던 문종은 하루 빨리 양위를 하도록 서둘렀다. 얼마 후 침소에 눕게 된 선
왕은 기어코 양위의 뜻을 밝히었다.
여러 날 있던 잔치, 동궁과의 초야를 치루던 일들, 그녀는 한 가지도 빠치
지 않고 머리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또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면 온화한 가을로 접어든 어느날 베
풀어졌던 상감의 즉위식이었다.
상감은 단종이라고 호명(號命)되고 그녀는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불리워졌
다.
이제는 중전이 되었다. 열세살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국모의 자격을 지녔다.
옆에 뫼시는 시녀는 여전히 월선이었다.
"중전마마.. 참으로 훌륭하시옵니다. 대방마님께 한 번 그 자태 뵈어드리
고 싶사옵니다.
이것은 월선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근 한달을 부왕 승하로 상감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
는 일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이제는 명실공히 상감으로서의 모
든 정무를 손수 보게 되었다. 물론 옆에는 세종 때부터 충신인 김종서, 황
보인, 정인지, 신숙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평연월은 단종에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감의 삼촌인 수양대
군의 야망이 날로 깊고 두터워져 가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왕비는 처음에
어린 단종을 도웁고 보필하는 체하는 수양대군이 참으로 호탕하고 훌륭한
종친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충성스럽게 상감을 받드는 종친이라고만
여기고 반기던 터였다.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동지규합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들의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들은 먼저 눈의 가시 같은 우의정 김종
서를 죽이기로 의논이 되었다.
드디어 수양은 김종서 부자를 먼저 처치하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는 어진
신하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단종은 이제 왕위가 역겹기만 했다. 더 앉아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단종은 마침내 양위를 결심했다. 침통
한 얼굴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 주겠노라고 상감의 말은 충성 된 신
하들을 슬프게 했다.
수양은 세조라 이름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조 제 칠대 임금이었다. 그녀의
상념은 끝이 없었다. 친가에 있던 생활은 빼고도 궁에 들어갔던 열세살부
터 단종의 참사까지 육년이라는 세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육년간의 역사였다.
자신은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몸이지만, 자신의 마음이지만 어떻
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친가에서의 십삼년은 어머니의 표정
대로, 어머니의 말씀대로 움직였다.
궁에 들어간 날부터는 상감의 용안의 움직임이 바로 자신이었다. 상감이
웃으면 따라 웃었다. 상감이 찌푸리면 같이 찌푸렸다. 임금이 울면 같이
소리없이 울었다.
궁 속의 온갖 골육상쟁, 권모술수들을 직접 듣고 보지는 못했다. 단지 공
기로 알았고 전해 듣는 얘기로 짐작했다. 여하간 지아비의 원수는 삼촌인
지금의 세조가 틀림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원망은 지금의 상
감에게 쏠렸다. 그렇게도 귀중한 아버지마저 멀리 산골로 귀양을 보냈다.
언제 또 무슨 나쁜 소식을 가져다 줄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슬픔에, 그리
고 갖은 악랄한 조정의 생태에 숙련되어 버린 몸이었다.
이제는 어떤 소리, 어떤 사건도 그녀에게 놀라거나 감격 같은 것으로 안겨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어머니를 위로하는 길이 자신을 위로하는 길이
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이미 임종할 날만 기다리는 반송장 같은 모양으로 자리에서 일어
나지 못하는지가 한 달이 넘었다.
아버지가 사사된 것이 귀양가던 바로 이듬해 봄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
다. 이런 소식은 어머니에게서 모든 감정을 빼앗아가 버렸다. 단지 딸을
위해서 딸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 나가는 삶이라고 보였다. 왕비는 이제
겨우 스무살이 넘었다. 옆을 지키고 있는 월선이는 노처녀가 되어 있었
다.
"중전마마, 아무래도 대방마님께서 미음도 잘 못 잡수시니 큰일났사옵니
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여간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녀의 얼굴은 이십세 젊은 여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소복을 입고 있는 그
녀의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누른빛이 베어나오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부원군 대감께서 들르실 거예요."
"어찌 아니, 네가?"
"어제 돌아가시면서 아무래도 마님의 용태가 심상치 않으니 내일부터는 내
가 하루에 한 번씩은 들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분은 아무래도 우리들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신 분만 같구나..."
"정말 그렇사와요."
"월선아, 난 무엇보다 네 걱정이 태산이다. 이십이 넘은 노처녀가 여지껏
나 때문에 시집도 못 가고... 나야 태어나길 양반집에 태어나고 뫼신 지
아비가 상감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네 일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구나.
늙은 처녀가 돼서 제대로 시집 가기 어려우면 하다 못해 착한 홀아비 자리
라도 가야 할 텐데...."
그녀의 진정한 근심거리는 월선이었다.
"마마께서는 입만 벌리시면 그 말씀이셔요. 저는 중전마마에게 시집 왔다
고 생각하고 사는걸요... 쇤네에게는 이것이 제일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
다."
"너 같은 충비를 가진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인지도 모르겠구나."
"마마, 쇤네 역시 마마님같이 훌륭한 분을 뫼셔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
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후는 둘이 다 말이 없다. 그들은 말이 없어도 가슴 가득히 각기 상대를
생각하고 근심하는 일이 차 있어 언어라는 것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주인인 그녀는 월선이가 처녀로 늙어가며 자기만을 섬기며 옆에 있는 일이
눈물 겨웁도록 고마왔다.
시녀인 월선이는 하루 하루가 질식할 것 같은 중전마마의 생활이 불쌍하고
딱하다 못해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살이라도 깎고 뼈라도 갈아
서 섬기고 싶었다.
"월선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머니께서 정신 좀 차리셨는가..."
"예."
그들은 대청으로 올라섰다. 밥도 짓고 어머니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이
재빨리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중전마마, 어젯밤부터 이렇게 한 번도 눈을 안 뜨시고 주무시기만 하옵니
다."
"그래? 어젯밤에 내가 물러간 후부터 쭉 이런 용태시냐?"
"예, 눈을 뜨셔야 미음이라도 올릴 것이온데 걱정이옵니다."
그녀도 걱정이 되었다. 이 경우를 걱정이라는 말로만 표현을 다할 수 있을
까?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어머니 머리맡에 가서 앉았다. 조용한 호흡으로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성성한 백발과 깊은 얼굴의 주름들이 지난 날을
얘기해 주는 듯싶었다.
그녀는 가만히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어머니...."
조용하게 불러 보았다. 대꾸도 표정의 변화도 없다. 다시 불렀다.
"어머니!"
약간의 경련 같은 것이 이는 것 같았다. 다시 초조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그러더니 딸의
손을 찾는 듯이 야위고 흰 손을 저으며 무어라고 입을 벌리려 한다.
"저 여기 있습니다. 어머님 이것이 제 손이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는다. 눈을 감은 채다. 노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소
리없이 흘렀다.
그녀는 일찍이 어머니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철이 들
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어머니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없었다. 항상 입언저리에 띠운 인자스런 미소로 딸을 사랑하고 대견히 여
기는 마음을 읽었고 서릿발 같이 차고 굳은 표정에서 집안의 근심을 눈치
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그녀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어머님, 어디가 많이 편찮으시오니까? 말씀 좀 해보셔요."
딸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어머니는 고개를 두어번 가로 젓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월선이 너 가서 부원군 대감께 곧 좀 듭시
라고 여쭙고 오너라."
"예, 곧 다녀오겠습니다."
월선이는 뛰어 나갔다.
"어머님, 돌아가시면 안 되어요. 이몸은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그녀의 꽁꽁 묶어 놓았던 마음의 방파제는 확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그대
로 쓰러졌다. 앞 뒤 경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은
몇 해 쌓였던 단장(斷腸)의 피눈물이었다. 소리는 낼 수가 없었다. 어깨
만 물결쳤다. 참아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누가 혹시 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으로 울음
을 그쳤다.
"아.. 가.. 야..."
어머니가 어렸을 때 부르던 대로 띠엄띠엄 불렀다.
"예, 소녀 여기 있사옵니다."
그녀도 어느덧 소녀라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부엌 여인이 미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노부인은 부엌 여인이 주는 미음을 반 사발이나 거의 받아 넘
겼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대청마루에서 정미수의 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제가 왔습니다."
그녀는 반가왔다. 시누이의 아들이니 조카지만 마치 오라버니나 웃어른같
이만 느껴졌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어머니께서 위중하시어서..."
그는 곧 들어왔다. 여전히 그녀에게 큰절을 하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노
부인은 임종에 가까웠는지 약간 호흡이 거칠었다. 정미수가 방에 들어온지
얼마 만에 노부인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운명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밥짓는 여인가 월선이가 구슬프게
통곡하였다. 정미수도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홀홀 단신이 되었다. 정미수는 재빨리 모든 장사(葬事)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장례가 끝나는 사흘낮 사흘밤을 눈 한 번 붙여보
지 못하고 미음으로 연명하는 그녀를 월선이는 딱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대청에 어머니 상청을 모셨다. 그녀는 온 젊은 긴날을 상청에서 살려고
이승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삼년을 하루같이 상감의 상청을 모셨다. 아
버지 상청 나간지도 얼마 안 되었다.
이제 또 그 자리에 어머니 상청을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배례를 잊지 않았
다. 오히려 그녀는 그 시간이 가장 뜻있고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부엌 여인도 내보냈다. 후원 별당은 닫아두고 안채로 월선이와 둘이서 옮
겼다.
"중전마마, 어제 저 행낭채 엄서방이 그러던데요."
"뭐라고 하더냐? "
월선이는 두 무릎으로 가만히 다가와서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글쎄, 지금 상감께서 온 몸에 부스럼이 나셔서 아무리 영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다가 갖은 선약을 다 쓰고 대국에까지 가서 약재를 구해다가 쓰셔
도 효험이 없어서 궁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하고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눈빛만 약간 불 같은 것이 지났을 뿐
이다. 인간이 직접 못 갚아도 신명은 어떤 형태로든지 갚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봄을 보내고 겨울도 보냈다. 일년이면 나가는 마지막 제사도 끝냈다. 정미
수는 이제 이 넓은 집에 있어 무얼 하겠느냐면서 월선이와 같이 자기집으
로 거처를 옮겨서 지내자고 몇 번이나 권해 왔다.
그러나 쉽게 결심이 서지가 않았다. 지아비를 그리는 후원, 매화고목 앞을
떠날 수가 없어서 그랬고, 아버지의 불쌍한 혼을 생각해서도 그랬고, 어머
니가 시종일관 양반집 부인답게 맞은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도 그랬다.
"월선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부원군 댁으로 옮기는 것 말이다."
"예,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마마께서는 이 친가를 따나기 싫어하시는 게
아니옵니까?"
"그렇다. 나는 잠시도 이 집을 떠나기가 싫다."
"그럼 나리께 분명히 그 뜻을 말씀하시고 좀 더 지내신 다음에 대감께 의
지도 하실겸 가시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되옵니다."
"오냐, 네 말대로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마음은 아랑곳없이 세월이 흘렀다. 수년을 정미수의 눈물겨운 비호 밑에서
그녀들은 목숨을 지탱해 나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상감의 생신날과 돌아간 날을 소찬이나마 차려서 추모하
는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억울함과 어머니의 갸륵한 생애를 애처롭게
여기며 제삿날을 잊지 않고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 되었다. 동갑인 월선의 나이도 스물다섯, 그들은
고난의 세월을 조용히 견디어 나갔다. 이제는 주종이 진정 아니었다. 친구
였다. 아니 혈연 같았다. 뜻있는 사람이며 주위의 사람들, 동리 사람들도
정순왕후를 얘기하려면 꼭같이 월선이를 칭찬하고 찬미했다.